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0장, 시간을 돌려서 (1)
“미안해, 내가 오늘 맛있는 거 사주려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어.”
어딘지 익숙한 말이었다.
홍콩에서 이지은을 놔두고 칭화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한지호는 오디션에 합격해서 대형 기획사 연습생이 된 유초아를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동성 건설 회장 선운열을 통해 소개 받은 기획사 사장은 빛나는 원석을 알려줘서 고맙다며 한지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걱정할 일 없이 유초아를 잘 키우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맨땅에서 굴지의 대형 기획사를 키워낸 사장이 제법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한편,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유초아에게 다음을 기약하고 나온 한지호는 급히 엑셀을 밟았다.
두 줄의 메시지는 사무장 박우식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도 어지간히 급했는지 다른 말을 생략하고 뉴스 헤드라인만 따서 보냈다.
한지호는 운전석에 앉아 도로 위를 달리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획사 사무실 안에서는 민감한 내용으로 통화를 하기가 꺼려졌었기 때문이다.
“네, 원장님.”
“메시지 봤습니다. 사실 확인이 된 겁니까?”
“저희 네트워크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내일일보 최 기자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1시간 안으로 여러 언론사에서 속보를 띄울 것 같다고 합니다.”
“최 기자라면 믿을만한 소식통인데…….”
“벌써 30분 가까이 지났으니 사실이라면 곧 속보가 뜰 겁니다, 원장님.”
“더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까?”
“네, 최 기자님과도 통화를 했는데 중국의 취재원에게서 단순한 사실을 통보 받은 게 전부입니다.”
“결국 내가 우려했던 시나리오대로 일이 터졌군요.”
한지호이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유우선이 추위안차오의 치료에 실패했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았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치료를 하지 못한 정도라면 사건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미 여러 의사와 중의사들도 마비 증세를 호전시키지 못했었다.
하지만 유우선은 추위안차오의 마비를 악화시켰다.
그로인해 구속 수감까지 당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위천 한방병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어렵게 중국 땅에 진출한 한의학 전체가 매도당할 수도 있다.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가 한의학 부작용으로 증세가 심해진 사실이 알려지면 유대성이고 런런런이고 모두 소용이 없어진다.
마케팅 측면에서 게임이 완전히 끝나버린는 셈이다.
그냥 짐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편이 나늘 것이다.
위천과 원화는 서로 다르다고 주장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다.
더구나 공산당 차원에서 한의원을 규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철퇴는 의료사고를 저지른 위천 한방병원에게만 향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홍콩 원화 한의원도 도매급으로 취급을 받을 터였다.
“사무장님, 이번 사건. 반드시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네? 하지만 이미 터진 일을……. 추위안차오 측에서 한의사라면 치를 떨 것 같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우선 병원장의 실책을 만회하고, 추위안차오를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우리까지 책임을 덮어쓰고 중국에서 쫓겨날지 모릅니다. 한의학이 중국 땅을 파고들 기회도 영영 사라지겠죠.”
한지호의 말을 들은 박우식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이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무장님은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주세요. 난 지금 양성문 장관님께 가는 중입니다.”
“이 시간에 장관님을 뵈러 가십니까?”
“결례를 저질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다녀와서 다시 통화하죠.”
“네, 원장님.”
전화를 끊은 한지호가 더욱 세게 엑셀을 밟았다.
양성문 장관은 지금 여의도가 아닌 세종시에 있다.
정부세종청사의 보건복지부 건물에서 업무를 보는 중이라고 한다.
강남에서 세종시까지 거리는 제법 멀다.
하지만 길이 막히지 않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한지호는 도로 사이사이의 빈틈을 노려보며 핸들을 급하게 틀었다.
육중한 차체의 벤틀리 컨티넨탈 쿠페가 위압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평소에는 일반 도로에서 이렇게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마음이 너무 급했다.
입을 굳게 다물다못해 입술을 깨문 한지호는 마치 레이서가 된 것 같았다.
+++
한지호는 예상보다 일찍 세종시에 도착했다.
아마 과속 카메라에 여러 번 찍혀 꽤 많은 액수의 벌금을 내야할 것이다.
정부세종청사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에어컨을 틀어놨어도 집중해서 운전을 하느라 땀방울이 맺혔다.
공무원들의 국산차가 가득한 주차장에 새하얀 벤틀리를 세워 놓은 그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7층짜리 보건복지부 건물은 곡선으로 길게 이어진 정부세종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양성문은 5층에 있는 장관실에서 업무를 보며 한지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지호는 당당하게 건물 입구로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보건복지부 정책 자문위원인 한지호입니다. 장관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한지호의 얼굴을 확인했다.
원래라면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친 이후 출입증을 발급해준다.
하지만 국회의사당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한지호의 얼굴 자체가 신분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5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직원에게서 출입증을 받은 한지호는 금속 검색대도 가뿐히 통과했다.
바쁜 마음이 반영 되어서인지 걸음걸이가 자꾸 급해졌다.
하마터면 땅을 박차고 오금희 조공(鳥功)이라도 펼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띵동-!
그는 경공술인 조공을 펼치는 대신 남들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도착했다.
복도를 지나쳐 장관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비서들이 한지호를 맞이했다.
비서들이 외부 손님을 안내하는 공간을 지나쳐야 장관 집무실이 나온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안내 비서는 내선 전화를 통해 양성문에게 한지호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장관님께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선 전화기를 내려놓은 여자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지호는 가볍게 웃어준 후 직접 집무실 문을 열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비서가 문을 열어주겠지만, 그는 형식적인 의전에 연연하지 않았다.
“장관님.”
“한 원장!”
양성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지호를 환대했다.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굳이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얼마나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는지 한지호와 양성문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이걸 어찌한단 말인지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수습하지 못하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몰아칠 겁니다.”
“중국과 한국 사이의 외교 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어요.”
“홍콩에 진출한 한의원이 규제를 당하고, 중국 내 여론이 안 좋아질 거라고는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사안입니까?”
“추위안차오는 공산당의 고위 간부, 그것도 상무위원에 오를 유력 후보이지 않아요.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어요.”
한지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지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큰 스케일의 문제였다.
외교 분쟁의 빌미로 중국에게 약점이 잡힐 경우 국가 차원에서 얼마나 양보를 해야 할지 모른다.
한 사람의 한의사로서 한지호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장관님, 제가 바로잡겠습니다.”
“바로잡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이유야 어찌됐든 한의사가 의료사고를 일으킨 것입니다. 반드시 한의사가 치료해야 사건을 무마시키고 전화위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무슨 방도로…….”
“솔직히 저는 추위안차오가 어떤 상태였는지, 지금은 어떠한지 알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떤 명의라고 해도 치료를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한 원장.”
“무리를 해서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만 하는 일이라면 나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장관님, 제가 추위안차오를 진맥할 수 있도록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그쪽에선 이미 한의학에 대한 신뢰를 잃고도 남았겠지요. 나도 한 원장의 의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그래서 위천과 함께 추천을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려울 것 같소.”
“쉽지 않다는,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부탁이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관님, 제가 좋자고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대로 사건이 커지면 한의학 전체가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신뢰를 잃게 될 겁니다. 이제 겨우 미국의 주요 의대에서 한의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타이밍에 우리 전통 의술이 인정받을 기회를 영영 날려버릴 순 없지 않습니까?”
“허어어, 이 일을 정말 어찌해야 좋을런지.”
양성문이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로서도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중국의 부탁을 받아 위천 한방병원과 원화 한의원을 추천한 장본인이 바로 양성문이다.
추위안차오로 인해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면 양성문이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옷을 벗게 될 가능성도 있다.
불명예스럽게 장관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원장, 정말 자신이 있소? 유우선 병원장도 우리 한의학계에서 최고로 꼽혔던 한의사였는데 일을 그르치고 말았어요. 한 원장이 추위안차오를 치료해낼 자신이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매듭을 풀 수도 있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진맥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보다 명확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진맥을 했는데 도저히 손을 쓰지 못할 상태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렇다면 이후에 몰아칠 폭풍을 묵묵히 감당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못한 채 휩쓸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양성문은 말없이 한지호의 두 눈을 쳐다봤다.
그는 장관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드럽고 온화한 인물 같았다.
하지만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기운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저 평범하기만 한 사람이 장관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옛날로 치면 장관은 재상(宰相)과 비슷한 직위다.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는 과감하게 배팅을 할 줄 알아야만 높은 자리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다.
양성문에게는 지금이 승부를 걸어야 할 순간인 것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퇴임 할 수밖에 없다면, 마지막 수단을 써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결심을 굳힌 듯 양성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원장.”
“네, 장관님.”
“내가 장관 자리를 걸고 한 원장이 추위안차오를 진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지요.”
“정말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허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요, 그 다음은 모두 한 원장에게 달려 있소. 치료할 수 있다면 전화위복이 되겠지만, 진맥을 하고도 답을 찾지 못한다면… 위천이고 원화고 가릴 것 없이 중국 땅에서 물러나야 하겠지요. 외교 문제가 불거지며 한의학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 일이고 말이오.”
양성문이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는 게 느껴졌다.
한지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젊은 나이에 과분하게도 국민 한의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국민들이 보내준 기대와 성원에 보답할 차례가 온 것 같습니다. 한의사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난관을 타개하겠습니다.”
결연한 의지가 전해졌다.
사실 한지호가 잘못한 것은 조금도 없다.
추위안차오를 치료하지 못해도 중국 진출의 꿈을 접으면 그만이다.
피해는 만만치 않겠지만, 지금처럼 서울에서 독보적인 한의원으로 군림하면 된다.
그에 비하면 의료사고를 일으키고 구속 수감된 유우선 병원장과 위천 한방병원이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어쩌면 위천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릴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가 발 벗고 나서는 이유는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의학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출사표를 던진 심정이었다.
관도대전을 앞둔 조조군이나 한중 수성전을 펼친 유비군의 마음이 이러할까.
그러나 아무리 불리해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싸움도 있는 법.
한지호는 또 한 번 의술로 역사를 쓸 작정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