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장, 향기 뒤에 숨은 악취 (2)
‘목젖을 기준으로 아래에는 천돌혈이 있고, 그 위에는 사혈이 있다. 안면을 마비시킨 구절초의 독성은 사혈 근처에 모여 독 기운으로 고리를 만들었어. 사혈 바로 옆자리, 그곳이 바로 독환이 똬리를 튼 곳이야.’
한지호는 절개된 틈으로 소도를 넣은 채 다시 한 번 상황을 복기했다.
단순히 시간을 끄는 게 아니었다.
오직 한 번의 움직임으로 독환을 소멸시키느냐, 아니면 사혈을 건드리거나 멀쩡한 혈관을 자르느냐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서두르기 보다는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원샷 원킬을 성공시켜야 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봐야 이해시킬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혈도나 기경팔맥, 기(氣)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증거를 제시할 방법은 없다.
다만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한의학과 중의학을 아우르는 동양의 전통의학은 결국 기(氣)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러 기운의 성질과 흐름을 연구하며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발전한 게 의학이고, 사람을 죽이는 쪽으로 발전한 게 무공이다.
현대에 이르러 무공은 거의 소실됐고, 의학의 명맥도 상당 부분 끊겼지만 한지호 한 사람만이 무공과 의학을 제대로 계승했다.
그렇기에 사혈 옆에 맺힌 독환을 소멸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하는 사람조차 몇 없을 것이다.
‘간다.’
한지호가 고민을 끝냈다.
고민이라고 해봐야 몇 초 지나지도 않았다.
절개 부위에 얇고 가느다란 소도를 집어넣고, 아주 잠깐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불의 힘으로 독의 뿌리까지 불태운다!’
소도의 칼날에 덧씌워진 오금희 조공이 더욱 강렬해졌다.
화기를 머금어 살짝 붉어진 소도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1센티미터도 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고, 두 눈에는 핏발이 섰다.
서걱-!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표정하던 한지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낚시꾼들은 월척이 미끼를 물었을 때 이런 감각을 느낀다.
칼에 목숨을 건 검객들은 적을 찌르는 순간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게 바로 손맛이다.
한지호는 분명한 손맛을 느꼈다.
목젖 위 사혈 바로 옆, 위험하게 응어리진 독환이 소도의 칼날에 맺힌 화기(火氣)와 맞닿아 반응하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환희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래서 낚시꾼들은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검객은 죽을 때까지 칼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독환을 제거했다는 기쁨이 너무 커서일까, 소도가 한지호의 예상보다 아주 살짝 깊이 들어갔다.
푸욱!
1미리미터 남짓한 차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관 하나가 터졌다.
한지호는 화들짝 놀랐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소도를 빼냈다.
그가 갈라낸 부위에서 예상보다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독환은 성공적으로 소멸시켰다.
오금희 조공의 강렬한 화기는 독성의 천적이다.
문제는 수습이다.
원래라면 간단한 드레싱 처리만 해도 됐을 일이었다.
그런데 혈관 하나를 건드리게 되면서 출혈량이 늘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지혈을 하지 못하면 어이없게도 과다 출혈로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다른 누구를 부르고 말고 할 시간조차 없었다.
한지호는 소도를 내팽개치고 자유로워진 두 손을 추위안차오의 목으로 가져갔다.
꽈아악!
다소 강하게 혈도를 눌렀다.
흘러나온 피가 손가락에도 묻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마음은 굉장히 다급했기 때문이다.
‘마혈을 눌렀으니 효과가 있어야하는데…!’
한지호는 목 부위의 마혈(痲穴)을 급히 눌렀다.
우리 몸 곳곳에 급소가 있는 것처럼 수많은 혈도 사이에서도 특별한 작용을 하는 부위가 존재한다.
사혈은 이름 그대로 강하게 누르면 죽을 수 있는 곳이고, 수혈은 사람을 깊은 잠에 빠트리는 혈도다.
마혈은 몸을 마비시키는 혈도를 뜻한다.
보통 무가(武家)에서는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때 마혈을 찌르는 점혈법을 썼고, 의가(醫家)에서는 마취 용도로 마혈을 누르곤 했다.
“휴우-!”
다행히 마혈을 누른 효과가 나타났다.
일시적으로 목 부위를 마비시키자 자연스레 출혈도 줄어들었다.
인위적으로 신체 일부를 마비시킨 것이기에 몸에 좋지는 않다.
그러나 과다 출혈 사태가 벌어지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을 것이다.
한지호는 준비해둔 드레싱 도구로 절개한 상처를 소독했다.
피가 많이 났지만 절개 부위 자체는 크지 않았기에 따로 봉합을 할 필요는 없었다.
“됐다, 됐어.”
한지호는 피가 멎어든 절개 부위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위안차오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아랫턱과 목젖 사이에 상처를 냈을 때도, 소도를 집어넣어 독환을 제거하며 혈관을 건드렸을 때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수혈(睡穴)을 누른 효과가 강력했던 것이다.
한지호는 이제야 두 팔을 위로 쭉 펴며 몸을 풀었다.
긴장을 해서인지 목 뒤와 어깨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전생에 의성(醫聖)이었던 사람이라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치료였다.
“조금만 쉬었다 나가자.”
한지호는 추위안차오가 누워있는 침대 옆 의자에 몸을 의탁했다.
바로 나가면 추따이언의 질문세례를 받아야 한다.
목을 절개하고 독환을 제거한 시간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소모한 내력과 체력을 보충한 다음 나가도 될 것 같았다.
망중한(忙中閑)이라고 할까.
그야말로 꿀 같은 휴식이었다.
의자에 앉은 한지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
“고맙소, 정말 고맙소. 선생의 은혜를 내 평생 잊지 않겠소.”
추따이언이 한지호의 두 손을 꽉 붙들고 흐느끼듯 말했다.
투박하고 모난 성격의 공산당 고위 간부가 한지호에게 완전히 감복한 것이다.
추위안차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감격에 떨고 있었다.
독환을 제거하고 한 시간이 지나 눈을 뜬 추위안차오의 증상이 눈에 띄게 완화됐다.
목과 어깨의 떨림은 완전히 멎었고, 입술 반쪽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던 것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직까지 턱과 볼, 눈이 조금 부자연스러웠지만 이만하면 엄청난 성과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추위안차오는 1초에 한 번씩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흉한 꼴을 보였었다.
지금 정도면 조금 불편해보일지언정 심각한 환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입술의 마비가 풀려서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고위 간부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해서 정상적으로 의견을 주고받기에 무리가 없었다.
“해독에 좋은 약재를 처방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오미자와 율무로 만든 차를 자주 드시는 게 좋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머지 마비 부위도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내 앞으로 국화차는 입에도 데지 않을 거라네!”
발음을 회복한 추위안차오는 분명한 엑센트의 영어를 사용했다.
한지호는 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국화차를 좋아하셨다면서요. 구절초에서 독성을 뽑아낸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마셔도 됩니다. 다만 당장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니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에.”
“치료를 하기 전에도 말해줬지만, 국화차로 독을 내는 게 무척 어려운 수법인 것이지?”
“그렇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약초를 다루는데 도가 큰 고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그만한 실력자가 흔하진 않을 터, 반드시 싸그리 잡아넣도록 하겠네.”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한지호가 고개를 숙이며 선을 그었다.
범인을 추적하고 잡는 일까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으니 나머지는 추 씨 형제의 일이다.
추위안차오에게 국화차를 진상한 인물부터 취조하기 시작하면 굴비 엮듯 줄줄이 관련자가 나올 것 같았다.
만약 추따이언의 예상대로 배후에 무슈라이가 있다면 중국 정계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다.
상무위원 자리를 위해 무슈라이가 추위안차오에게 독을 주입했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중국을 넘어 전세계가 주목하는 뉴스의 시작점에 한지호가 서있는 셈이었다.
“따이언, 내가 한 선생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데.”
“네, 형님.”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마비가 풀린 걸 체감하던 추위안차오가 독대를 원했다.
한지호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마움을 표하던 추따이언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친형제지만 서열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외모로 보면 추위안차오가 훨씬 어린 것 같아도 실제는 다르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추위안차오의 서열은 손가락 안에 꼽힌다.
추따이언이 잘 나가는 고위 간부라고 해도 형의 한 마디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와 둘만 남게 되자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한 선생은 나를 치료함으로서 어떤 일을 해냈는지 알고 있나?”
“중국 정치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제게는 그저 또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오, 하오. 내 앞에서 위축되지도, 뭔가를 바라지도 않은 그 당당한 태도. 처음부터 한 선생을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만날 인연이었겠지요. 치료 결과가 좋아서 저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건강이 회복됐으니 예정대로 상무위원에 오를 수 있을 것 같네. 그리되면 지금 이상의 권력을 잡고 중국 대륙 안에서 못 할 일이 없어지겠지.”
“그 권력, 꼭 필요한 일에 쓰시기를 바랍니다.”
“한 선생을 위해서도 서야하지 않겠나? 생명의 은인보다 도 소중한 귀인이 되었는데.”
추위안차오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직 마비가 100% 풀리지 않아서 미소를 지어도 표정이 상당히 어색했다.
하지만 그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치료의 보답으로 한지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말이다.
돈을 원한다면 부르는 대로 줄 것 같았다.
1억이 아니라 10억도 우스울 것이다.
아니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탁을 해도 된다.
상무위원이 된 다음 위천 한방병원을 홍콩에서 쫓아내달라고 해도 가볍게 들어줄 게 분명했다.
이만한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한지호도 생각이 깊어질 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공산당의 최고위 간부들을 소개해서 원화 한의원의 고객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도 괜찮을 것 같았다.
중국 상무위원들이 자주 찾는 한의원이라고 알려지면 더 이상 홍보 따위는 안 해도 된다.
홍콩과 본토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원화 한의원에 줄을 설 것이다.
“원하는 게 없는가? 망설이지 말고 무엇이든 말해도 좋네. 나를 고칠 때처럼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게.”
“그럼…….”
한지호가 생각을 정리했다.
대답을 하기에 따라 어마어마한 보답을 손에 쥐고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추위안차오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종류의 부탁을 치료의 대가로 원했기 때문이다.
“구속된 유우선 병원장을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일로 중국과 한국 사이의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그게 전부인가? 정말로?”
“유우선 병원장이 의료 사고를 일으킨 게 아니라 치료 과정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미스가 있었던 것 정도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대체 왜 그러는가? 혹시 유우선, 그 돌팔이에게 빚이라도 졌나?”
“아닙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입니다. 게다가 위천 한방병원은 제가 쓰러트리고자 하는 경쟁자입니다.”
“그런데 왜!”
“그래도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한의사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이번 일로 한의학이 조금의 오명도 쓰지 않기를 원합니다.”
“아…….”
추위안차오가 입을 크게 벌렸다.
놀람을 넘어 진심으로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사람은 자신과 그릇이 다른 인물을 만나게 되면 완전히 무장해제가 된다.
곧 중국에서 손꼽힐 권력자가 될 추위안차오지만, 그는 이 순간 한지호 앞에서 마음을 무장해제 해버렸다.
“향기로운 국화 뒤에 더러운 독이 숨어있었지만, 내 오늘 진짜 의성을 만났으니 지난 고생이 아깝지 않구나!”
그가 시를 쓰듯 감탄사를 토해냈다.
한지호는 중국인에게 처음으로 의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전생의 규호가 얻어냈던 칭호를 현생에서 다시 찾은 것이다.
“의성.”
한지호는 추위안차오로부터 들은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유치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는 엄청난 기회를 다소 허망하게 놓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지었다.
한국의 외교적 실리와 한의학의 자존심을 지켜냈기 때문에 아깝지 않았다.
이로 인해 더 큰 기회가 주어지게 됐다는 것을 한지호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진심으로 만족해했다.
의성이라는 과분한 칭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