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67화 (167/255)

# 167

10장, 시간을 돌려서 (2)

언론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정부에서 보도 금지 요청을 검토하기 전에 잽싸게 특종을 물었다.

중국에 파견 된 특파원과 취재원이 족히 수백 명은 될 것이다.

그들이 유우선의 구속 수감 소식을 모를 리 없었다.

신문 헤드라인과 9시 뉴스가 중국에서 일어난 의료 사고로 수놓아졌다.

하필이면 중국에 진출한 한의사가 공산당 최고위 간부를 치료하려다 증상을 악화시킨 사건이다.

한지호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을 대표하던 한의사 유우선의 명예뿐 아니라 한의학계의 신망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위천 한방병원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전국 각지의 지점에 환자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있었다.

사실 의료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대학 병원에서도 끊임없이 의료 사고와 분쟁 소송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처럼 떠들썩하게 의료 사고 소식이 알려지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 나아가 세계적인 뉴스가 돼 버렸으니 무척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게다가 외교 문제가 비화 될 여지도 남아있다.

경이적인 사업 수완을 자랑하는 조준혁도 어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한 나라의 장관조차 쩔쩔매게 만든 사건이니 누가 나서도 해법이 마땅치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수많은 움직임이 전개되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막후 정치와 교섭이 한창이었다.

양성문은 외교 채널을 통해 한지호가 추위안차오를 진맥하게 만들려고 전력을 다했다.

하루, 아니 한 시간에도 몇 번씩 한국과 중국의 담당자와 직접 통화를 하며 애를 썼다.

장관 자리를 건 필사의 노력은 결국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냈다.

한지호가 베이징 모처에서 추위안차오를 진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국 당국은 유우선을 구속한 후 아직까지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만약 한지호마저도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곧바로 추가 조치가 시행 될 확률이 높다.

한지호의 어깨에 정말 많은 것이 걸렸다.

한국의 외교적 실리와 한의학의 세계적인 위상까지.

웬만한 사람은 하나도 감당해내지 못 할 짐을 자처한 한지호가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워낙 특별한 상황이기에 홍콩 환자들의 예약을 전부 뒤로 미뤘다.

어차피 추위안차오를 치료하지 못하면 홍콩 원화 한의원은 위천 한방병원과 함께 싸잡혀 퇴출당할 것이다.

지금은 오직 한 명, 추위안차오에게 집중해야 한다.

한지호는 인천에서 출발해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주어진 정보들을 정리했다.

애초부터 제대로 된 정보가 거의 오픈되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한지호도 섣불리 추위안차오의 치료에 뛰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막막한 것은 마찬가지다.

“원인 미상의 마비 증세, 현대 의학과 중의학으로는 손을 쓸 수 없었고. 그 상황에서 유우선 병원장이 치료를 했는데 악화가 됐다. 고작 이게 알 수 있는 전부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심지어 마비 증상이 찾아온 주요 부위와 증상의 정도도 듣지 못했다.

정보가 새어나가면 추위안차오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보안이 철저했다.

한지호는 원화 한의원을 이끌면서 여러 차례 모험을 했었다.

그러나 이번이 가장 위험한 도박인 것 같았다.

만약 진맥을 했는데 추위안차오의 상태가 말도 못하게 심각하다면.

화타의 의술로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면.

그렇다면 양성문이 어렵게 만들어준 기회를 날리는 셈이다.

괜히 시간을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더 큰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정신 차려. 이미 주사위를 던졌잖아. 쫄지 말자, 한지호.”

한지호는 고개를 흔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부담감이 크다고 해서 짓눌리면 아무 것도 못한다.

삼국시대의 유명한 장수들은 수십만 명의 적군 앞에서 호연지기를 뽐냈었다.

천하를 떠돌며 뭇 영웅들의 기개를 배웠던 규호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한낱 의원이 아니라 천하를 좌우하는 군주가 되라던 규호의 피맺힌 절규가 눈에 선했다.

바로 그 절규 때문에 한지호에게 군주의 피가 흐르게 된 것이다.

“가로막는 게 무엇이든 뛰어넘자. 안 되면 부숴버리고.”

그가 창밖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며 굳은 각오를 되뇌었다.

그림처럼 하늘을 수놓은 구름의 물결은 한지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흘러갈 따름이었다.

+++

베이징 공항에 내리자마자 수행원들이 따라붙었다.

비행기와 공항 게이트를 연결하는 문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출입국이 이뤄지는 게이트 내부로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굳이 공항 안쪽까지 사람을 보냈다는 것은 중국 공산당이 비밀 유지에 무척 신경을 쓴다는 뜻이다.

한지호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수행원들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최고급 외제차 뒷좌석에 앉았지만 편하지 않았다.

칭화 그룹에서 한지호를 안내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수행원들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마치 죄인이 되어 비밀리에 이송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이들은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한지호가 탄 뒷좌석 유리는 안에서 밖을 볼 수 없도록 까맣게 특수 처리가 돼 있었다.

물론 이해는 할 수 있다.

추위안차오는 중국 정계의 거물이고, 그의 신변 정보는 특급 기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지호는 치료를 하러 온 사람이다.

진맥을 한 다음에야 치료가 가능할지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건을 해결하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첫 대접이 바깥이 보이지 않은 새까만 창문이다.

누구라도 기분이 나빠지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참자, 참아. 여기서 괜히 힘 빼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

한지호는 목 끝까지 차오른 짜증을 억누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중국 정부가 보낸 수행원들을 단번에 쓰러트리고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그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밝히고 이동할 것을 요구해도 된다.

그러나 모두 불필요한 다툼이다.

추위안차오를 보기 전에 신경전으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비 증세를 치료할 수 있다면 중국 정부에 무엇이든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력이 아니라 능력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삼국시대가 아닌 현대의 방식이다.

“후우-.”

한지호는 한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는 사이 차는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부웅- 부우웅-

묵직한 엔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한지호를 태운 차는 멈추지 않았다.

수행원들은 불편하지도 않은지 각자의 자리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어쩌면 거리 계산을 못하도록 일부러 길을 빙빙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추위안차오의 요양지를 알아봤자 쓸데도 없는데 참 유난을 떠는군.’

한지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을 삼켰다.

공항에서 나와 차에 탄 것도 벌써 두 시간 전의 일이다.

베이징의 교통 체증이 심하다 해도 이 정도면 어디든 도착해야 마땅한 시간이었다.

끼이이익!

그때였다.

마치 한지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운전수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멈추자 수행원들이 별다른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내렸다.

한지호도 그들을 따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여긴……?”

그는 눈에 들어온 풍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서 차를 탔고, 두 시간 남짓이 흘렀을 뿐이다.

그런데 근처에 빌딩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경치 좋은 들판 가운데 중세 유럽풍으로 지어진 별장이 하나 서있을 다름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추위안차오가 요양을 하는 모양이다.

대체 무슨 수로 두 시간 만에 이런 교외까지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수행원들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수행원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지호는 그에게 간단한 요구를 전달했다.

“트렁크에 실어둔 캐리어가 필요합니다. 그 안에 간단한 진료 도구가 들어있습니다.”

“저희가 들고 가겠습니다.”

이어서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한지호의 캐리어를 들었다.

한지호는 수행원 리더와 함께 별장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

별장의 내부 구조나 인테리어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예민하게 날이 선 감각이 오직 한 사람만 의식하고 있었다.

수행원은 별장에서 가장 큰 방문을 열었고, 넓은 침대에 누군가 누워있는 게 보였다.

그의 곁에는 시중을 드는 간병인과 홍콩에서 만났던 추따이언이 서있었다.

자신이 역할을 마친 수행원은 침대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한지호를 본 추따이언이 간병인도 마저 내보냈다.

이제 방 안에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추위안차오와 그의 동생 추따이언, 그리고 한지호만 남았다.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추따이언이 무뚝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지호는 살짝 목례를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제가 도움이 될 것 같아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이제…… 한의사들을 믿을 수 없소.”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시크하게 대답한 한지호가 추따이언 옆에 서서 침대를 내려다봤다.

추위안차오.

크고 둥글둥글한 이목구비가 복스럽게 보이는 중년 남자가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오히려 그가 동생인 추따이언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마비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잠든 모습만 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추따이언이 두 손으로 추위안차오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따거, 따거.”

중국어로 친형을 깨우는 모습이 짠해 보였다.

첫인상이 매우 안 좋았지만, 지금 보니 추따이언도 나름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그가 몇 번을 흔들자 추위안차오가 눈을 떴다.

“……!”

한지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난 추위안차오의 증상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드득! 우드득!

계속 쳐다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추위안차오는 거의 1초에 한 번씩 얼굴 반쪽과 왼쪽 눈을 일그러트렸다.

뿐만 아니라 어깨와 목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주기적으로 부르르 떨었다.

신경정신과질환에 속하는 틱 장애(tic disorder) 환자와 비슷해 보였다.

“이, 이 사람이?”

잠에서 막 깬 추위안차오가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안면 근육이 일그러졌다.

그래서인지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추따이언은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신 같이 캐치해서 대답을 했다.

“치료를 하러 온 의사입니다. 아주 유명하다고 하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형님!”

억지로 희망적인 말을 전한 추따이언이 한지호를 돌아봤다.

그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추위안차오의 증세를 설명했다.

“몇 달 전부터 형님께 갑자기 안면 마비 증상이 찾아왔소. 갖은 수를 써봤지만 알다시피 모두 소용이 없었소. 체면을 중시하는 공산당 내부에서 얼굴조차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환자가 중책을 맡을 순 없는 일, 이 상태가 알려지면 상무위원은 고사하고 중앙조직부장 자리마저 내어 놓아야 하오.”

“유우선 병원장은 어쩌다 증상을 악화시킨 겁니까?”

“나도 모르겠소. 침을 놓고 약을 썼는데 멀쩡하던 목과 어깨로 증상이 번졌소. 그 노인네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추따이언이 주먹을 쥐며 분노를 드러냈다.

한지호는 그의 분노에 동조하지 않고 추위안차오를 바라봤다.

얼핏 간단해보이지만 안면 절반이 마비됐고, 경미한 발작 증세까지 동반 됐다.

단지 특정 부위를 못 움직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목과 어깨를 떠는 것은 발작이라 봐야 한다.

유우선의 의료 사고로 증상이 목 아래로 퍼졌다면, 앞으로도 마비와 발작 부위가 늘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현대의학과 중의학으로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한 때 한국 최고의 한의사라 불렸던 유우선을 감옥에 들어가게 만든 증상이다.

과연 한지호는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이겨내고 추위안차오를 치료할 수 있을까.

“진맥을 시작하겠습니다.”

한지호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손을 뻗었다.

여전히 추위안차오는 얼굴과 목, 어깨를 기괴하게 움직이며 보는 이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한지호는 장판파에서 혼자 조조의 대군을 막아 세웠던 장비의 심정으로 진맥을 시작했다.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고독한 전투의 서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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