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50화 (150/255)

# 150

2장, 동귀어진(同歸於盡) (2)

기사가 났다.

한동안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위천 한방병원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위천 한방병원도 홍콩에 지점을 연다는 보도는 이슈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가 직접 중국 진출을 천명한 게 불과 얼마전의 일이다.

원화와 위천 사이에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한국에서는 아직 라이벌이라 부르기엔 위천의 규모가 크지만, 중국은 다르다.

백지 상태에서 누가 먼저 자리를 잡을 것인가.

한의학으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곳은 어디인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경쟁 구도는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조준혁은 일단 첫 번째 수를 잘 놓았다.

꽤 오랜 시간 한의학계 주요 뉴스는 모두 원화 한의원과 한지호의 차지였다.

전통의 강자인 위천은 이슈의 중심에서 멀어졌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중국 진출이라는 뉴스로 단번에 관심도를 높인 것이다.

한지호 입장에서도 당장은 나쁠 게 없었다.

중국 진출을 계기로 국민들이 원화 한의원을 위천 한방병원과 라이벌이라 생각하게 됐다.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으로 홍콩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어지겠지만, 골리앗인 위천과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는 수확이다.

판은 제대로 깔렸다.

모두가 지켜보는 무대 위로 올라가 한 칼을 멋지게 휘두르는 일만 남았다.

한지호는 중국 진출을 중심으로 고조되는 분위기를 느끼며 일을 진행시켰다.

입지 선정 작업도 끝났다.

원화 한의원은 홍콩 리펄스 베이에 들어서게 된다.

리펄스 베이(Repulse Bay)는 홍콩 센트럴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해안가다.

바다와 인접한 최고급 거주지이며 홍콩의 부자들을 비롯해 아시아의 거부들이 별장을 지어놓고 자주 찾는 곳이다.

관광의 명소이자 중심지인 침사추이나 센트럴에 한의원을 열지 않은 건 원화 한의원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서다.

원화 한의원은 VIP 전문 한의원이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승부했다.

홍콩에서도 다르지 않다.

관광객이 아니라 홍콩 현지인, 특히 상위 1%에 속하는 VIP들이 메인 타겟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번잡한 관광지나 도심지보다 진짜 홍콩 부자들이 살고 있는 리펄스 베이가 적격이었다.

칭화 그룹과 함께 치밀한 시장 조사를 했기에 최적의 입지를 선정할 수 있었다.

한지호는 여름이 지나기 전에 홍콩에 개원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어차피 한여름에는 대부분 휴가를 떠난다.

그 시기에 터를 잡고,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홍콩 부자들을 공략하려는 것이다.

“사무장님, 다음 주 월요일은 문재영 부원장님 특진 날로 스케줄 잡아 놓았죠?”

“네, 원장님.”

“좋습니다. 오늘은 동성 건설의 선운열 회장님께서 부르셔서 그쪽으로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지호는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박우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눴다.

주말에는 홍콩으로 날아가 리펄스 베이의 입지를 직접 체크할 예정이었다.

월요일 진료는 문재영이 맡아줄 거라서 부담이 없었다.

다른 일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조기운은 다시 청우단 판매를 전담하며 한약 협회와 관련 부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위천의 동네 한약방 프랜차이즈 진출이 진짜인지 소문인지 미리 파악하기 위함이다.

한지호는 머릿속으로 여러 일을 되짚으며 놓친 게 없는지 체크했다.

특별히 빠트린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죠.”

“내일 뵙겠습니다, 원장님.”

박우식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온 한지호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요즘 들어 원화 한의원이 입주한 역삼 M 타워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1층과 2층을 쓰는 원화 한의원믄 예약이 밀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다른 병원들은 사정이 나쁜 모양이었다.

3층의 피부과, 4층의 치과, 5층의 안과 모두 불경기의 여파를 맞고 있었다.

곧 계약이 만료되는 피부과가 그대로 폐업을 할지 모른다는 풍문도 떠돌 정도였다.

한지호는 벤틀리 컨티넨탈 쿠페의 운전석에 앉아 지하주차장을 돌아봤다.

언젠가부터 거대한 레인지로버 보그가 보이지 않는다.

3층 피부과 원장의 차였는데 눈에 띄지 않은지 꽤 된 것 같다.

차를 정리할 정도로 사정이 안 좋은가 싶었다.

‘3층까지 우리가 쓰는 건 무리일까?’

한지호는 운전대를 잡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길게 생각 할 시간이 없다.

선운열과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면 급히 차를 몰아야 한다.

부우우우웅-

시동을 켜고 엑셀을 밟자 새하얀 벤틀리가 웅장한 소리를 냈다.

아우디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만 탈 수 있는 도로 위의 성(城)에 걸맞은 소리였다.

한지호는 약속 장소로 이동하며 음악을 틀었다.

잔잔한 재즈 선율이 쉴 틈 없이 팽팽 돌아가던 머리를 쉬게 해주었다.

+++

“회장님, 좀 늦었습니다.”

한지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들어섰다.

약속 장소는 동성 건설의 서울 사무실이었다.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사업을 하는 동성 건설의 본사는 광주에 있다.

서울 사무실은 외부 미팅을 위한 용도로 쓰인다.

제법 넓은 사무실 안에 직원들은 이미 퇴근을 했고, 선운열과 또 한명의 노인만이 한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막히는 시간에 오라고 한 내 잘못이지. 얼른 앉게!”

선운열의 호탕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최규열, 양성문, 그리고 선운열.

이 세 명이 Y대 황금라인의 핵심 멤버다.

한지호는 지난 날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시원시원한 성격의 선운열과 교분을 나누었다.

그래서인지 호남에서 제일가는 건설사의 회장임에도 대하는 게 편했다.

선운열도 한지호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막역하게 대했다.

“이쪽은 플래티넘 홀딩스에서 부사장 하고 있는 이재박이네. 내 고향 친구지.”

그가 대뜸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을 소개해줬다.

선운열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 친구라고 하니 신기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한지호는 정중하게 명함을 건네다가 눈을 반짝였다.

“플래티넘 홀딩스의 부사장님이라고 하셨는지요?”

“우리 회사를 아는가?”

이재박이 입을 열었다.

선운열의 친구 아니랄까봐 목소리도 걸걸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 팀장님과는 예전부터 도움을 주고받던 사이입니다. 청우단이라는 환약을 구매한 오랜 고객이기도 합니다.”

“이야…. 이거 또 인연이 참 신기하구만. 운열이 이 친구랑 알면서 우리 회사 직원이랑도 가깝다니. 인연은 인연인가 보네.”

이재박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건영을 잘 아는 것 같진 않았다.

플래티넘 홀딩스가 워낙 거대한 금융회사이니 부사장이 팀장을 모를 수도 있다.

그래도 어쨌거나 자기 식구와 한지호가 아는 사이라고 하니 가깝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좁다.

이래서 어른들이 세상을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운열도 한지호와 이재박 사이의 인연이 재밌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금융에서 일하는 친구라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그렇게 또 연결이 된단 말이지? 하여튼 한 원장은 발도 넓네, 발도 넓어!”

“만날 분들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나 봅니다.”

“잘 된 일이지. 한 원장의 인복이고. 오늘은 이 친구의 진맥을 좀 봐달라고 불렀네.”

선운열이 자연스레 본론을 꺼냈다.

한지호는 고개를 돌려 이재박의 얼굴을 쳐다봤다.

또래인 선운열보다 늙어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안색이 나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알면 놀라 자빠질 일이지. 동성 건설의 회장인 나와 플래티넘 홀딩스의 부사장인 이 친구가 직원들 다 퇴근한 사무실에서 한 원장을 만나고 있으니 말이야. 안 그런가? 허허허허!”

선운열의 웃음소리가 세 사람을 뒤덮었다.

하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재벌이나 부자라고 하면 특별한 공간에서 비밀스러운 모임을 가질 거라 생각한다.

물론 그럴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텅 빈 사무실에 모여 물 한 잔 떠놓지 않고 대화를 나눌 때도 있다.

상위 1%의 부자들 역시 똑같은 사람이고, 의외로 소탈한 모습을 갖춘 경우가 많다.

한지호는 선운열을 따라 웃은 후 다시 이재박을 쳐다봤다.

그 눈빛을 의식한 이재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원래는 늘 보던 분이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처방이 좀 달라지더니 약효가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야. 그러던 차에 운열이, 이 친구가 강력하게 추천을 해서 여기로 따라왔지. 그 유명한 한 원장이 나온다는 건 나도 방금 전에 알았고 말이네.”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우리 일이 종일 컴퓨터 쳐다보는 거니까 눈이 침침하고, 두통도 심하고. 그 외에 다른 중병은 잘 모르겠네.”

“이전에는 어떤 한의원을 다니셨습니까?”

“그게, 위천의 유우선 병원장님이 직접 진맥을 해주셨었는데…….”

이재박이 말끝을 흐렸다.

원화 한의원과 라이벌 관계로 알려진 위천 한방병원의 병원장에게 진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껄끄러운 듯 싶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을 빛내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예전에는 유우선 병원장님의 처방이 몸에 잘 맞았는데 최근 들어 효과가 떨어졌다는 거죠? 진료를 위해 필요한 사안이니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흠흠, 솔직히 말해서 병원장님이 예전 같지 않단 느낌을 받았네. 나도 제법 오래 진료를 받아왔던 분인데…… 확실히 나이를 못 이기시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알겠습니다. 우선 진맥부터 해보겠습니다.”

한지호는 이재박의 소매를 걷고 맥을 잡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몸이 말해주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지만 특별히 나쁜 구석은 없었다.

눈이 침침한 것, 두통이 심한 것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거액의 자금을 운용하는 애널리스트들은 대부분 눈의 피로와 두통을 호소한다.

이재박은 선운열 같은 재벌이 아니다.

막대한 연봉을 받지만, 자기 능력으로 부사장 자리에 오른 금융업계의 애널리스트다.

그만큼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고, 나이가 들어가며 피로가 누적되는 게 당연하다.

이런 경우에는 휴식을 권해야 하지만 이재박이 들을 리 없었다.

결국 체질에 맞춰 원기를 회복시키는 보약을 쓰는 것이 최선이다.

예전에는 유우선도 이재박에게 딱 맞는 처방을 내렸을 것이다.

그는 한지호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최고의 한의사로 꼽혔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연로해지며 의술이 쇠퇴한 것일까.

이재박이 직접 느낄 정도로 처방이 엇나가기 시작했다는 건 예사 일이 아니다.

한지호는 조기운이 알아온 소문 두 가지가 생각났다.

위천이 한약방 사업에 진출 할 거라는 소문 말고, 병원장 유우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선운열이 소개해준 이재박을 진료하는 게 우선이다.

동성 건설 회장인 선운열은 말할 필요도 없고, 플래티넘 홀딩스의 부사장 이재박도 만나기 쉬운 인물이 아니다.

1%가 아니라 0.1% 안에 들어가는 VIP 환자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그는 이재박의 현재 상태와 필요한 처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부사장님께 권해드리고 싶은 약재는…….”

그러면서도 한지호는 유우선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았다.

조준혁과 함께 위천 한방병원의 신화를 만든 장본인, 병원장 유우선.

어쩌면 그가 위천이라는 성벽을 무너트릴 틈새일지 모른다.

조준혁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빨을 드러냈으니 한지호도 상대의 약점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대한민국 한의학계를 놓고 벌어진 싸움의 불길이 예상보다 크게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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