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2장, 동백장 (1)
“국민 여러분, 오랜만에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뉴스입니다. 위천 한방병원의 유우선 병원장이 중국 당국에 구속 수감되어 우려를 샀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의료 사고가 아닌 소통 과정에서의 오해가 있었음을 발표하고, 유우선 병원장을 풀어줬습니다. 한 편, 유우선 병원장이 구속 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중국 공산당 추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은 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으며 자신으로 인해 한중 양 국의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내달 중순 임명되는 신임 상무위원의 유력 후보인 추 조직부장은 아울러 놀라운 의술로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켜준 한지호 원장과 중개 역할을 맡은 우리 보건복지부에 공식적으로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의료 사고로 인해 한중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이 대두 됐으나 오히려 양 국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것 같습니다. 자세한 소식, 베이징에 나가있는 김수철 특파원이 전하겠습니다.”
오늘 9시 뉴스의 첫 소식은 한지호가 추위안차오를 치료했다는 이야기였다.
유우선 병원장은 풀려나자마자 즉시 귀국했다.
원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중국에서 구속되며 큰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아마 당분간 유우선이 일선에서 진료를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위천 한방병원의 브랜드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의료 사고가 아닌 소통 과정에서의 오해라고 밝혀졌지만, 그래도 한 번 추락한 브랜드 가치는 다시 끌어올리기 어렵다.
무엇보다 건강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환자들은 작은 소식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의료 사고가 의심되는 일로 구속 된 한의사가 병원장인데 누군들 찝찝해하지 않겠는가.
전국에 깔린 위천의 프랜차이즈 지점들은 엄청난 영업 타격에 시달릴 게 불 보듯 뻔했다.
당장 망하지야 않겠지만 많은 환자를 잃고, 수습을 위해 어마어마한 지출을 해야 할 것이다.
반면 한지호는 성인이라 불릴 정도로 국민적인 추앙을 받게 됐다.
그가 추위안차오를 치료하고, 외교적 마찰을 해결했을 뿐 아니라 유우선을 풀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암암리에 퍼졌다.
발 없는 소문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경쟁 한의원의 병원장을 도와주고, 한의학 전체의 명예를 지킨 한지호는 국내 의료계에서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존재가 됐다.
명예도 지키고 실리도 다 챙긴 것이다.
만약 그가 추위안차오에게 위천 한방병원을 홍콩에서 쫓아달라고 부탁했다면 어땠을까.
실리를 얻고, 명성도 다시 한 번 높아졌겠지만 지금처럼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한국을 넘어 중국에서도 한지호의 이름은 하늘을 찌르게 됐고, 평소 그를 싫어하던 한의학계의 원로들 역시 이제는 인정을 할 수밖에 없어졌다.
새파랗게 어린 한지호가 한의학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라이벌을 구해냈으니 사람이라면 감동을 받는 게 당연했다.
국민들뿐 아니라 의료계의 인정, 그리고 정부의 찬사도 덤으로 얻었다.
중국과 외교 마찰을 빚게 되는 건 한국 정부에 큰 부담이다.
추위안차오를 빌미 삼아 중국 정부에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려 했었다.
그런데 한지호가 사건을 해결했고, 상무위원 후보인 추위안차오의 굳건한 신뢰를 얻었으니 일석이조였다.
외교적인 짐을 더는 동시에 앞으로 대중(對中) 외교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됐다.
보건복지부 장관 양성문이 개인적으로 칭찬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한지호는 9시 뉴스가 한창 방송 중일 때 삼청동 언덕에 있었다.
관광지로 자리 잡은 삼청동 거리 위쪽으로는 차 없이 다니기 힘든 언덕 지형이 겹쳐져 있다.
한남동, 평창동, 성북동에 이어 강북을 대표하는 부자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청와대나 종로와 가까우면서도 외부 사람들의 유입이 적어 부자들이 선호하는 동네였다.
외교관들도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한다.
한지호는 새하얀 벤틀리를 끌고 꼬부랑 언덕길을 거슬러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악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커다란 현대식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참 생뚱맞은 위치지만 전망은 환상적이었다.
이만한 규모의 현대식 갤러리 카페를 북악 스카이웨이 중심에 세우다니, 건물주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미로 풍수지리 좋은 명당에 카페를 세운 게 분명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허리를 숙였다.
신분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한지호의 얼굴이 곧 신분증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곳에는 약속 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한지호를 초대한 사람이 조용한 만남을 위해 갤러리 카페를 통째로 빌렸다.
약속장소의 위치로 보나 여러모로 외부에 절대 공개될 일이 없는 만남이다.
그러고 보면 주차장으로 나와 인사를 한 직원도 카페 소속이 아닌 것 같았다.
각 잡힌 정장에 절도 있는 동작.
한지호는 짐작이 갔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지이잉-
자동문이 열리고, 그를 안내한 직원이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지호는 그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무지막지하게 넓은 갤러리 카페 안에는 다른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지호의 감각에 경호 인력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잡혔다.
건물 위층에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누가 한지호를 초대했기에 이만한 공간을 빌리고, 별도의 경호 인력까지 함께 움직이는 것일까.
재벌 회장들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만큼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답은 간단했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대한민국의 국가수반,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지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왔지만, 막상 그를 가까이에서 보니 긴장이 됐다.
중국의 권력자인 추위안차오를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조국의 대통령은 지지 여부를 떠나서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반갑네, 한지호 원장. 실물이 아무 훤칠해.”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입니다.”
한지호는 대통령과 악수를 나눴다.
대통령은 언론에서 비춰지는 모습처럼 호쾌하고 남자다운 이미지였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대리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한지호와 대통령이 마주앉았다.
둘이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들이 다과를 내왔다.
하지만 한지호는 방금 막 내린 커피와 다양한 디저트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통령과의 독대.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일이기에 태연하려 해도 신경이 쓰였다.
“양 장관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큰일을 해낼 줄은 몰랐네.”
“운이 좋았습니다.”
“실력자들의 공통점이지. 자기 힘으로 해낸 일도 운이라고 말하는 것.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운 따위는 없다고 본다네.”
대통령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며 국가수반의 자리에까지 오른 칠순 노인의 이야기다.
한지호는 진중한 태도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실은 아주 귀찮아질 뻔 했었지. 중국놈들이 양아치나 다름없다는 걸 아는가?”
대통령의 입에서 상스러운 단어가 나왔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기에 말에 제약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어 웃음을 흘렸다.
“그렇습니까? 추위안차오 조직부장은 사람이 괜찮던데요.”
“개개인은 멀쩡한 놈들이 있을 수 있지만, 나라 자체를 보면 깡패처럼 굴지 않나. 이번에도 의료 사고를 핑계 삼아 강짜를 부리려다 한 원장 덕에 조용해진 것이지.”
“양성문 장관님께서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지호는 자신을 높이기보다 보건복지부 장관 양성문을 추켜세웠다.
그가 장관 직위를 걸고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면 추위안차오를 치료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자네는 참 신기한 친구로구만.”
그때 대통령이 묘한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예사롭지 않은 시선이었다.
자기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눈썰미는 속일 수가 없다.
혼탁한 정치판에서 최고가 된 인물이 바로 대통령이니 그 역시 범인(凡人)은 아니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자랑을 하려고 안달이네. 대통령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애를 쓴단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추위안차오를 치료해주고도 유우선을 풀러달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나를 만나서도 양 장관을 높이고 있네.”
“이상한 것입니까?”
“이상한 것이고 말고. 그 나이에 남을 높여 자기를 빛나게 할 줄 안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지. 배워서 아는 것인지, 타고난 성정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대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한지호는 가식적으로 겸손을 떠는 인물은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을 자기가 가지려고 아둥바둥 애를 쓰는 속 좁은 캐릭터도 아닐 뿐이었다.
사람은 보통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많아진다.
그렇기에 성공이 독이 되는 경우가 흔한 것이다.
놀랄만한 성공가도를 밟으면서 한지호처럼 주위를 잘 챙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런 성향이 한지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유우선을 풀어주며 그 이상의 명예를 얻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저 한 번 보고 싶었네. 오랜만에 이 나라에 대단한 인물이 난 것 같아서 미리미리 점을 찍어두고 싶은 게지. 늙으면 젊은 사람들 보는 맛에 사는 것 아니겠나?”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그래봐야 앞으로 5년에서 10년이면 내 역할은 끝이지. 다음은 자네 같은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 줘야하네. 아직은 생각이 없겠지만, 훗날 정치를 하는 것도 그려보게나. 사람을 고치는 것만큼 나라를 치료하는 일도 의미가 있으니.”
대통령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은근슬쩍 한지호에게 정치를 권한 것이다.
당장 구체적인 제안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쉽게 한 말은 아닐 것이다.
한지호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대통령의 말을 일상적인 덕담처럼 편하게 받아들이고 넘겼다.
일전에 그는 가짜 백수오의 진실을 알리며 야당 거물 정치인 민시헌과 악연으로 얽힌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정치권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력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게 됐다.
중국의 상무위원 후보를 치료해줬고, 양성문 장관과는 자주 만나는 사이다.
인천시 경제부시장 백성필과도 영종도에 블랙문 카지노를 유치하며 호흡을 맞췄었다.
게다가 이렇게 대통령과 독대까지 하고 있으니 남들 눈에는 정치권력의 핵심에 근접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대통령의 말처럼 사람이 아닌 나라를 고치는 자리를 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한의사로서 더 이뤄야 할 것이 남아있었다.
한국과 중국, 나아가 세계에 이름을 떨치며 정점에 서고 나서야 다음 행보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청와대로 들러서 내 건강도 한 번 살펴봐주게. 다른 보상을 마다하고 나라를 위해 힘써준 자네에게 작은 보상이나마 되었으면 하네.”
“감사합니다.”
한지호는 대통령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을 진료 하게 되면 홍보 효과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대통령이 이참에 한지호를 확실히 밀어주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궁화장을 주고 싶지만, 이번에는 동백장 정도로 만족하게.”
“네? 무슨 말씀이신지…….”
“훈장 말이야, 훈장. 앞장서서 국위를 선양하고 외교에도 힘을 보탰으니 상을 내려야 할 것 아닌가.”
대통령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한지호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훈장을 받는다는 건 아예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12가지 종류의 훈장이 있다.
그 중에서 국민훈장은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경우 주어지는 것이다.
국민훈장에는 5가지 등급이 있는데 차례대로 나열하면 무궁화, 모란, 동백, 목련, 석류 순이다.
한지호는 고작 서른 살의 나이에 국가에서 수여하는 세 번째 등급의 훈장을 받게 됐다.
피겨 여왕이라 불리는 김연아 선수가 한지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체육훈장에서 가장 높은 청룡장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만으로 20대에 훈장의 주인이 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환자를 치료했을 뿐인데 국민훈장은 너무 과분합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동백장으로 결정했으니 그리 알게. 더 사양하면 무궁화장을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대통령은 뜻을 확고히 굳힌 듯 했다.
누구는 훈장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로비까지 벌인다.
그에 반해 한지호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동백장의 주인이 됐다.
클래스가 다른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