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4장, 격동의 시기 (1)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변화가 있다.
혼란을 불러오는 나쁜 변화, 그리고 역동성을 불러오는 좋은 변화.
원화 한의원과 네트워크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어느 쪽일까.
당연하게도 조직의 역동성을 강화 시키는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였다.
물론 약간의 혼란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개혁, 진보, 변화.
비슷한 뜻을 가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것들도 있다.
먼저 한지호는 역삼 M 타워의 3층을 인수했다.
과감한 투자였다.
경기가 얼어붙었고, 원화 한의원을 제외한 3층, 4층, 5층의 병원들은 매출이 대폭 줄어들었다.
결국 3층의 피부과가 버티지 못하고 먼저 폐업을 하게 됐다.
한지호는 건물주와의 협상을 통해 공실기간 없이 곧장 3층을 쓰기로 했다.
물론 임대료도 기존에 피부과가 내던 금액보다는 저렴해졌다.
건물주도 강남 병원 경기가 차갑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공실기간이 길어지면 더 큰 손해를 입기에 전향적으로 협상에 임했다.
한지호는 3층을 진료실이나 대기실로 쓸 생각은 없었다.
이미 1층과 2층의 공간으로도 환자들을 받기에 부족하진 않다.
철저한 예약제 시스템이라 환자들의 방문 시간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3층은 조금 색다르게 운영 할 계획이었다.
동대문 경동시장에 있는 명징약초를 아예 원화 한의원 3층으로 옮겨올 것이다.
명징약초 사장인 최치우와는 이야기가 끝났다.
그는 약초꾼들 사이에서 큰형님으로 통하기에 터전을 옮겨도 문제될 건 없다.
오랜 시간 몸담았던 경동시장을 떠난다는 게 서운할 뿐, 무상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강남 중심에 자기 공간을 갖게 됐다.
한지호가 명징약초를 3층으로 이전시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원화 한의원은 필요한 약재를 최치우에게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참에 아예 원화 정의 네트워크만을 위한 약재상으로 명징약초를 편입 시키려는 것이다.
최치우는 안정적으로 5곳의 한의원에 약초를 공급하게 됐고,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들은 믿을만한 전용 약재상을 얻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
이로서 명징약초도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새로운 식구가 됐다.
뿐만이 아니었다.
3층은 최치우가 혼자 쓰기엔 너무 넓다.
나머지 공간은 한약방처럼 꾸며질 것이다.
조기운이 판매를 담당하던 청우단도 앞으로는 원화 한의원 3층에서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한지호와 네트워크 소속 원장들이 지은 기초적인 보약, 건강차, 한방 식품 등을 알리고 판매하는 공간으로 키울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조기운도 청우단 업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위천 한방병원의 소문을 추적하는 일, 또 홍콩과 서울을 오가야 하는 한지호를 보좌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한지호는 3층에 들어설 명징약초와 한약방에 큰 기대를 걸었다.
어중간한 기대감으로 홍콩 진출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과감한 투자를 할 리 없다.
진료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한약이나 전통 건강식품을 원하는 수요는 엄청나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새로운 수익원이 되기에 충분한 시장이다.
위천에서도 한약방 프랜차이즈 사업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던가.
그에 대한 대항마로 원화가 한 걸음 먼저 치고 나온 셈이었다.
위천이 원화의 홍콩 진출을 따라했다면, 원화는 위천의 한약방 사업 모델을 참고하며 한 방을 먹였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쎄게 한 방씩 먹인 다음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지 모를 일이다.
이렇듯 역삼 M 타워의 3층에 명징약초와 한약방을 입점시킨 것만이 변화의 전부는 아니었다.
가장 큰 변화의 초점은 역시 홍콩에 맞춰져 있었다.
칭화 그룹의 도움으로 행정적인 절차는 마무리가 됐고, 임형빈 소장이 리펄스 베이 상가의 내부 공사를 진행하는 중이다.
공사가 끝나는 즉시 홍콩 원화 한의원이 문을 열게 된다.
한지호는 일주일에 이틀 내지 사흘을 홍콩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은 바이룽 부원장이 홍콩 원화 한의원을 책임진다.
반대로 한지호가 홍콩에 있는 동안은 문재영 부원장이 서울 원화 한의원을 맡는다.
대신 한지호는 공중파 건강 프로그램으로는 유례없이 큰 사랑을 받았던 <건강백서, 진짜! 가짜!> 방송에서 하차하기로 결심했다.
수요일 하루를 방송 촬영으로 비우기에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일정이 너무 바빠졌기 때문이다.
이미 TV를 통해 국민적인 인지도를 얻었고, 방송국에도 할 만큼 기여를 다 했다.
물론 PD와 제작진, 국장까지 나서서 한지호의 하차를 만류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끔 특집으로 등장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마지막 촬영분을 녹화했다.
한지호가 국민 한의사 이미지를 얻기까지 <건강백서, 진짜! 가짜!>는 발판이 되어 줬다.
그래서인지 한지호도 마지막 촬영을 마치며 감회가 남달랐고, 채성일 PD와 문주연 아나운서도 섭섭함을 토로했다.
평소답지 않게 찐한 회식으로 방송 하차의 아쉬움을 털어낸 한지호는 시간을 금처럼 아껴 썼다.
가끔씩 천사원을 방문하거나 서울에서 유초아를 만날 때 말고는 일에만 매달렸다.
바이룽 외에도 홍콩 원화 한의원에 필요한 직원들을 구해야 했다.
간호사, 데스크 직원, 사무장, 통역까지.
홍콩에서는 한 번의 최종 면접만 진행한다.
그렇기에 칭화 그룹에서 보내준 리스트를 분석해서 미리 후보군을 추려 놔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지호는 재키 마가 골라준 직원 후보들의 이력을 논문 분석하듯 읽고 또 읽었다.
깐깐한 재키 마가 아무 사람이나 추천해서 리스트에 올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원석을 잘 고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나 둘 변화의 초석이 놓이고 있었다.
한지호는 스스로 놓은 주춧돌을 밟고 높이 도약 할 순간을 기다렸다.
그 때가 결코 멀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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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뉴스입니다. 오늘 첫 소식은 우리 한의학의 중국 진출 도전입니다. 국민 한의사로 불리는 한지호 원장이 홍콩 리펄스 베이에 원화 한의원을 엽니다. 국내 최대 한의학 프랜차이즈인 위천 한방병원도 같은 시기 홍콩으로 지점을 확장했습니다. 한국 전통의학이 중국인들의 신뢰 받아 새로운 한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을지 정부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홍콩 현지의 박채림 기자, 만나보시죠.”
공중파 TV 9시 뉴스에서 원화 한의원과 위천 한방병원의 중국 진출을 다뤘다.
방송이 시작하자마자 유명 앵커가 한지호의 도전을 언급한 것이다.
홍콩 특파원은 원화 한의원이 들어설 리펄스 베이, 그리고 위천 한방병원이 선택한 센트럴 인근을 가리키며 설명을 곁들였다.
한지호가 협진 프로젝트의 성과를 알리며 중국 진출을 선포한 이후 국민들은 계속해서 관심을 보여 왔다.
막연하게 느껴지던 중국 진출이 현실화 됐으니 언론도 다시 조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공항 게이트 대기실에서 9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다른 여행객들이 한지호를 알아보고 조용히 수군거렸다.
오늘은 먼저 다가와 사진을 찍자거나 싸인을 해달라는 사람은 없었다.
진료를 마치자마자 짐을 챙겨 공항에 와서 피곤했는데 다행스러웠다.
“벌써 내일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한지호가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9시 뉴스에 보도가 되는 걸 보니 비로소 실감이 됐다.
오늘 밤 늦게 홍콩에 도착해서 자고 일어나면 개원식을 한다.
다른 곳도 아닌 중국 대륙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국제 도시 홍콩에서 두 번째 원화 한의원을 여는 것이다.
“9시 50분 홍콩으로 떠나는 아시아나 OZ 72,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부터 탑승 시작하겠습니다. 9시 50분…….”
그때 탑승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오늘 한지호가 타게 될 비행기에는 퍼스트 클래스가 없다.
한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즈니스 클래스 카운터로 걸어갔다.
퍼스트를 타면 전용 라운지에서 전담 직원이 탑승 안내와 기내 수화물까지 알아서 챙겨준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먼저 탑승하고 먼저 내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다를 게 없다.
물론 기내 공간과 서비스 등은 이코노미와 천지차이지만 말이다.
한지호는 간단한 탑승 절차를 거쳐 가장 먼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3시간 30분 뒤면 홍콩에 도착한다.
개원식 까지는 1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한지호를 견제하기 위해 무리하게 중국 진출을 시도한 조준혁도 같은 날 개원식 일정을 잡았다.
홍콩 센트럴에서 아주 성대하게 개원식을 열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원래라면 리펄스 베이에만 몰렸을 기자들도 위천의 개원식을 취재하느라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조준혁은 한지호를 성가시게 만들어 공멸하는 것이 목표임을 대놓고 밝혔다.
같이 중국 진출에 실패하자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조준혁 이사장. 중국이 당신의 무덤이 될지도.”
한지호는 넓은 비즈니스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시간이 날 때 휴식을 취해야 좋은 컨디션으로 개원식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준혁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뤄내면 된다.
쿠콰아아앙-
한지호와 함께 거대한 야망을 실은 비행기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이륙(離陸)의 여운이 길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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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찰칵-!
연달아 플래쉬가 터졌다.
리펄스 베이의 상가 건물 1층에 이토록 많은 취재진이 몰린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물론 한국에서의 떠들썩한 기자회견 현장과 비교하면 많은 숫자는 아니다.
위천 한방병원의 개원식을 취재하러 센트롤 쪽으로 나간 기자들도 꽤 많다.
그래서일까.
한지호는 홍콩 원화 한의원을 찾아운 기자 한 명 한 명이 고맙게 느껴졌다.
대부분 한국 언론의 특파원들이고, 홍콩 현지 기자들은 두 명밖에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는 밤새 준비한 중국어로 개원사를 전했다.
“먼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홍콩 원화 한의원을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저의 중국어가 어색하다는 점, 양해하고 들어주세요.”
“하오, 하오!”
짝짝짝짝!
그의 중국어 인사에 홍콩 기자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을 해줬다.
완벽하진 않지만 노력을 하는 자세를 좋게 보는 것이다.
뻔하다면 뻔한 현지화 전략이지만 하는 것과 안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지호는 웃으며 중국어로 말을 계속했다.
“한의학, 중의학, 현대 의학, 모두 하나의 의술입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면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홍콩에서도 서울에서처럼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 이상의 각오는 없습니다. 신뢰를 드리는 의원이 되도록 모두 함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옆에 서있던 바이룽과 홍콩 원화 한의원의 직원들이 허리를 숙였다.
한지호도 함께 허리를 숙이며 참석해준 손님과 취재진들에게 예의를 갖췄다.
이어서 다시 한 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는 사람도 있고, 형식적으로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다.
한지호는 직원들이 준비한 다과를 나누며 취재진들 틈으로 들어갔다.
여러 기자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기사 소스를 주려는 것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한지호는 베테랑이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강남 바닥에서 VIP 전문 한의원을 성공시켰고, 5개 한의원과 1개의 약초상, 또 새로운 한약방이 포함된 네트워크를 이끌고 있다.
드디어 시작된 홍콩에서의 도전.
한지호는 낯선 도시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허황되고 무모한 시도가 아닌, 신화의 시작이었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걸어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