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55화 (155/255)

# 155

5장, 한류스타 (1)

“지난주는 좀 어땠어요?”

한지호가 능숙한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그의 맞은편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바이룽이 앉아 있었다.

바이룽이 입은 가운 가슴 주머니에 선명하게 새겨진 원화(元化)라는 글자가 새삼스러웠다.

홍콩 원화 한의원의 부원장이 된 바이룽은 보고를 시작했다.

한지호가 서울에 가있던 동안의 진료 기록과 특이 사항을 알려주는 자리였다.

“일 평균 방문 환자가 10명이 못 됩니다. 리펄스 베이에 거주하는 환자들이 절반, 그리고 제가 칭화 병원에 있을 때부터 찾아주셨던 분들이 절반입니다. 큰 병을 앓는 환자는 안 계시고, 모두 간단한 침술이나 장복 처방을 원하는 분들이십니다.”

“내가 홍콩에 머무를 때와 비슷하군요.”

한지호는 짧게 말을 하고 고민에 잠겼다.

홍콩 언론에도 몇 차례 기사가 났지만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고가의 진료비를 받지만, 그래도 하루 10명 수준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한 번의 치료에 몇 천만 원 이상을 지불하는 엄청난 환자가 찾지 않는 이상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수가 몰려야 한다.

물론 임대료 부담이 없기에 당장 위기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미리 미리 대비하지 않고 마음을 놓았다가 진짜 위기가 닥치면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한지호는 바이룽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대책을 세워야겠지만, 다른 직원들이 조바심을 느끼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면 안 됩니다. 내가 없을 때도 직원들이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을 다할 수 있게끔 잘 독려해 주세요.”

“명심하고 있습니다, 원장님.”

바이룽이 깍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는 우려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본분을 확실하게 지켰다.

홍콩에서 가장 잘 나가던 중의사였고, 나이도 한지호보다 많았지만 문제 될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홍콩 원화 한의원의 부원장으로서 더 이상 완벽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였다.

한지호에게 의학적인 노하우를 더 전수 받으면 점점 발전할 것이다.

“어설픈 홍보로 주의를 끄는 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리펄스 베이의 주민들에게 믿음을 줄 때까지 충실하게 자리를 지킵시다.”

“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라 생각됩니다.”

“침을 맞고, 약을 지어서 복용한 분들이 한 달이나 두 달 뒤면 뭔가 다른 효능을 느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입소문이 나겠죠.”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홍콩의 부자들도 자신들이 소속된 커뮤니티 내부의 입소문을 가장 신뢰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상류층은 광고와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론조차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광고를 믿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기에 입소문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들은 상류층의 이너 서클(inner circle)안에 포함 된 지인의 경험담을 근거로 판단을 내린다.

예를 들면 경제인 대표 모임에서 만난 김 사장의 추천이라던가, 홍콩 재벌 2세들의 와인 파티에서 화제가 됐던 제품을 구입하는 식이다.

한지호는 앞으로 한 달 내지 두 달이면 리펄스 베이의 부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질 거라 기대했다.

호기심으로, 혹은 바이룽과의 인연으로 홍콩 원화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들이 남다른 효능을 체험하게 될 시기가 그 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번 입소문 싸이클이 돌고나면 홍콩 원화 한의원도 자리를 잡게 될 거라 판단했다.

“센트럴 쪽은 좀 어떻다고 합니까?”

한지호가 은근슬쩍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홍콩의 현지 사정에 대해서는 바이룽이 훨씬 밝기 때문이다.

잠시 주춤하던 바이룽은 한지호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센트럴에 문을 연 위천 한방병원에는 제법 많은 환자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그래요?”

한지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 진출한 위천 한방병원의 동태가 신경 쓰이는 게 당연했다.

바이룽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바를 풀어놓았다.

“유동 인구가 많은 센트럴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고, 대대적으로 광고와 홍보에 힘을 쓰는 모양입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비롯해 교민들, 그리고 홍콩 사람들도 꽤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조준혁 이사장의 스타일이라면 홍보비로 거액을 지출했겠죠.”

“아무래도 광고 효과를 무시하기 힘든 듯 합니다.”

“대신 현지의 VIP들에게는 전혀 어필할 수 없을 텐데.”

“맞습니다. 홍콩 현지인들도 한류팬이나 센트럴 부근의 직장인들이 광고를 보고 찾아가는 정도입니다.”

“한국에서처럼 박리다매로 대중성을 얻겠다는 것인데…….”

한지호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조준혁은 한국에서 위천을 성공시킨 방법을 똑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과감한 홍보와 마케팅, 그리고 유동인구가 많은 입지 선정.

마지막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프리미엄 전략으로 성공한 원화 한의원과는 정반대의 방식이다.

한지호와 조준혁, 원화와 위천이 괜히 상극인 게 아니었다.

병원장 유우선을 홍콩에 투입시켰지만, 조준혁은 막대한 광고비를 쏟아 부으며 환자 머릿수 늘리기에 주력하고 있었다.

매출이 아닌 수익을 생각하면 절대 현명한 전략이 아니다.

한국에서야 전국적인 프랜차이즈 확대를 통해 이익을 뽑아낼 수 있었지만, 중국에서 위천의 지점을 늘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전략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조준혁이 공공연하게 밝혀온 목적, 위천의 성공이 아닌 원화의 실패를 위해 이보다 좋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한의원하면 다들 위천 한방병원을 떠올리게 만들려는 것이다.

홍보와 박리다매를 앞세운 위천이 순이익과 상관없이 인지도를 얻을수록 프리미엄 전략을 추구하는 원화는 살아남기 어려워진다.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막상 소식을 들으니 한지호의 심기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직원들 출근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 잠시 쉬도록 하죠.”

그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초조해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대륙의 마음을 사로잡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한지호도 사람이다.

모든 일이 그의 마음대로 착착 풀리지는 않는다.

매번 고뇌하고 또 고뇌하면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중국 진출이라는 거대한 도전의 중심에서 그의 고뇌와 번민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아침 일찍 보고를 마친 바이룽은 리모컨을 집어 TV를 켰다.

홍콩 원화 한의원에는 별도의 회의실이 없다.

원장실 겸 진료실, 침이나 뜸을 놓는 시술실, 상담실과 간호사실, 그리고 안내데스크가 있는 환자 대기실이 전부다.

좁은 공간은 아니지만, 빌딩 1층부터 3층까지를 사용하는 서울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다.

그래서 한지호와 바이룽은 아침 일찍 환자대기실에 편히 앉아 회의와 보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보고를 다 받은 한지호는 원장실로 들어가지 않은 채 눈을 감았고, 바이룽은 대기실의 TV를 틀어 뉴스를 보려 했다.

때마침 각 채널에서 출근시간에 맞춰 오전 뉴스를 방송하는 시간이었다.

“런 주잉단, 란 차이 마 하오…….”

한지호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중국어가 나왔다.

어차피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라 뉴스 소리가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그때 TV 스피커를 통해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앞뒤로 연결 된 중국어 속에서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이름이었다.

“한구어 MC 류따이승 쉬……, 런런런 류따이승…….”

한구어, 류따이승.

모두 중국식 발음이지만 알아듣기 쉬웠다.

한국, 그리고 유대성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지호가 눈을 뜨고 TV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에서는 국민 MC라 불리는 유대성이 나오고 있었다.

유대성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가 높은 개그맨이자 MC이다.

최근에는 런런런이라는 프로그램이 중국과 동남아에서 대박을 치며 해외 일정도 많아졌다.

그렇기에 중국 아침 뉴스에 유대성이 나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지호는 바이룽에게 뉴스 내용을 물어봤다.

“한국 연예인 뉴스인데, 지금 아나운서가 뭐라고 하는 건가요?”

“그것이…… 런런런 멤버들과 함께 중국 투어를 시작한 류따이승이 베이징 행사 도중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방송국에서는 단순 과로이기에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팬들의 걱정이 아주 큰 모양입니다.”

“행사 도중에 과로로 쓰러졌다고요? 류따이승, 아니, 그러니까 유대성 씨가?”

한지호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현지인인 바이룽이 뉴스를 잘 못 들었을 리 없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원장님?”

“알고 있겠지만 유대성 씨는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MC입니다.”

“유대성이 류따이승을 말하는 것입니까?”

“맞아요. 한국 발음입니다.”

“그럼 여기서도 아주 유명합니다. 최근 들어 중국에서도 팬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인기가 많은 걸로도 유명하지만,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모범적인 연예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요. 건강을 위해 술, 담배도 일절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몸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 그런데 행사 도중에 쓰러질 정도라면…… 절대 단순 과로가 아닐 겁니다.”

한지호의 설명을 들은 바이룽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듣고 보니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 행사 일정이 고되어 며칠 밤을 샐 수도 있지만, 평소에 몸 관리를 잘 해서 면역이 좋은 사람은 웬만하면 갑자기 쓰러질 일은 없습니다.”

“무리한 중국 스케줄 때문이라면 런런런의 다른 멤버들이 먼저 쓰러졌어야죠.”

“류따이승이 한국에서 더 바빴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는 다른 인기 연예인들과 달리 행사를 뛰지 않아요. 오직 방송 진행만 하는데, 일주일에 4개 이상 녹화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과로가 아니라 발병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바이룽의 물음에 한지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과로로 행사 중간에 쓰러졌다는 건 납득이 안 됩니다. 뉴스에서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베이징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휴식을 취한 후 나머지 일정을 소화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옵니다.”

“단순 과로라면 상하이 행사에서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하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변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마 어마어마한 금액이 걸린 중국 투어일 텐데 취소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위약금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두고 보죠. 어쩌면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지호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나왔다.

런런런 멤버들의 중국 투어 계약금은 100억을 훌쩍 넘길 것이다.

통상 위약금은 계약금의 3배다.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취소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

책임감이 강한 유대성은 자신 때문에 다른 멤버들에게 피해를 주려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아도 상하이와 홍콩에서 남은 일정을 소화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지호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키워드를 정리했다.

국민 MC를 넘어 아시아의 스타가 된 유대성, 과로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홍콩에서 끝나는 런런런 중국 투어.

“안녕하세요, 원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 부원장님, 같이 계셨네요?”

그때 직원들이 우르르 한의원 안으로 들어왔다.

안내 직원과 상담 직원, 간호사들까지 근처에서 만난 것처럼 동시에 출근을 한 것이다.

한지호는 유대성에 대한 생각을 잠시 뒤로 미뤄놓았다.

또 하루가 시작됐으니 착실하게 진료를 봐야 한다.

그는 바닥에서부터 새로 한의원을 열었다는 마음가짐으로 홍콩 환자들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침 뉴스의 내용이 떠나지 않았다.

스타들의 스타라고 불리는 유대성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을까.

다른 걸 떠나서 유대성은 평소에도 참 호감이 가는 연예인이었다.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괜한 설레발일지 모르지만, 국민 MC와 국민 한의사의 만남이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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