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9장, 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2)
사건은 한지호가 원한 대로 마무리 되는 모양새였다.
김해준 교수는 기대 이상으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해당 학생들에게 정학 처분을 내렸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D대 연극영화과 내부의 얼차려 문화를 뿌리 뽑으려 노력했다.
물론 유초아가 내부고발자로 찍혀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도 빼놓지 않았다.
유초아 외에도 선배들로부터 기합과 폭행을 당한 신입생들이 더 있었다.
그렇기에 유초아가 아닌 다른 신입생들이 익명의 고발을 한 것처럼 포장을 했다.
그러나 학내 연극에 출연했던 학생들은 한지호가 김해준 교수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악한 대학생들이 한지호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란 사실을 추측하지 못할 리 없었다.
대놓고 유초아에게 뭐라 하지는 못해도 그녀를 얄밉게 보는 선배들이 늘어났을 것이다.
한지호도 그 점을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형 기획사 사장과 미팅 날짜를 잡았다.
유초아가 재능이 있다면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녀의 꿈을 위해 크고 튼튼한 울타리를 쳐주기로 작정했기에 자잘한 트러블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홍콩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이 위천 한방병원을 밀어주고, 대신 원화 한의원에게 각종 규제를 가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한국 한의학계 관계자들 사이에 벌써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 같았다.
진위 여부를 떠나 홍콩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원화 한의원에게 악재다.
나쁜 구설수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 원화 한의원은 기반이 워낙 탄탄하기에 웬만한 루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러나 홍콩은 사정이 다르다.
유대성과 런런런 멤버들 덕분에 이제 막 알려지며 새로운 환자들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서울처럼 원화 한의원이라면 무조건 신뢰하는 팬들을 많이 만들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나 구설수, 루머가 돌기 시작하면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다.
한지호는 왜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지 금방 알아냈다.
중국 정계의 거물인 추위안차오가 위천 한방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추위안차오의 동생인 추따이언은 한지호에게 악감정을 품었다.
그가 시찰을 나왔을 때, 한지호는 원칙을 지키며 소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매번 굽신거리기 바쁜 사람들만 만나서인지 추따이언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었다.
분명 그 영향일 것이다.
유우선 병원장이 추위안차오를 치료해내면 위천 한방병원은 홍콩을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날개를 달게 된다.
처음에는 한지호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홍콩 진출을 시도했지만, 추위안차오라는 거물의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 거대한 중국 의료 시장의 문이 활짝 열릴 게 뻔했다.
반면 홍콩 원화 한의원은 위기에 처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 간부의 눈 밖에 나고도 온전히 영업을 하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칭화 그룹 덕택에 각종 규제와 법망을 수월하게 통과했지만, 추위안차오나 추따이언이 위천을 도와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서면 꽤 귀찮아질 터였다.
중국이란 나라는 아직까지 후진적인 정치 체계가 남아있어 힘 있는 사람의 마음대로 법과 규제가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원장님, 소문일 뿐이지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사무장 박우식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늘 신중한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만만히 생각하고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울 원화 한의원을 든든히 지켜주는 문재영 부원장도 수심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저도 얼마 전 동기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한지호가 문재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문재영은 사적으로 K대 한의학과 출신의 선배다.
그의 동기들은 한창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한의사들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정부의 거물이 위천 한방병원 홍콩지점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는 소문은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위천과 원화 중에서 양자택일을 했고, 결과가 좋으면 원화 한의원은 더 이상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운영을 하기 힘들 거라고들…….”
서울 경기 지역의 일선 한의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돌고 있다.
그것도 비교적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서 사람들이 신뢰하기 쉽다.
한지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가 말을 꺼내지 않자 박우식과 문재영도 가만히 앉아있었다.
시간이 몇 분쯤 흘렀을까.
한지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루머에 불과하지만, 또 마냥 루머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군요.”
“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유우선 병원장이 홍콩에서 추위안차오를 치료한다면, 지금 떠도는 소문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한국에서도 대통령 한 마디에 세상이 바뀌는데, 중국이라면 더한 일도 일어날 수 있죠. 게다가 우리는 자국민도 아니고.”
“으흠…….”
박우식이 신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심각한 얼굴이었는데 한지호의 말을 듣고 더더욱 안색이 나빠졌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의 치료가 실패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으로선 딱히 소문에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네요. 다만 칭화 그룹에 미리 이야기를 해서 혹시라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도록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네, 원장님. 그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한지호가 내놓은 방안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는 염려하고 있는 문재영 부원장에게도 특별히 당부를 했다.
“부원장님의 역할이 더 막중해졌습니다. 당분간 내가 홍콩에 신경 쓸 일이 많아질 거고, 그만큼 부원장님이 이곳을 잘 지켜줘야 합니다. 환자들의 불만이나 요구는 바로바로 내게 알려줘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원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저 혼자로는 역부족입니다.”
“지금처럼 정해진 진료는 내가 하겠죠. 하지만 한의원의 전반적인 운영은 박 사무장님과 의논해서 더 챙기도록 해요. 간호사 팀, 코디네이터 팀과도 자주 이야기하며 커뮤니케이션을 열어 두고.”
“명심하겠습니다!”
문재영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지호는 그에게 직원이 아닌 원장처럼 일을 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어차피 진짜 중요한 환자들은 한지호가 직접 진료를 한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VIP 환자들은 한지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예약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의원 운영을 챙기고, 부쩍 인원이 늘어난 직원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것은 문재영도 할 수 있다.
박우식은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일도 맡고 있기 때문에 문재영이 서울 원화 한의원의 중간 관리자 역할을 더 잘 해줘야 한다.
한지호는 이제야 살짝 웃으며 비밀스런 말을 꺼냈다.
불안해하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실 유우선 병원장의 의술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수면 아래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기운이도 위천 한방병원 관계자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고, 플래티넘 홀딩스의 이재박 부사장님도 이전보다 줄어든 약효 때문에 저에게 찾아왔었죠.”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네, 불과 얼마 전입니다.”
Y대 황금 라인의 멤버인 동성 건설 선운열 회장이 이재박을 소개해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꽤 오랜 기간 유우선에게 보약을 지어먹었던 이재박이 자기 입으로 직접 약효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병원장이 직접 관리하는 상위 1% 환자가 한지호를 찾아올 정도다.
조기운이 알아낸 정보, 즉 유우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의 신빙성을 높게 쳐줄 수밖에 없었다.
“추위안차오의 증세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만, 원인 미상의 마비라면 고치기 쉬운 질병은 아닐 겁니다. 의사와 중의사들이 포기했다고 하니 더욱 그렇겠죠. 귀추를 주목해봅시다.”
치료를 맡았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를 기원할 수는 없지만, 소문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유우선이 추위안차오를 완치시켜야 한다.
한지호는 여러 근거를 토대로 그게 쉽지 않을 거라 전망하고 있었다.
과연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기분나쁜 소문이 지속되어 홍콩 원화 한의원의 입지가 흔들릴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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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났다.
한지호는 요즘처럼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 적이 또 없다고 생각했다.
20대를 넘어 30대에 진입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흘은 서울, 사흘은 홍콩에 머물며 두 곳의 한의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기 때문이다.
매주 두 도시를 오가며 사는 삶에 약간 적응이 됐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했다.
그나마 서울과 홍콩이라는 국제적인 도시의 거리가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루에 몇 번씩 비행기를 타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국제 기업 CEO와 임원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괜히 천문학적인 액수의 연봉을 받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지난 일주일 사이 한지호는 홍콩에서 한 번 더 진료를 하고 돌아왔다.
유대성과 런런런 효과로 홍콩 원화 한의원은 계속 예약 환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한 번 진료를 받거나 약을 지은 사람들이 입소문을 퍼트렸다.
리펄스 베이에 거주하는 현지 부자들 사이에서 원화 한의원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중이다.
이대로 가면 전망은 밝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관광객들을 노리지 않고, 처음은 힘들더라도 현지 부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승부를 본 전략이 맞아 떨어져갔다.
착실하게 이름을 알리며 신뢰를 쌓아가는 게 우선이다.
그 다음에는 유대성 같은 한류 스타는 아니더라도 한 번에 몇 천만 원 이상을 지불할 수 있는 홍콩의 거부나 유명인사를 치료하면 딱 좋다.
한지호는 외부의 방해만 받지 않으면 홍콩에서도 계속 승승장구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외부의 방해가 마음에 걸렸다.
자세한 소식을 알 수 없지만, 추위안차오의 치료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궁금했다.
듣기로는 병원장 유우선이 한국에 오지 않고 홍콩에 체류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추위안차오를 치료하는데 전력을 쏟는다는 뜻이다.
“지호 오빠, 저 잘할 수 있을까요?”
그때 유초아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한지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마주보며 대답했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만 해. 학교에서 연극할 때 했던 것처럼만.”
“네……. 그럼 열심히 하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유초아가 소파에서 일어나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방 안에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형 기획사의 사장과 캐스팅 실장이 기다리고 있다.
보통 신인 발굴 오디션에 사장과 실장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한지호가 인맥을 이용해 부탁을 했기에 수뇌급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한지호의 인적 네트워크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규열, 양성문, 선운열 등 Y대 황금라인을 비롯해 평창동의 황만금, 연예계와 방송가의 지인들까지.
그야말로 전화 한 통이면 누구든 연결이 가능한 레벨이다.
한지호는 기획사 사장에게 공정한 오디션을 부탁했다.
유초아가 가능성이 있으면 선발해서 관리를 해달라는 것뿐, 무조건 뽑아 주는 건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대신 유초아를 발탁한다면 연예계의 더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게 든든한 우산이 되어 달라는 부탁도 했다.
한지호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뒤에 버티고 있는 이상, 유초아는 본인의 매력과 실력만으로 연예계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잘 하겠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한지호는 유초아가 오디션을 보러 들어간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캐스팅 전문가는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연예인과 톱스타들을 치료하며 가까이서 지켜봤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유초아의 외모는 다른 여배우들에 비해 전혀 꿀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연극에서 보여줬던 연기력이라면 충분히 다듬을 가치가 있는 원석이라고 판단했다.
삐빅-
주머니 속에서 울린 알림음이 한지호의 생각을 빼앗아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트 폰을 꺼냈다.
중요한 메시지가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일상적인 연락이나 안부, 혹은 광고 메시지일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진동으로 바꿔야겠……!”
심드렁하게 메시지를 확인한 한지호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입이 딱 벌어진 상태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짧은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한지호의 스마트 폰 액정에는 단 두 줄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추위안차오, 부작용으로 마비 증세 악화.
위천 한방병원 유우선, 의료사고로 홍콩 공안 당국에 구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