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9장, 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1)
연극이 무사히 끝났다.
유초아의 연기는 합격점이었다.
한지호가 그녀를 아끼기 때문에 좋게 봐준 것이 아니었다.
객석에 앉은 다른 사람들도 여주인공이 누구냐면서 대부분 후한 평을 내렸다.
조명을 받아 더욱 빛나는 외모, 그리고 완벽하진 않지만 무리 없이 이어진 감정선과 발음.
유초아는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여주인공 역할을 따낸 이유를 몸소 증명했다.
하지만 한지호는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배우들이 모두 나와 무대 인사를 할 때도 박수를 치면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창백한 유초아의 안색, 그리고 목과 손목, 팔의 상처와 멍 자국이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짝짝짝짝짝-!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작은 무대를 뒤덮었다.
인사를 마친 배우들은 다시 뒤로 돌아갔다.
한지호는 의자에서 일어나 공연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당장 유초아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은 그렇다 치고, 몸 여기저기의 상처는 무엇이냐고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저벅저벅.
공연장 뒤편, 대기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한지호가 자신도 모르게 발에 힘을 실었기 때문이다.
오금히의 내공이 달린 걸음 소리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복도를 울리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멈춰 서서 한지호를 돌아볼 정도였다.
단지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지호의 몸 전체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뿜어내기 힘든 기파가 넘실거렸다.
삼국지 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장수들이나 풍길 수 있는 아우라다.
현대의 일반인들은 그의 주위를 피하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여긴가?”
한지호는 금방 대기실 앞에 다다랐다.
출연자 대기실이라 쓰인 문 앞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오프닝 공연이 아니어서인지 그를 제외하면 출연 배우들을 만나러 대기실 앞까지 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우-.”
그는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너무 흥분한 상태로 안에 들어가면 괜히 사고를 칠 수도 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다.
유초아의 연극 데뷔를 축하해주고, 조심스레 상처에 대해 물은 다음 행동해도 늦지 않다.
똑똑-
예의상 노크를 한 그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대기실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고, 별도의 독립 된 공간과 분장실이 따로 있었다.
연극에 출연한 배우이자 D대 연영과 학생들은 분장을 한 채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그러다 한지호가 문을 열자 일제히 시선이 집중됐다.
“저기, 여기는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어? 그런데 혹시 TV에 나오는 한의사 한지호?”
학생들 중 한 명이 한지호를 알아봤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초아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때 바로 보이지 않던 연극영화과 담당 교수가 인사를 하며 아는 척을 해왔다.
“한지호 원장님? 이거 영광입니다. 저는 연영과 아이들 가르치는 김해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교수님. 오늘 연극에 출연한 유초아 학생을 만나러 왔는데 볼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그럼요. 분장실 안쪽에 있을 겁니다. 신입생이라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서 감정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지호는 김해준 교수가 가리킨 분장실로 걸어갔다.
방금 전까지 왁자지껄 떠들던 연영과 학생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들도 한지호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잊을만 하면 뉴스를 장식하고, 얼마 전에는 국민 MC 유대성을 치료하며 다시 한 번 화제의 중심이 됐으니 모를 리 없었다.
교수를 비롯해 학생들도 어리둥절할 것이다.
유초아가 어떻게 한지호와 아는 사이인지 전혀 몰랐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빛들을 신경 쓰지 않고 분장실로 들어갔다.
철컥-!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소리가 울렸다.
분장실 구석 거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초아가 고개를 돌렸다.
“지호 오빠?”
그녀의 눈이 커졌다.
동그란 눈가에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한지호는 가져온 꽃다발을 내밀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축하해, 여주인공. 연극 잘 봤다.”
“오늘 왔었어요?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말하면 괜히 신경 쓸까봐. 잘하더라. 깜짝 놀랐어.”
“그랬어요? 오빠한테 칭찬 들어서 다행이에요.”
유초아가 얼른 손으로 눈가를 닦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오늘따라 어두워 보였다.
한지호는 유초아 앞에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눈을 맞춘 한지호가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초아야. 너 나한테 거짓말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럼요. 내가 오빠한테 어떻게 거짓말을 해요.”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목에 긁힌 상처, 그리고 손목과 팔에 있는 멍자국. 어쩌다 생긴 거야?”
“네? 오빠, 상처라니…….”
“여기 있잖아. 여기와 여기에도.”
한지호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목과 손목, 팔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유초아가 움찔거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흔적들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관객석에 앉아 있을 때부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줘. 괜찮으니까.”
거듭된 한지호의 말에 유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짧지만 깊은 침묵이 멎고,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무거운 고뇌가 담긴 한숨이었다.
“지호 오빠,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요.”
“욕심?”
“교수님께서 여주인공 역을 주셨어도 거절했어야 됐는데… 너무 신나서 기쁘게 수락해버린 거 있죠. 3학년, 4학년이 되어도 학내 연극에서 여주인공을 못 해본 선배님들도 많은데. 제가 경솔했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건. 그래서? 선배들이 널 때린 거지? 신입생이 여주인공을 맡았다는 이유로?”
“아니에요, 오빠! 때린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기합을 받다가 미끄러지고, 넘어져서 그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한지호는 유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을 시켰다.
여자 선배들의 질투와 시기를 한몸에 받으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러면서도 연극 준비를 하며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선했다.
“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앞으로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이것도 학교생활의 일부니까요, 오빠한테까지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학교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못난 것들의 질투지. 나만 믿고 편하게 있어. 분장 잘 지우고, 같이 밥 먹자.”
“네, 오빠.”
“천천히 나와. 밖에 있을게.”
한지호는 유초아를 다독이고 분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다른 학생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김해준 교수를 찾았다.
“교수님, 잠시 저와 이야기 좀 하시죠.”
“네? 아, 네!”
김해준 교수는 영문을 모르고 한지호를 따라 나왔다.
대기실 안에는 연극에 출연한 학생들이 많으니 바깥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한적한 복도 구석에 마주보고 섰다.
연영과 교수답게 빵모자를 쓴 김해준은 군데군데 흰머리가 보였지만, 부드러운 인상이 중년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해 보였다.
실제로도 왕년에는 잘 나갔던 탤런트 출신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지호의 유명세와 인기가 훨씬 높다.
그가 다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D대 연영과 전체를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습니다.”
“네? 아니, 한 선생님. 갑자기…….”
“초아가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다는 이유로 얼차려와 가혹 행위를 당했습니다. 몸에 상처도 남아 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초아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학내 연극을 담당하는 교수님께서 학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도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을 먹으면 D대 총장님을 뵙고 학과 전체를 흔들 수도 있습니다.”
한지호는 허풍을 떠는 게 아니었다.
그가 가진 지명도와 인맥을 바탕으로 한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평소에는 과시하거나 내세울 일이 없을 따름이다.
하지만 작정하고 덤비면 D대 연극영화과 정도는 한 손에 넣고 좌우할 수 있다.
교수와 학생들에게 줄줄이 징계를 선물할 수도 있고, 유초아를 괴롭힌 선배들을 골라내서 직접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른의 방법으로 일을 풀기 위해 화를 억누르고 김해준 교수와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첫인상에 불과하지만 김해준 교수는 적어도 말이 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지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길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저, 정말 몰랐습니다. 우리 과 특성상 선후배 사이의 기강이 엄격한 편이긴 하지만, 그런 80년대식 기합과 얼차려로 초아가 다쳤을 줄은 정말로…….”
“교수님께서 책임지고 일을 마무리 해주시면 한 번은 더 지켜보겠습니다.”
“어떻게 책임을 지면 좋겠습니까?”
“직접 가해를 한 선배 학생들을 찾아내 정학 처분 이상의 징계를 내리고,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써주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부 고발을 했다는 이유로 초아가 학교생활이 어려워지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 불찰이기도 하니… 교수 직함을 걸고 확실하게 일을 매듭짓겠습니다.”
“초아의 재능을 확인했으니 대형 기획사에 소개해줄 생각입니다. 그럼 학교에 나올 일도 많지 않겠죠. 그래도 끝까지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김해준 교수님.”
“학과의 명예를 걸고 납득할 수 있는 징계와 재발 방지를 하겠습니다.”
김해준은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 역시 연영과 내부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져서 놀란 모양이었다.
학내 연극 담당 교수인 자신이 직접 유초아를 여주인공으로 발탁했다.
그로인해 그녀가 선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으니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들의 징계와 재발 방지를 약속 받은 한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그의 눈과 몸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뿜어지고 있었다.
한지호는 김해준에게 말한 것처럼 유초아를 대형 기획사에 소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 길로 나갈 거라면 지금부터 커다란 울타리에서 확실한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 김해준이 우물쭈물 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유초아 학생과는 무슨 사이이신지 여쭤 봐도 될런지요?”
“내 여자! 그러니까…… 내 여자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아이입니다.”
화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태라 욱 하고 말이 튀어나왔다.
흥분을 해서인지 말실수를 할 뻔한 한지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을 끝맺었다.
그는 이어서 김해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지막까지 신신당부를 했다.
“교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면, 초아를 괴롭힌 선배들을 찾아내서 제가 직접 세상이 무섭다는 걸 알려줄 겁니다.”
김해준은 한지호의 말을 뼛속 깊이 새긴 표정이었다.
원래 대학 교수는 콧대 높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직업이다.
게다가 김해준의 나이와 경력은 어디에서도 뒤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지호가 가진 이름값, 무엇보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존재감 앞에 기를 펴지 못했다.
중국 공산당의 실세인 추위안차오를 치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서울에서 유초아가 괴롭힘 당한 것을 목도했다.
여러모로 불편한 심기가 엉켜서 내공이 거칠게 날뛰는 상황이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좋은 자리에서 정중히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교수님.”
한지호는 김해준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멋진 연기를 보여준 유초아에게 최고의 저녁을 선물해줄 것이다.
그는 터지기 직전까지 차오른 분노를 달래며 대기실로 걸어갔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상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주기가 불규칙해 죄송합니다.
매일 연재를 약속드리긴 힘들지만, 적어도 주 4회 연재는 꼭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잊지 않고 강남화타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계속 재미있는 이야기를 창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묘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