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4장, 격동의 시기 (2)
개원 첫날 오후부터 드문드문 환자들이 찾아오긴 했다.
한지호는 그동안 TV를 통해 꾸준히 얼굴을 알렸고, 한국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한류팬들 사이에서 약간의 인지도를 얻었다.
한류 스타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예 무명은 아닌 것이다.
집요하기로 따지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한류팬들은 그가 홍콩에 한의원을 연다는 소식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칭화 그룹에서도 몇몇 사람들에게 원화 한의원을 소개해줬다.
무엇보다 부원장으로 들어온 바이룽의 존재가 컸다.
그는 홍콩 전역에서 가장 촉망받던 중의사였다.
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의 중의학과장이 새로 문을 연 한의원의 부원장이 됐다는 소문은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그 이유를 묻기 위해, 또는 무엇이 바이룽을 움직였는지 알기 위해 원화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홍콩 원화 한의원은 서울 원화 한의원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운영 된다.
당장은 100% 예약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대신 소개를 받고 찾아온 VIP들은 따로 스케줄 관리를 해서 한지호에게 직접 진료를 받도록 안내했다.
그 외에 오며가며 한의원을 들린 환자들은 순서대로 진료를 해준다.
한지호는 일주일에 이틀만 홍콩에 머물기 때문에 그런 환자 대부분은 바이룽의 몫이었다.
바이룽은 중의학과장이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새로운 방식으로 환자들을 대했다.
한지호에게 하나씩 배운 한의학의 원리를 도입해서 의술을 펼쳐 나갔고, 환자 한 명 한 명을 가장 중요한 VIP처럼 여겼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잡으려면 시일이 꽤 걸릴 것 같았다.
리펄스 베이에 사는 홍콩의 부자들은 새로 문을 연 한의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미 오래 인연을 맺는 주치의가 따로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병원, 그것도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의원에 찾아가 모험을 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예상했던 만큼 힘든 상황이다.
내심 시작부터 잘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칭화 그룹에서 임대료를 내주기에 당장 이익을 내는 게 절박하지는 않다.
하지만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지호는 매주 서울과 홍콩을 오가는 비행기를 타며 뾰족한 수를 찾으려 고민했다.
도전은 장밋빛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때로는 피땀을 흘려도 나쁜 결과가 나온다.
그리되면 도전에 찬사를 보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등을 돌리고 무모했다며 비난을 쏟아 부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속성을 알기에 한지호의 고민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위천이라는 성벽을 무너트리기 위해 중국에서의 성공을 공성 병기로 삼겠다는 그의 계획은 출발점에서부터 난관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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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두 번! 꼭 식전에 먹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식후 아니고 식전!”
“네네, 꼭 밥 먹기 전에 챙겨서 먹을게요.”
“그래, 그래. 한 달만 꾸준히 먹으면 많이 좋아질 거요.”
최치우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약 상자를 받아든 중년 부인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늘만 벌써 7번 째 고객이었다.
역삼 M 타워 3층, 새로 오픈한 명징 약초와 원화 한약방에서 약을 사는 고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홍콩 진출과 맞물린 시기에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한지호는 빛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워낙 입지가 탄탄하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또 하나, 예약을 하고 오래 기다려 진료를 받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곳에서 한약을 사기 원하는 수요가 기대 이상으로 많았다.
국민 한의사 한지호가 이름을 내걸고 운영하는 곳이라면 약재나 한약, 건강 식품이 다른 곳보다 우수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지호가 <건강백서, 진짜! 가짜!>에서 꾸준히 가짜 한약품을 고발 했던 것도 도움이 됐다.
원화 한의원의 브랜드 파워, 한지호의 유명세와 이미지, 그리고 명징 약초의 깨끗한 약재와 최치우의 노하우까지.
이 모든 게 결합 됐으니 성공하지 못하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홍콩에서는 아직 고전하고 있지만, 한국 한의학계에서 한지호는 마이더스의 손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벅저벅.
다시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최치우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판매한 한약 매출을 장부에 기록하고 있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한 원장!”
한지호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 2층에서 올라왔기 때문이다.
“오늘도 고생 많으십니다, 최 사장님.”
그는 예전과 변함없는 호칭으로 최치우를 불렀다.
명징 약초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이 됐다.
또한 원화 한약방과 함께 운영되며 계열사 같은 느낌으로 변했다.
그러나 최치우는 다른 한의원 원장들과 마찬가지로 네트워크 내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졌다.
그만큼 한지호가 최치우를 우대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고생은 무슨. 우리 한 원장 덕분에 활기가 돌아서 아주 좋다네!”
“오늘도 손님들이 많이 있었나보군요.”
“그럼! 경동시장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손님들이 찾고 있지. 그러니까 나도 좋은 약초를 구해서 열심히 영업하는 맛이 나고 말이야.”
“다행입니다. 기운이 넘쳐 보이시니 좋습니다.”
“커허허허, 기운이 넘칠 수밖에! 약초꾼의 행복이 뭔가? 좋은 약초를 구해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에게 넘기는 것 아니겠나. 이제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한의원들, 그리고 한 원장을 믿고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에게 신선한 놈들을 마음껏 건넬 수 있게 됐으니 힘이 펄펄 나는 게 당연하지.”
걸걸한 최치우의 목소리가 한지호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명징 약초와 원화 한약방은 초기부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자리를 잡았다.
한약방 프랜차이즈를 준비하던 위천 한방병원을 주춤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한지호가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프리미엄 한약방이 강남과 서울의 대세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신뢰도가 낮은 전국의 동네 한약방과 프랜차이즈 사업을 도모하면 역풍을 맞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게 선수를 빼앗겼기 때문에 화제성이나 사업성 측면에서 재고를 해봐야 한다.
홍콩까지 따라와 발목을 잡는 조준혁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한 셈이다.
“그런데 진료 시간 아닌가?”
“다음 환자까지 잠깐 텀이 있어서요. 약초 냄새 맡으며 머리나 식힐까 해서 올라왔습니다.”
“잘 왔네, 잘 왔어.”
최치우가 바쁘게 움직여 뜨거운 한방차를 내려줬다.
그가 직접 만든 한방차는 경동시장 시절부터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
한지호는 은은한 향이 감도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코끝으로 전해지는 약재의 청아한 기운이 머리를 맑게 해주는 기분이었다.
“좋네요. 보약도 보약이지만, 한방차와 건강식품이 많이 팔리는 건 전부 최 사장님 덕입니다.”
“내 덕은 무슨, 한 원장 이름값이 팔할이네. 그나저나 눈이 살짝 충혈된 게 피곤해 보이는구만.”
“며칠 잠을 좀 못자서요.”
한지호는 매일 아침을 운기조식으로 시작한다.
오금희의 내공이 온몸을 휘감고 나면 웬만한 피로는 싹 사라진다.
그럼에도 눈동자가 빨갛게 될 정도라면 어지간히 무리를 했다는 뜻이다.
최치우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도 한지호의 눈이 충혈 된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시기라는 건 잘 알고 있네만, 몸도 좀 생각하게. 의사가 병이라도 나면 참 큰일 아닌가.”
“맞습니다. 아픈 한의사에게 누가 자기 병을 믿고 맡기겠어요. 컨디션 관리 잘 해야죠.”
“홍콩에서는…… 많이 어려운 겐가?”
“예상했던 만큼입니다. 처음부터 쉽게 풀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위천이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면 지금보단 나았을 것 같네만, 쯧쯧.”
“관심이 분산되긴 했어도 그쪽은 센트럴이고 우린 리펄스 베이입니다. 위천 탓만을 할 수는 없죠.”
“뉴스를 보니 병원장인 유우선인가 하는 양반이 홍콩에 오래 머무른다고 하더구만. 시작부터 이후의 행보까지 철저하게 자네를 따라서 견제하는 게 아닌가.”
“그런 어려움도 이겨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지호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이 좋지는 않았다.
조준혁은 유우선이라는 카드까지 동원했다.
그의 최근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었지만, 어쨌든 나이와 경력 측면에서 유우선은 위천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물이다.
“어쩌면 위천의 강점이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무리하게 중국 진출을 시도한 것, 그리고 유우선 병원장을 투입한 것 등. 조준혁 이사장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카드가 비수가 되어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커흐음…….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모양이구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결정적인 타이밍을 기다려 봐야죠.”
“그래, 그래. 한 원장이라면 잘 해낼 거야. 건강만 신경 쓰고……. 아, 참. 노파심이지만 이 말 한 마디는 꼭 해주고 싶구만.”
최치우의 낯빛이 변했다.
진지하게 해줄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겠다는 뜻을 내비췄다.
“한 원장, 자네가 한국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아서 지금 위치에 올랐는지 잊지 말게.”
“한국에서 자리를 잡은 방법…….”
“거물을 치료하면서 자네도 순식간에 거물이 되지 않았던가. 대어를 낚아야 판도가 변하는 걸세. 잔챙이를 아무리 낚는다고 해서 강태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네. 약초꾼도 마찬가지야. 백년 산삼 하나를 캐면 단박에 팔도제일의 심마니로 불리지만 고만고만한 놈들 수십 개를 캐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
최치우의 조언이 깨달음을 줬다.
사실 그렇게 새로울 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지호는 가만히 서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평창동의 황만금 회장과 영화배우 김해수의 난치병을 치료하며 이름을 알린 게 신화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도 굵직한 의료 사건의 중심에 서있었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유명인들이 급할 때 찾는 한의사로 알려지며 인기를 얻었다.
이지은과 그 또래 여자 연예인들이 만든 야소녀 모임의 주치의로 알려진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반등의 계기였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물들과 엮여야 한다.
최치우의 말이 정확하게 맞다.
대어를 낚지 못하면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주목을 받을 수 없다.
“홍콩의 대어…….”
한지호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듯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을 읊조렸다.
최치우는 그런 한지호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다른 고객들이 3층에 내려섰다.
한약방을 찾아온 손님들이었다.
“이만 내려가 볼게요. 차, 잘 마셨습니다.”
“고생하게나.”
한지호와 최치우는 따뜻한 눈빛을 나누며 인사를 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내려온 한지호는 원장실 의자에 앉아 생각을 이어갔다.
홍콩에서 대어를 낚아야 한다.
그게 지지부진한 판도를 한 번에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갑자기 홍콩의 유명인을 찾아가 숨겨둔 병이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진 인맥을 잘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칭화 그룹의 인맥, 그리고 한국에서 맺었던 인연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때가 왔다.
여러 가능성을 계산하기 시작한 한지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반등의 기회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한지호는 자신이 국내용 마이더스의 손이 아닌, 세계 어디서도 통하는 카드라는 걸 증명해보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