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3장, 리펄스 베이(Repulse Bay) (2)
“나쁠 거 없죠. 어차피 다른 계획도 없었고, 마카오에 있을 첸이나 만나려 했었습니다.”
“첸은 지금 마카오에 없습니다. 회장님과의 내기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칭따오에서 그룹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입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도박 중독, 아니 도파민 중독인 첸이 그룹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니.
무엇보다 승부의 귀재인 그가 웨이 림 회장에게 패배했다는 게 흥미로웠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재키 마는 구구절절 그룹 내부의 해줄 것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한지호는 다음에 첸을 만나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그럼 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으로 가죠.”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닥터 한의 짐을 호텔로 운반한 수행 기사는 센트럴 지점에 오도록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뭐 하나 막히는 게 없는 일 처리였다.
한지호는 재키와 함께 홍콩 원화 한의원이 들어설 상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차에 타기 전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상가 건물을 쳐다봤다.
이곳을 교두보로 삼아 중국 대륙에 한의학의 깃발을 꽂을 것이다.
한지호는 자신의 꿈이 불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홍콩의 부자들을 시작으로 베이징, 상하이의 거물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차에 탄 한지호는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을 반드시 현실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야망이 손에 잡히는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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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은 홍콩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의료 기관이다.
수를 헤아리기 힘든 환자와 보호자들이 1층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병원 직원과 간호사, 의사들도 하나 같이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한지호는 림커창을 치료하는 동안 센트럴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의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중의학과장이 된 바이룽도 매일 수십 명, 많을 때는 100명이 넘는 환자를 보아야 할 것이다.
짬을 내기도 쉽지 않을 터.
그러나 바이룽은 한지호와 재키 마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오셨습니까? 허억- 허억.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아 계단으로 뛰어 오느라…….”
1층 로비에 도착한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새하얀 가운도 구겨져 있는 게 바삐 달려온 티가 났다.
둘을 만나게 해준 재키 마는 목례를 하고 먼저 빠지려 했다.
“닥터 한과 바이룽 과장이 만났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룹의 업무가 많아서.”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사실 재키 마의 얼굴을 직접 볼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행정 절차가 끝나고, 임형빈 소장이 인테리어 공사를 마친 뒤 진짜 개원을 할 때에나 한 번 더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재키 마는 이래봬도 칭화 그룹의 핵심 브레인이다.
큰 문제가 터지지 않는 한 웬만한 일은 그의 아랫사람들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만큼이나 재키 마가 나서서 일처리를 한 것도 웨이 림의 특별 지시 때문이었다.
한지호는 로봇 같은 걸음걸이로 나가는 재키 마를 쳐다본 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바이룽은 긴장을 했는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래 그는 무척 건방졌다.
한지호가 첸의 연락을 받고 센트럴 지점에 왔을 때, 대놓고 무시를 했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간단한 진맥만으로 림커창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냈고, 이후에는 바이룽의 기를 완적히 죽여 놓았다.
그때의 뼈아픈 경험이 있어서인지 바이룽은 첫 인상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우선 말투부터 달라졌다.
영어에 존칭은 없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뉘앙스와 단어는 따로 있다.
바이룽은 영어로 대화할 때 쓰는 단어뿐 아니라 표정 등 비언어적인 영역에서도 예전과 달리 한지호를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저기, 오랜만입니다.”
“네. 재키 비서에게 저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면 병원 지하에 있는 카페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신지요?”
“물론입니다.”
바이룽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병원 로비에서 서서 이야기 하지 않고, 굳이 카페로 내려가자는 걸 보니 확실했다.
한지호는 그와 함께 지하의 카페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바이룽은 아이스 라떼를 한 모금 벌컥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림커창 님은 그날 이후로 꾸준히 검사를 받고 계신데 상세가 아주 좋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진단부터 치료까지 모두 닥터 한, 아니 한 원장님께서 해내셨는데…… 꼭 여쭤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편하게 물어보세요.”
한지호는 바이룽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는 예전의 건방진 태도 때문에 앙심을 품을 만큼 속이 좁지 않았다.
똑같은 의사로서 바이룽이 의학적인 호기심을 품은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민감한 내용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도움을 주고 싶었다.
예상보다 한지호의 태도가 부드러웠는지 바이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이어갔다.
“주화입마라는 진단. 아주 오래된 고서에는 등장하지만 현대 중의학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병명입니다. 그러한 진단을 내리는 방법과 치료법까지 모두… 한의학에는 전승이 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아…….”
바이룽이 아쉬운 듯 신음을 흘렸다.
“림커창 님이 치료되는 것을 보고 한의학을 공부하려 했습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고대의 중국과 한국에서 성행했던 전통 의학의 명맥은 상당 부분 소실 됐다는 점, 바이룽 과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전통 의학을 과학적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올바로 정리 된 부분도 있지만, 명맥이 끊겨 아쉽게 사라진 내용도 상당하죠.”
“역시 한국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은데… 한 원장님께서는 어떻게……?”
“나름대로 고대의 전통 의술을 현대 한의학과 접목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당연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한지호의 설명을 들은 바이룽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뭔가 크게 결심을 한 사람처럼 한지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사실 마 비서님께 한 원장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일입니다.”
“무엇을요?”
“홍콩, 리펄스 베이에 한의원을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다음 달이면 개원을 할 것 같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편안하게 앉아있던 한지호도 깜짝 놀라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칭화 병원의 중의학과장이면 홍콩의 중의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자리다.
게다가 바이룽은 아직 30대 중반이다.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는 그가 대체 무엇이 아쉬워 한지호 밑으로 들어오려는 것인가.
한지호의 눈빛에서 의혹과 당황스러움을 읽은 바이룽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림커창 환자를 보고 전혀 손을 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한 원장님이 단번에 진단을 하고, 또 치료까지 성공한 다음…… 며칠 동안 밤에 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그런 패배감은 처음 느껴봤으니까요. 더불어 내가 이제껏 배워온 의술의 한계도 체감하게 됐고 말입니다.”
“이해합니다. 의학의 벽에 가로막힌 기분, 해소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한 원장님이 홍콩에 한의원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많이 갈등했지요. 칭화 병원의 중의학과장은 모두가 호시탐탐 노리는 최고의 자리인데…….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중의사로서 벽을 깰 기회는 두 번 다시 안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원장님의 의술을 배울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바이룽은 진심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제정신이라면 칭화 병원의 중의학과장 자리를 팽개칠 수 없다.
그만큼 의술의 한계를 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한지호는 말없이 바이룽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지만 얕게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지호가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의술을 가르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 가르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또 가르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게 아닌 부분도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원장님. 그저 옆에서 지켜보며 기존의 중의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치료하는 것을 경험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노하우를 전수해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바이룽은 모든 경우를 감안하고 있었다.
한지호의 신묘한 의술이 배워서 되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도, 진짜 비밀을 다 배울 수 없으리란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물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빠른 성공으로 인해 거만하고 건방졌던 의사가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했다.
국적, 출신, 나이를 떠나서 이만한 결심을 하기는 정말로 어렵다.
한지호는 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인연이지만, 바이룽의 열정을 높이 산 것이다.
“칭화 병원과 마무리는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달 말이면 리펄스 베이의 원화 한의원에서 근무를 시작해야 합니다.”
“저를 받아주신다는……?”
“많이 힘들 겁니다. 여기서는 바이룽 과장님 말 한 마디에 움직이는 사람이 여럿이지만, 홍콩 원화 한의원에선 직위만 부원장이지 실무는 거의 혼자서 다 해야 할 테니까요.”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칭화 병원에서도 막내 생활부터 했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가,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이룽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카페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첫인상과 달리 바이룽은 생각 이상으로 의술에 대한 신념이 뚜렷했다.
거만한 모습조차 자기 의술에 대한 확신이 강해서 그런 것 같았다.
리펄스 베이의 한의원 입지를 확인하러 왔지만, 엉겁결에 홍콩 원화 한의원을 함께 키워나갈 부원장을 얻었다.
사람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일이 안 풀린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한지호의 중국 진출을 하늘이 돕는 것일까.
바이룽이라는 의외의 카드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중국에 올 때마다 한지호는 항상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수확하는 것 같았다.
전생의 규호가 누비고 다녔던 무대인 중국 대륙이 현생의 한지호를 반기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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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요?”
“응, 진짜. 원래는 당장 공고를 내서 현지 부원장을 구하거나 의학 전문 통역을 두려고 했는데 한방에 해결이 됐지.”
“정말 하늘이 오빠가 하는 일을 돕는 것 같아요.”
“그러게. 앞으로도 계속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 하늘이.”
한지호가 유초아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D대 캠퍼스 앞에서 만나 밥을 먹은 두 사람은 조용한 카페에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대학 캠퍼스에는 두 가지 상반된 기류가 흐른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분위기와 여름 바캉스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유초아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름부터 학과에서 준비하는 연극에 캐스팅 됐다.
1학년인데도 불구하고 여주인공을 맡게 된 것이다.
덕분에 선배 여학생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게 됐지만, 부담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넌 여름방학 해도 더 바빠지겠어. 부천에서 학교까지 통학하는 것도 부담스럽겠다.”
“좀 그런 면도 있어요. 연극 연습 들어가면 밤늦게 끝날 때도 많으니까 차도 끊기고……. 그래도 더 멀리서 학교 다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힘내야죠.”
“친구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거 보면 부럽지 않아?”
“부러워하면 뭐 하겠어요. 오빠 아니었으면 이렇게 대학이란 곳을 다니지도 못 했을 텐데요. 전 지금도 충분히 감사해요.”
유초아가 생긋 웃으며 예쁘게 대답했다.
가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한지호는 기특하면서도 미안했다.
물론 천사원 아이들이 한지호의 후원으로 예전보다 훨씬 좋은 환경을 누리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들은 한 번씩 부리는 투정조차 사치로 생각하는, 너무 일찍 성숙해진 모습이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오빠도 여름부터 홍콩에 자주 가면 더 보기 어려워지겠네요?”
그때 유초아가 큰 눈을 깜빡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한지호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이 간지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전혀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홍콩에 있어야겠지.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도 하차할까 고민 중이야. 이미 얼굴은 알릴 만큼 알렸으니까.”
“정말요? 건강백서, 진짜! 가짜! 꼭 챙겨봤는데…….”
“그랬어?”
“그럼요. 지호 오빠가 나오니까 친구들한테도 자랑하고 본방사수 했어요.”
유초아가 뺨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둘은 계속해서 소소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시간을 보냈다.
한지호가 한의대를 다니고 공중보건의 생활을 할 때 유초아는 중고등학생이었다.
이제 그녀는 어엿한 성인이 됐다.
예전과는 대화의 내용이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생경한 기분이었다.
홍콩에서 입주할 상가를 확인하고, 바이룽이라는 대어까지 낚은 한지호는 모처럼 기분 좋은 휴식을 즐겼다.
억대의 스포츠카를 몰고, 수천만 원을 쓰는 호화 파티를 해야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소중한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한지호는 몸이 아닌 마음을 충전시키며 더 힘찬 비상(飛上)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