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51화 (151/255)

# 151

3장, 리펄스 베이(Repulse Bay) (1)

낯선 도시였던 홍콩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한지호는 홍콩 공항에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후덥지근한 공기를 맛보고 미소를 지었다.

푹푹 찌는 습한 무더위야말로 여행자를 반겨주는 홍콩의 첫 번째 인사다.

한지호는 홍콩의 날씨에 적응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반팔을 입기 이른 날씨다.

그래서 셔츠를 입고 비행기에 탔지만, 내리자마자 단추를 풀어 가방에 넣었다.

청바지에 반팔 차림이 된 한지호는 여행을 온 대학생처럼 보였다.

30대가 됐지만 캐주얼한 옷을 입으면 여전히 20대로 보인다.

홍콩 공항에서도 몇몇 한국인들이 그를 알아봤지만, 한지호는 재빨리 움직여 입국 수속을 마쳤다.

공항 게이트에는 그를 환영하기 위한 기사가 나와 있었다.

칭화 그룹의 일처리에는 빈틈이 없다.

홍콩 리펄스 베이에 한의원을 여는 일은 칭화 그룹도 참여하는 프로젝트다.

회장의 수석 비서인 재키 마가 직접 세부 사안을 챙기고 있다.

웨이 림의 이복 형을 살려준 대가를 톡톡히 돌려받는 셈이다.

재키 마는 한지호가 홍콩에 올 때마다 공항에 기사를 보내줬다.

박우식과 함께 왔던 지난 출장에서도 일정 내내 수행 기사가 동행했다.

덕분에 길바닥에서 시간을 버리지 않아도 됐다.

출장 기간이 짧다는 걸 감안하면 그렇게 아끼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

“닥터 한!”

“반가워요, 미스터 챙.”

한지호는 지난 출장에서 안면을 익힌 기사와 악수를 나눴다.

반갑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기사가 한지호의 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수행 기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한지호는 그에게 짐을 맡기고 편히 걸어갔다.

공항 출구 밖으로 나오자 검은색 대형 세단이 보였다.

칭화 그룹에서 보내준 차량답게 고급 세단의 대명사인 벤츠 S클래스였다.

한지호는 뒷좌석 문을 열고 가죽 시트에 몸을 묻었다.

곧이어 트렁크에 한지호의 짐을 실은 기사가 운전석에 앉았다.

목적지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한지호보다 기사인 챙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홍콩 원화 한의원이 들어설 리펄스 베이의 입지에 직접 가본 적이 없다.

오늘은 두 눈으로 입지를 확인하고, 재키를 만나 개원 날짜를 확정지을 것이다.

부르르릉-

차가 움직였다.

한지호는 창밖의 풍경에 눈길을 주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생각할 거리가 워낙 많았다.

특히 홍콩으로 오기 직전, 동성 건설 회장 선운열의 소개로 플래티넘 홀딩스의 부사장 이재박을 만나 진료한 날이 잊혀지지 않았다.

단순히 한 명의 VIP 환자를 새로 확보한 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재박은 원래 위천 한방병원의 병원장 유우선의 단골 환자였다.

특별한 지병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몇 달에 한 번씩 유우선을 찾아 약을 지었던 충성도 높은 고객이었다.

그런데도 유우선 대신 한지호를 찾아 진료를 받은 것이다.

물론 선운열의 소개 덕분이지만, 유우선이 최측근의 VIP 환자들에게 신뢰를 잃고 있다는 뜻이다.

조기운이 전국을 떠돌며 알아낸 소문의 신빙성이 높아졌다.

위천 입장에서는 심각한 징후다.

병원장 유우선은 위천이라는 브랜드를 상징하는 존재다.

조준혁의 사업적 수완과 카리스마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는 한의사가 아니다.

프랜차이즈를 대표하는 한의사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 역할을 해왔던 유우선이 무너진다면, 그의 상태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면 위천 한방병원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

한지호는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유우선은 꽤 많은 VIP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지호가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의 다른 한의원에서 진료를 보는 것처럼 유우선도 지방의 분원을 찾아다니며 병원장 특진을 종종 한다.

그의 상태가 안 좋은 게 사실이라면 많은 환자들이 위험에 노출된 거나 다름없다.

위천 한방병원을 이기겠다는 개인적인 야망 때문이 아니라도 유우선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낼 필요가 충분한 것이다.

“거의 다 왔습니다.”

그때 기사인 챙이 입을 열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어서인지 금방 도착한 느낌이었다.

한지호는 창문 너머 리펄스 베이의 전경을 쳐다봤다.

해안가에 위치한 풍요로운 휴양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시아의 거부들이 모이는 곳인 동시에 홍콩 현지의 부자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지역.

리펄스 베이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사방을 물들이고 있었다.

“한의원 입지는 어디쯤입니까?”

한지호의 질문에 챙이 핸들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들어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으로 시선이 갔다.

해변가 위 언덕 지역이다.

언덕이라고 해서 가파른 경사를 상상해선 곤란하다.

외부 관광객이나 휴양객들이 많이 찾는 해변 바로 위쪽, 고급 빌라와 저택이 즐비한 낮은 언덕 지역에 원화 한의원이 들어서게 된다.

이윽고 한지호를 태운 차가 리펄스 베이 중심으로 진입했다.

그리 넓지 않은 도로 양 옆으로 비싼 고급차들이 흔하게 보였다.

서울 강남 이상이었다.

이곳에서 벤츠나 아우디, BMW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홍콩 도심에는 초고층 맨션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다.

하지만 리펄스 베이의 고급 빌라들은 높아야 5층 정도였다.

넓은 정원을 가진 단독 주택도 많았고, 하나같이 언덕 위에서 해변가를 내려 보는 최상의 전망을 자랑했다.

“도착했습니다.”

차가 멈춰 섰다.

수행 기사인 챙은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운전석에서 내려 한지호의 문을 열어줬다.

“짐은 호텔에 가져다놓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허리를 숙인 챙이 다시 차에 올랐다.

그는 한지호가 머무를 호텔에 짐을 가져다놓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 사이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 재키 마였다.

칭화 그룹의 실세인 그가 수행원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한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재키.”

“닥터 한. 비행은 편안했습니까.”

“덕분에 불편함 없이 잘 왔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재키는 거침이 없었다.

직설적으로 몰아치는 화법이 그의 특징이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홍콩 의료계와 금융계를 지배하는 웨이 림의 총애를 받는지 모른다.

“저곳입니다. 원화 한의원이 들어설 자리.”

딱 봐도 고급스러운 상가 건물 1층, 입지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근처에는 리펄스 베이의 고급 빌라와 주택들이 즐비해있고, 한 블록만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중심 관광지와 해변이 연결된다.

센트럴과 침사추이를 마다하고 리펄스 베이로 입지를 정한 건 홍콩 현지의 VIP들을 공략하기 위함이었다.

홍콩 부자들이 실제 거주하는 곳 중심에 있는 고급 상가라는 점에서 처음의 목표를 실현하기 좋은 위치다.

“마음에 드네요.”

“당연히 닥터 한의 마음에 들 거라 생각했습니다.”

재키 마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한지호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원화 한의원이 들어설 상가 1층 맞은편에는 스페셜 티 카페가 입점해 있었다.

같은 층을 쓰기에 나쁘지 않은 궁합이었다.

2층에는 명품 의류 편집 매장과 쥬얼리 샵이 있었고, 3층은 사무 공간으로 쓰이는 것 같았다.

역삼동에 비하면 좁은 공간을 써야 한다.

그러나 충분했다.

어차피 규모가 중요한 게 아니다.

최적의 공간에서 최고의 효율을 내며 현지인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된다.

“들어가서 이야기 더 합시다.”

한지호는 재키를 따라 상가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에서 살펴본 공간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넓었다.

이만하면 미니멀하고 모던한 인테리어로 리펄스 베이의 랜드마크가 될 만한 멋진 한의원을 꾸미기에 충분했다.

“내부 공사는…….”

“제가 생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지호가 재키의 말을 끊었다.

원화 한의원 인테리어를 맡아줬던 임형빈 소장에게 부탁을 해뒀다.

독일에서 인정받은 그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울과 홍콩에서 동일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도 임형빈이 적격자였다.

한국 최고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그의 몸값이 만만치 않지만, 돈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공사는 닥터 한이 선정한 쪽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관련된 행정 절차는 이번 달 안으로 마무리 될 겁니다.”

“빠르네요.”

“홍콩에서 칭화의 이름으로 안 되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뻔뻔하다면 뻔뻔한 말이지만 부정하기 힘들었다.

재키 마의 말이 사실이다.

한지호 혼자라면 홍콩에 한의원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홍콩 당국과 공안의 수많은 규제를 뚫고 합법적으로 한의원을 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칭화 그룹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중국 진출은 한낱 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지 운이 좋아서 중국 진출이 성사된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지호가 첸을 만나 인연을 맺고, 블랙문 카지노에서 벌어졌던 내기에 이긴 것.

그 모든 일들이 실처럼 얽히고설켜서 중국 진출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 달 안으로 행정 절차가 끝나면 바로 공사에 들어가겠습니다. 다음 달이 끝나기 전에 개원을 하는 것으로 정하죠.”

“다음 달.”

“한국의 약재를 홍콩으로 반입하는 문제도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행정 절차와 관련된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홍콩에서 칭화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게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재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한지호는 안심하는 한편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특이한 성질을 체감하고 있었다.

세계 2위의 대국으로 발돋움했지만 여전히 주먹구구로 처리되는 것들이 많은 나라.

그렇기에 아직까지 중국이 기회의 땅인지 모른다.

“임대료는 어떤 식으로 지급하게 되나요?”

한지호는 가장 뜨거운 부분을 언급했다.

웨이 림은 앞으로 10년 동안의 임대료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행정적 절차를 해결해주는 것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상가 건물주에게 이미 2년 치 임대료를 입금했습니다.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2년에 해당하는 임대료를 그룹에서 미리 지불할 겁니다.”

“한의원을 이전해도 마찬가지겠죠?”

“물론, 어떤 경우에도 10년은 보장합니다.”

이번에도 재키 마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이게 홍콩, 아니 중국의 비즈니스 스타일인 것 같았다.

깐깐할 때는 별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지만, 한 번 약속한 내용은 두말 하지 않고 지킨다.

한지호는 모든 걱정을 접어놓았다.

벌써 리펄스 베이 상가의 2년 치 임대료를 지급했다고 하니 염려할 게 없었다.

이달 중으로 행정 절차가 끝나고, 임형빈 소장이 인테리어 공사를 마무리하면 진짜 개원이다.

‘아직 감동하지 말자. 아직은 아냐.’

한지호는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감정을 억눌렀다.

정식으로 개원을 하고, 홍콩에서 첫 번째 환자를 받을 때를 위해 감동을 아껴두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한지호가 말없이 감정을 추스리자 재키 마가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에게 내면의 모습을 솔직히 오픈하고 싶진 않았다.

“잠시 홍콩에서의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그룹에서 임대료를 대납하니 경영 상의 어려움은 덜겠지만, 그래도 쉽지 않을 겁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홍콩 사람들은 내륙인들보다 더 까다롭습니다. 더구나 리펄스 베이에 사는 부자들이라면.”

“대신 한 번 마음을 열면 화끈하게 변하겠죠? 웨이 림 회장님이 통 큰 지원을 해준 것처럼.”

“그 한 번의 마음을 사기가 힘든 법. 닥터 한의 의술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보여드리죠. 올해가 끝나기 전에 홍콩의 콧대 높은 부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을.”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회장님도.”

한지호의 패기 넘치는 발언에도 재키 마는 무표정했다.

그러나 기대하겠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웨이 림과 재키, 그리고 칭화 그룹의 후계자인 첸까지 모두 한지호의 대단한 의술을 알고 있다.

그가 홍콩 의료계에 폭탄을 터트릴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아, 닥터 한. 혹시 내일까지 다른 스케줄은 없습니까?”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그럼 같이 가시겠습니까?”

“어디로……?”

“센트럴 지점의 바이룽 과장, 기억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이룽은 칭화 병원 센트럴지점의 젊은 중의학과장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과장 자리를 꿰찬 유능한 중의사지만, 한지호의 의술에 완전히 밀려 충격을 받았었다.

“닥터 한이 홍콩에 오면 꼭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바이룽 과장이 여러 차례 부탁을 했었습니다.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괜찮다면 만나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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