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2장, 동백장 (2)
“와아- 진짜 신기해!”
“쉿! 목소리 낮춰. 떠들면 안 된다고 했지?”
“그래두…….”
“너희가 떠들면 지호 오빠한테 피해를 끼치는 거야. 조용히 있을 수 있지?”
“알았어, 누나. 우리도 그 정도는 알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천사원 아이들이 용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초아는 천사원의 큰누나답게 민우와 민기 형제, 그리고 지훈이를 능숙하게 다독였다.
하지만 그녀도 처음 와본 청와대가 신기한 눈빛이었다.
다만 이제 어른이니 꾹 참을 뿐이었다.
마리아 수녀는 그런 유초아와 아이들이 귀여운지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가 참 지호 덕분에 청와대에도 들어와 보고…….”
“저도 청와대는 처음입니다, 수녀님.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좋네요, 하하하.”
한지호 대신 마리아 수녀와 천사원 아이들을 안내해온 조기운이 환하게 웃었다.
그 역시 평생에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청와대에 들어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준 사람이다.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은 조기운은 자기 모습이 어색한 듯 틈만 나면 웃었다.
그때였다.
사회를 맡은 청와대 직원이 마이크 앞에 섰다.
드디어 본 행사가 시작 되는 것 같았다.
“대통령님께서 들어오시겠습니다.”
청와대 접견실의 원탁 테이블에 앉아있던 조기운과 천사원 사람들이 일제히 한 곳을 쳐다봤다.
접견실 맨 앞쪽의 원탁에 따로 앉아있던 한지호도 대통령이 입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접견실 내부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정치적 지지 여부를 떠나 국가 원수의 등장이다.
그만한 예의를 갖추는 게 당연했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멎어들고,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단상에 선 대통령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전 삼청동 위 북악산 자락에서 한지호와 독대를 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공개 석상에서는 의식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연출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바쁘신 가운데 자리를 빛내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국가를 위해 공헌한 분들을 상찬하는 자리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모두 일곱 분에게 영원히 기록 될 훈장을 수여하겠습니다. 한 분씩 호명할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짧은 인사말이었지만 좌중을 뭉클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50%가 넘는 득표율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정치인답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엿보였다.
곧이어 청와대 대변인이 훈장을 받을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 수여식에서는 총 일곱 명이 각기 다른 훈장을 받는다.
그럼에도 한 번에 한 명씩 대통령 앞으로 불러내서 훈장을 수여했다.
다소 시간이 걸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하게 대우해주는 것이다.
한지호의 차례는 세 번째였다.
청와대 대변인이 그를 호명했다.
“원화 한의원과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한지호 대표 원장님께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합니다. 한지호 원장님께서는 중국 정부의 요인을 치료하며 한의학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고, 한중 양 국의 우호 증진에도 기여를 하셨습니다.”
부름을 받은 한지호가 대통령이 서있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당당한 걸음걸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
국가로부터 완전히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지호는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고아로 태어나 사회의 천대를 받으며 성장해왔다.
그런데 30년 만에 대통령과 독대를 할 정도로 존재감이 큰 인물이 됐고, 영원히 기록에 남을 훈장 수여자로 이름을 올렸다.
“축하하네.”
대통령이 한지호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지호는 그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대통령이라고 하면 쳐다보기도 힘든 존재로 여겼었다.
하지만 따로 만난 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한지호의 위신이 달라져서인지 제법 편하게 느껴졌다.
짝짝짝!
대통령이 훈장과 메달을 수여하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한지호는 귀빈들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정확히 마리아 수녀의 테이블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몇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은 말,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을 담아 90도로 인사를 했다.
한지호가 훈장을 받는 걸 지켜본 마리아 수녀는 진즉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조기운과 유초아, 다른 천사원 아이들도 뿌듯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한지호의 인생에서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로 기억 될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좋은 날들이 많겠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는 기분은 무척 특별했다.
국민훈장 동백장의 주인, 한지호가 또 어떤 역사를 이뤄낼지.
이제 그는 지인들을 넘어 국가적인 기대를 받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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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동 M 타워 1층, 원화 한의원의 환자 대기실 벽면에 새로운 전시물이 추가됐다.
한지호가 수여 받은 국민훈장 동백장 메달이 자랑스럽게 걸린 것이다.
메달은 한의원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면으로 쳐다보게 되는 위치에 걸렸다.
훈장이 걸려있는 개인 병원이 전국에 몇 곳이나 있을까.
한의원으로 분야를 한정하면 아마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원화 한의원 1층에서는 그 어떤 호화로운 인테리어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한의원엔 메달을,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을 안겨준 한지호는 또 다시 홍콩으로 향했다.
베이징에서 추위안차오를 치료하고, 한국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홍콩 진료를 몇 번 건너뛰었다.
그 사이 예약이 밀렸고, 추위안차오를 치료한 게 알려지며 환자들이 폭증했다.
부원장 바이룽이 몰려든 환자들을 최대한 케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홍콩 원화 한의원 직원들은 한마음으로 한지호가 얼른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지호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홍콩 땅에 발을 내딛었다.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많은 게 변했다.
존폐 위기에 몰렸던 홍콩 원화 한의원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곳이 됐다.
아울러 센트럴에 성대하게 문을 연 위천 한방병원은 사실상 폐원 처리를 하는 중이었다.
유우선이 풀려나고, 의료 사고가 아니라는 중국 당국의 발표가 있었어도 한 번 잃은 신뢰를 되살릴 순 없었다.
어쨌거나 추위안차오가 유우선에게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심해졌다는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위천은 치명타를 입었고, 원화는 날개를 달았다.
늦은 시각 홍콩에 도착해 여독을 푼 한지호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리펄스 베이로 움직였다.
아직 한의원 문을 열기 전이다.
한동안 홍콩을 찾지 못한 한지호는 일부러 평소보다 훨씬 일찍 나왔다.
리펄스 베이의 상가에서 문을 열고 불을 켠 한지호는 곧장 원장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겸 원장실 책상 위에는 그동안 바이룽과 직원들이 올린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한지호가 추위안차오와 관련된 일로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한의원이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 수 있게 정리를 해둔 문서였다.
“역시 꼼꼼하단 말이야.”
한지호는 자리에 앉아 보고서를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바이룽과 직원들은 한눈에 업무 현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완벽한 보고서를 만들어 놓았다.
특히 바이룽이 기존 환자와 신규 환자의 상태를 분석해놓은 진료 차트는 압권이었다.
그동안 홍콩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들의 경과가 어떠한지, 신규로 한의원에 내원한 환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단번에 이해 됐다.
확실히 홍콩을 대표하는 대형 병원 중 한 곳인 칭화 병원에서 과장까지 달아본 바이룽의 경험이 녹록치 않았다.
만족스런 얼굴로 진료 차트를 검토한 한지호는 눈길을 돌렸다.
그는 예약 대기 리스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직 홍콩 원화 한의원에 내원하진 않았지만, 한지호가 있을 때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잡아놓은 예비 환자들의 목록이었다.
“어?”
리스트에서 아는 이름이 보였다.
한지호는 리펄스 베이에 거주하는 현지 부자들의 이름까지 다 알 정도로 홍콩 사정에 빠삭하지 못하다.
그가 이름을 알아봤다는 건 한국에서도 알려진 유명인이라는 뜻이다.
“금링링? 설마 그 영화배우?”
예약 대기 리스트에서 찾은 익숙한 이름은 금링링(金玲玲)이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인 금링링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도 잠깐씩 얼굴을 비칠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한국에서는 김해수나 이지은이 훨씬 유명하지만, 국제적으로 따지면 금링링의 인기와 비교하기 힘들다.
특히 금링링은 중국 중산층의 중년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널리 알려져있다.
대륙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그녀가 정말 진료를 받으러 오려는 것일까.
리스트에 기재 된 이름과 연락처만 봐서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동명이인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한지호는 왠지 진짜 금링링이 매니저나 회사를 시켜 예약을 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직원들이 출근하면 제일 먼저 금링링의 예약부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딩동-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나는 법이다.
홍콩 원화 한의원의 간호사와 상담 코디네이터들이 함께 출근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근처에서 만나 같이 한의원으로 온 것 같았다.
한의원에 들어선 직원들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한지호나 바이룽이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업무를 정리하는 경우가 워낙 흔했기 때문이다.
철컥!
인기척을 느낀 한지호가 원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뵙고 싶었어요, 원장님!”
간호사와 직원들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통역 직원은 출근을 안 했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해졌다.
한지호도 생활 중국어가 늘었고, 직원들 역시 홍콩 원화 한의원에 취직한 이후 꾸준히 영어를 배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들 보고 싶었습니다. 별 일 없었죠?”
“네! 뉴스에서 원장님 나오시는 것 보면서 잘 지내고 있었어요.”
“중국 뉴스에도 내가 나왔어요?”
“그럼요! CCTV에서 엄청 여러 번 원장님 뉴스를 내보냈는걸요.”
한지호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언론도 한국의 한의사가 정부 고위직을 치료한 뉴스를 소홀히 여기지 않은 모양이다.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의사들은 물론이고, 중의사들 역시 손을 놓았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한지호가 예약과 상담을 담당하는 직원을 쳐다봤다.
다행히 그녀는 간호사들보다 영어 실력이 조금 더 나은 편이다.
“예약 리스트에 금링링이라는 이름이 보였습니다. 혹시 내가 아는 그 금링링이 맞습니까?”
“네, 원장님! 저도 깜짝 놀랐어요. 금링링의 소속사 공식 메일에서 문의가 왔고, 원장님께서 홍콩에 계시는 일정을 조율해서 진료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소속사 공식 메일이라면 장난은 아니겠군요.”
“누가 금링링의 소속사 계정을 해킹하지 않는 이상은요. 메일에 담당 매니저 전화번호도 있었는데 확인 결과 맞는 것 같았어요, 원장님.”
“알겠습니다. 수고했어요.”
한지호의 안색이 밝아졌다.
간호사와 직원들도 환한 얼굴로 흩어져 각자의 업무를 준비했다.
“금링링이라, 금링링.”
한지호는 다시 원장실로 들어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중국 정치계의 거물인 추위안차오에 이어 연예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여배우 금링링을 치료하게 될지 모른다.
이들 외에도 예약 리스트에는 홍콩 현지 부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무모한 도전이라 평가 받았던 홍콩 진출이 완전히 성공 궤도에 오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