# 206
8장, 희망을 노래하자 (1)
병실 안 모두의 온 신경이 집중됐다.
그저 고해진의 손가락이 아주 작은 움직임을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절대 별 것 아닌 일이 아니었다.
지난 일주일 내내 애닳게 바라왔던 현상이다.
너무 놀란 탓인지 고해진의 와이프와 남궁훈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고해진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김진언 교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껏 무게 잡힌 모습을 보여줬지만 막상 고해진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고는 말을 잃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로 한지호의 의술이 즉각적인 효과를 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중 하나라는 S대 교수진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재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쇼크를 입고 혼수상태에 빠진 고해진을 위해 기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달랐다.
누워있는 고해진을 진맥하고 심장이 문제라는 색다른 진단을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약침이란 것을 준비해 왔다.
사실 김진언 교수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치료였다.
한지호의 명성과 전력이 워낙 화려하고, 최규열 센터장의 부탁까지 있으니 마지못해 지켜본 것뿐이다.
김진언은 고해진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기만을 바랐었다.
만에 하나라도 한지호가 한의학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한지호만 병실 안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고해진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자마자 병상 가까이 다가갔다.
투두둑-
다시 한 번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오른손이다.
왼손에 이어 오른손에서도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다만 고해진의 두 눈은 입원 이후 늘 그래왔듯이 감겨 있었다.
한지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고해진의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눈동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반응이 있다!’
억지로 눈꺼풀을 열자 동공이 흔들렸다.
외부의 자극에 눈동자가 반응한다는 뜻이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잠들었던 한지호의 영웅 고해진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심장의 기운이 회복되며 뇌에도 좋은 영향을 끼친 게 분명해. 내가 조금만 더 도와주면…… 할 수 있어!’
한지호가 빠른 판단을 내렸다.
그는 병상 옆에 올려둔 케이스에서 여분으로 가져온 침을 꺼냈다.
이때까지도 김진언 교수와 남궁훈, 고해진의 아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그들에게 설명할 틈도 없이 침을 들었다.
그의 침이 향한 곳은 고해진의 머리다.
심장이 아닌 두뇌, 상단전을 자극해서 의식이 빨리 돌아오게끔 도우려는 것이다.
꾸욱- 꾹-
심장 부위에 약침을 놓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스피드였다.
사람의 머리 역시 함부로 침을 놓아선 안 되는 자리다.
하지만 자신감과 희망을 동시에 얻은 한지호는 적토마처럼 질주했다.
고해진의 정수리 백회혈을 기점으로 이마 위와 관자놀이까지 제법 빽빽하게 침이 꽂혔다.
그가 병상에 바로 누워있기에 머리의 앞쪽 절반에 중점적으로 침을 놓은 것이다.
“후우- 후우-.”
뭔가에 홀린 듯 전력을 쏟아내며 침을 놓은 한지호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등 뒤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
고해진의 아내가 남편을 부르며 병상으로 걸어왔다.
손가락 외의 또 다른 반응을 캐치한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병상 끝까지 쭉 뻗어있는 고해진의 다리가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고해진의 아내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병상을 붙잡았다.
“해진아-!”
남궁훈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오랜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드르르륵!
소리를 들은 간호사들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김진언 교수가 팔을 뻗어 간호사들에게 조용히 지켜볼 것을 지시했다.
“여보, 눈을 떠봐요. 나에요, 여보!”
“해진아! 이제 그만 일어나자. 널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임마!”
한지호의 가슴까지 울컥하게 만드는 절절한 부르짖음이 이어졌다.
그들의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아니면 삼칠근 약침에 이어 머리에 놓은 침술이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일까.
고해진의 신체 반응이 점점 활성화 되고 있었다.
“부원장님 모셔옵시다.”
“네, 교수님.”
김진언은 간호사에게 박문원 부원장을 데려오라고 호출했다.
주치의로서 고해진이 의식을 회복할 거라는 사인을 확실히 받은 탓이다.
스르륵-
드디어 고해진이 눈을 떴다.
스스로의 의지로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을 열고 검은 눈동자를 드러내보인 것이다.
“여보-!”
고해진의 와이프가 절규하듯 고성을 토해냈다.
비명이 아니었다.
일주일을 넘어서 다시 남편과 눈을 마주치게 된 환희, 그간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얽힌 채 비명처럼 튀어나온 것뿐이다.
한지호도 등골까지 짜릿해지는 감격을 느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과 다리를 움직인데 이어 눈까지 뜬 고해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얼굴 표정이 매우 부자연스러워 보였지만, 오래도록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가 의식을 찾은 것 자체가 기적이다.
“어… 으…… 아…….”
그토록 듣고 싶었던 고해진의 목소리.
발음이 온전치 않았고, 말도 제대로 못 했지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남궁훈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고해진의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을 마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감동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감정을 절제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보호자들이 환자와 마음놓고 해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배려심으로 뒷걸음질을 친 한지호의 눈가도 살짝은 촉촉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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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장, 정말 나서지 않겠소?”
S대 병원 부원장이자 실세인 박문원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재차 하나지호의 의사를 물었다.
일주일 넘게 의식을 잃었던 고해진이 깨어났다.
한지호의 약침 치료를 받고 얼마 지나지않아 기적이 발생한 것이다.
당연히 공은 한지호의 몫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S대 병원의 김진언 교수가 재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냈지만, 혼수상태에서 앞날을 장담하기 힘들던 고해진을 되살린 건 한지호였다.
소식을 알게 되면 언론과 국민들은 당연히 한지호를 주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는 공식 기자회견에 나서지 않겠다고 말했다.
재수술을 성공시킨 김진언 교수가 의료진을 대표해 기자회견을 하라고 청했다.
당사자가 된 김진언 교수도 놀랐고, 박문원 부원장 역시 한지호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했다.
“진심입니다, 부원장님. 저는 기자회견에 나서지 않는 대신 의료사고를 낸 의사를 규탄하는 서명을 하고, 고해진 씨의 후유증 재활 치료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기자회견이 규탄 서명과 재활 치료를 하는데 지장이 가는 일은 아니지 않소?”
“그렇습니다만… 염려되는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제가 고해진 씨의 명성과 이 사건에 집중된 여론을 이용해 주목을 받으려고 또 나섰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 무슨! 사실과 완전히 다른 소설이지 않소.”
“의료진을 대표해 기자회견을 하게 되면 오해가 사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재수술과 환자 관리에 힘을 쓰신 김진언 교수님의 공을 가로채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 교수님이 대표로 기자회견을 하는 게 순리에 맞는 것 같습니다.”
한지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깊이 고심한 흔적이 느껴졌다.
그는 단순히 논란을 피하기 위해, 혹은 겸손한 척 하려고 기자회견을 사양하는 게 아니었다.
맞은편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은 김진언 교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제 막 30대가 된, S대 병원에서라면 김진언 교수와 눈도 못 맞출 레지던트들과 또래인 한지호가 어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깊은 마음 씀씀이는 국내 의료계의 최고 원로 중 한 사람인 박문원 부원장도 감동시켰다.
“한 원장, 그렇게까지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소.”
“Y대 암 센터와의 협진은 처음부터 제가 주도해서 진행한 프로젝트였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니까요. 그저 사춘기 시절의 영웅에게 개인적인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알겠소. 우리 김 교수가 기자회견을 잘 할 것이오.”
박문원의 시선이 김진언 교수에게 향했다.
그는 즉각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 원장님의 약침 치료가 의식 회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빼놓지 않고 전달하겠습니다.”
“하하, 기자회견이야 김 교수님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는 한 번 더 고해진 씨를 보고 역삼동으로 가보겠습니다.”
기자회견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지은 한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밤 새 약침을 준비해서 S대 병원으로 왔고, 자신의 손으로 기적을 만들었지만 쉴 틈이 없었다.
어젯밤 한국에 도착했으니 오늘부터는 서울 원화 한의원에서 정상적으로 진료를 해야 한다.
이미 오전 진료는 물 건너 갔고, 오래 기다린 한의원 환자들을 다 봐주기 위해서 야간 진료는 확정적이었다.
꼬박 이틀을 눈도 못 붙이고 일 하게 생긴 것이다.
그래도 피곤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운기조식 덕분에 내공으로 피로를 풀었고, 고해진을 깨웠다는 사실이 한지호에게 새로운 힘을 줬다.
박문원 부원장, 김진언 교수와 차례차례 악수를 하고 나온 한지호는 고해진의 병실로 향했다.
여전히 병실 안으로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특실 병동을 지키는 간호사들은 한지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대신 문을 열어줬다.
S대 병원에서 잔뼈가 굵은 간호사들도 한지호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게 당연했다.
“좀 어떠세요?”
병실 안으로 들어선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하루 사이에 꽤나 익숙해진 두 얼굴, 고해진의 아내와 남궁훈이 병상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고해진도 처음 눈을 떴을 때보다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선생님!”
고해진의 와이프는 전과 달리 활기찬 음성으로 한지호를 반겼다.
남편이 눈을 뜨면서 희망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남궁훈도 씩씩한 웃음을 보이며 한지호를 병상 가까이 이끌었다.
“해진이가 한 선생님께 드리고픈 말이 있답니다.”
누워있는 고해진 옆으로 간 한지호는 그와 눈을 맞췄다.
의식은 회복했지만 원래 상태로 돌아오려면 힘든 재활 치료를 거쳐야 한다.
눈을 막 떴을 때는 혀가 굳어서 말도 제대로 못했었다.
“고, 고, 고… 맙… 스…… 니다.”
고해진이 더듬더듬 짧은 문장을 꼭꼭 씹어서 말했다.
덜덜 떨리는 입술로 불편함을 견디며 진심을 전한 것이다.
한지호가 박문원, 김진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족들이 그간의 일을 설명해준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으며 고해진의 손을 꽉 잡았다.
“의료사고로 인한 천공과 장 출혈은 김진언 교수님의 재수술로 수습이 됐고, 쇼크로 인한 후유증 역시 차차 나아질 겁니다. 제가 필요할 때마다 들러서 재활에 좋은 두뇌침을 놓아 드리겠습니다. 사춘기 시절 힘이 되었던 고해진 씨의 노래를… 반드시 라이브로 들을 겁니다. 그러니 힘을 내주세요.”
길게 말을 하기 힘든 고해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궁훈과 고해진의 아내는 다시 한 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다.
소리 없는 울음이 병실을 따뜻하게 덮었고, 한지호는 새삼 한의사의 길을 걷기 잘 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순간, 고해진의 웃는 얼굴이 세상 그 무엇보다 보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