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6장, 영웅이 영웅에게 (2)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
한지호가 양해를 구했다.
고해진의 부인과 남궁훈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시간을 얼마를 써도 상관이 없었다.
S대 병원에서도 혼수상태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원래 의식불명에 접어든 환자는 하늘이 돕지 않으면 언제 눈을 뜰지 모른다.
그저 신체반응을 체크하며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한지호에게 거는 기대가 더욱 컸다.
혹시라도 그가 해결책을 찾아낸다면 새로운 희망이 깃드는 것이다.
한지호는 자신의 감각을 믿고 몰아(沒我)의 경지로 나아갔다.
모든 것이 지워진 세상에 오직 고해진의 가느다란 맥박만 남겨졌다.
실낱 같은 가능성을 따라 항해가 시작됐다.
심장이 뛰는 소리.
그 안에 담겨있는 무궁무진한 몸의 아우성을 들어야 한다.
한의학은 단 한 가지 확신에서 시작된 의술이다.
몸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원인과 해결책도 몸 안에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손을 쓸 수 없는 질병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인간의 몸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한의학의 근본 정신이다.
“후우우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지호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고해진의 손목을 놓았다.
끝까지 조심스럽게 고해진의 손을 원래 위치에 놓아둔 그가 몸을 돌렸다.
병실 뒤편에서 진맥하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본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섣불리 기대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래도 희망을 걸어보자는 마음이 뒤섞여 복잡한 표정이었다.
한지호는 의자에서 일어나 남궁훈과 고해진의 아내를 불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원장님.”
고해진의 와이프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쇠한 기력으로 멀쩡히 서있는 게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대신 남궁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지호를 바라봤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지만… 도전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섣불리 기대를 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무척 조심스럽습니다만, S대 병원 의료진과 협의해서 치료를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그 말씀은…….”
내내 차분함을 유지하던 남궁훈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목소리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지호는 표현을 절제하며 뜻이 왜곡되지 않게 전했다.
“진맥을 해보니 심장의 기능이 매우 약해져 있었습니다. 맥을 짚기 힘들 정도였죠. 당연히 원인은 천공과 장 출혈 때문입니다. 우선 심장 기능을 원래대로 회복 시키면 뇌에도 충분한 혈액과 산소가 공급되어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뇌의 충격이 문제라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복합적입니다. 하지만 무리하게 두뇌를 자극하는 것보다는 비정상적으로 저하된 심장의 기운을 살리는 쪽이 낫습니다. 자연스럽게 뇌도 영향을 받기를 바라야죠.”
“아무튼 해진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신 거지요?”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실낱 같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만,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한 원장님! 무슨 수를 쓰셔도 좋으니 제발 해진이를 일으켜 주십시오!”
남궁훈이 평정심을 잃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옆에 서있던 고해진의 와이프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채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선생님… 우리 애기 아빠가 몇 년만에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부디 다시 한 번 노래를 할 수 있게……. 만약 그게 욕심이라면 그냥 아이들에게 웃어줄 수 있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순도 100%의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신(神)이 아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고, 모든 치료에 성공할 수도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외에는 함부로 잠당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늘 그러했듯이, 그러나 조금은 더 특별한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당장 S대 의료진과 협의를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지호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보통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의학적 지식과 역량을 총 동원해서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뜻이다.
화려한 수식어는 없지만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그의 말이 남궁훈과 고해진의 아내를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이로서 한지호는 사춘기의 영웅을 치료하게 됐다.
일주일 째 의식 없이 쓰러져 있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고해진에게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한지호에게 주어진 미션은 이번에도 결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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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대 병원의 의료진을 설득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사실 한지호가 아니라면 다른 한의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 할 일이다.
원래 양방과 한방은 사이가 좋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수처럼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내기도 한다.
특히 대학 병원의 의사들은 노골적으로 한의사를 무시하기 일쑤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한의학은 비과학적 민간 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한의학계도 어느 정도는 현대 의학의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치료 사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체계적인 실험과 검증을 거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지호도 원화 아카데미를 세워 한의학을 집대성하려는 것이다.
어쨌거나 현대 의학을 배운 의사들에게 홀대를 받는 입장인 만큼 협진 제의가 무시 당할 가능성이 높다.
보통의 한의사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예외였다.
그는 게임에서 정해진 룰을 뒤엎는 치트키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한지호는 고해진의 아내와 남궁훈의 허락을 받은 뒤 곧바로 S대 병원 주치의를 찾지 않았다.
대신 Y대 암센터의 최규열 센터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금순 환자의 췌장암을 함께 치료하며 인연을 맺은 Y대 의대는 원화 아카데미에도 파트너로 참여한다.
암센터장 최규열은 다른 누구보다 한지호를 깊이 신뢰하고 있다.
그렇기에 구구절절 길게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고해진 사건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슈화가 됐고, 한지호가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최규열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바로 알아들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규열은 30분만 기다리라고 했고, 한지호는 병실 안에서 자리를 지켰다.
영문을 모르는 남궁훈과 고해진의 아내가 불안해했다.
혹시 S대 병원에서 반대를 하면 보호자인 자신들이 직접 나서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지호는 다 괜찮을 거라고 부드럽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30분이 지났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두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지호는 당연히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고해진의 아내와 남궁훈은 두 명의 의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교, 교수님…. 부원장님!”
먼저 들어온 중년 의사는 고해진의 재수술을 집도한 김진언 교수다.
그 뒤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의사는 S대 병원의 부원장 박문원이다.
주치의와 부원장이 동시에 병실로 찾아왔으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 원장 한지호입니다.”
“말씀은 정말 많이 들었소.”
박문원이 손을 내밀었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최고 거물 중 한 사람인 그가 악수를 청한 것이다.
한지호는 목례를 하며 박문원이 내민 손을 잡았다.
뒤이어 고해진의 주치의 김진언 교수가 입을 열었다.
“최규열 센터장님께 설명을 들었습니다. 고해진 환자를 치료하고 싶으시다고…….”
“불쾌하실 수도 있는 일이라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아닙니다. Y대 암센터에서도 협진을 성공시킨 한 원장님의 제안이라면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부원장님과 함께 온 것입니다.”
김진언은 나이 어린 한지호 앞에서 예의를 잃지 않았다.
주치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도를 지켰다.
최규열이 부원장에게 다이렉트로 전화를 걸었고, 한지호의 엄청난 명성과 전력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김진언 교수의 올곧은 인성도 칭찬해줘야 할 것 같았다.
“항암 협진에 성공한 적도 있고, 최 센터장이 강력하게 추천을 했고, 또 현재 우리 병원으로서는 고해진 환자의 상태를 개선시킬 특별한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오. 허나 무턱대고 치료를 맡기는 것도 힘드니 어떤 대책을 강구했는지 이 자리에서 듣고 판단을 하려고 하오.”
박문원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만하면 S대 병원에서 엄청나게 전향적으로 나온 것이다.
확실히 최규열과 한지호, 두 사람의 이름값이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간단히 제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지호는 시종일관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박문원 부원장이 의료계의 대원로이기도 하지만, 미리 말을 맞추지 않은 상태에서 불쑥 협진을 제안하는 것이 대단한 결례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 진맥을 했는데 고해진 씨의 심장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약화 됐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수치로 나타나는 것 이상으로 기운이 쇠하였습니다. 심장의 기운을 회복시킨다면 뇌에도 산소와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되며 좋은 작용을 하겠죠. 우선 심장을 치료하고 나타나는 신체 변화를 살펴보면 될 것 같습니다. 바로 깨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실마리를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바이탈로는 잡히지 않는 기운이 약해졌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기운이라는 개념이 현대 의학에서 통용 되지 않지만, 제가 확신 할 정도입니다. 수치 상으로도 심장 기능의 약화는 일정 부분 증명이 될 겁니다.”
“좋소. 그렇다면 한 원장이 생각한 방안을 말해보시오.”
“약침입니다.”
“약침?”
생소한 단어인지 박문원 부원장이 눈을 크게 떴다.
잠자코 둘의 대화를 경청하던 김진언 교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지호는 거침없이 설명을 계속했다.
“삼칠근이라는 약재가 있습니다. 무척 구하기 어렵고 귀한 것이지만, 고해진 씨처럼 심장의 기운이 떨어진 환자에게 이보다 좋은 것을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의식불명의 상태에서는 탕약이나 환단을 먹을 수 없죠. 억지로 입을 벌리고 약을 넣어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 할 겁니다. 그래서 약재의 정수, 원액을 침을 통해 몸 안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약침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약액을 주입하는 방법과 침 전체에 약 기운을 입히는 방법을 모두 사용하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한의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들다.
하지만 포인트는 명확하게 전달됐다.
먼저 심장의 기운을 회복시키는 삼칠근이라는 약재가 필요하고, 그 약재를 침을 통해 쓰러져있는 고해진의 몸 안으로 넣겠다는 뜻이다.
사실 박문원과 김진언은 한지호의 치료법이 통할지 판단할 수 없다.
한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나름대로 분명한 진단과 해법을 갖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김 교수,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원장님이 자신있게 말씀하시고, 최 센터장님의 부탁도 있으셨고… 무엇보다 고해진 환자에게 침을 놓는 것이라면 위험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결정이 났다.
애초부터 박문원 부원장은 주치의 김진언 교수가 강하게 반대를 하지 않으면 치료를 허락하려 했었다.
“한 원장, Y대에서 해낸 것처럼 우리도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보십시다. 허나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소. 또 환자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즉각 김 교수와 상의를 해야 하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부원장님. 고맙습니다, 김 교수님.”
한지호가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남궁훈과 고해진의 아내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새로운, 그러나 작은 가능성 하나가 열렸을 뿐인데도 희망을 얻는 것이다.
한지호는 두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아울러 어려운 부탁과 결단을 해준 최규열 센터장과 박문원 부원장, 김진언 교수의 위신을 살리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영웅 고해진의 노래를 다시 듣기 위해서 반드시 치료에 성공해야 한다.
삼칠근(三七根)과 약침(藥鍼).
한지호가 찾은 열쇠가 과연 굳게 닫힌 자물쇠를 열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