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42화 (142/255)

# 142

8장, 친화(親和) (2)

시간이 꽤 지났다.

쏜살같이 흐른다, 는 말처럼 시간의 속성을 잘 설명한 문구도 없지 싶다.

그야말로 시위를 떠나간 화살처럼 시간은 뒤를 잡히지 않고 세차게 날아갔다.

김금순의 수술이 끝나고, 한지호가 직접 치료를 주도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한 풀 꺾여 있었다.

원래 이슈가 될 만한 사건을 찾아서 빨리 끓었다가 빨리 식는 게 여론의 특징이다.

협진 프로젝트는 세간의 주목을 끌었지만, 거의 모든 과정이 비공개로 진행 됐기에 열렬한 관심이 오래 가지 못했다.

물론 Y대 암센터의 교수들도, 한지호도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모두 알고 있었다.

양한방 협진을 받은 김금순의 예후가 좋아지면 다시 국민적 관심이 쏟아질 것이다.

문제는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결과를 내느냐이다.

한지호는 오늘도 원화 한의원 진료를 끝내자마자 신촌의 Y대 병원으로 달려왔다.

요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한의원 진료를 마치고 있었다.

믿음직스러운 부원장 문재영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긴 예약 대기에 지친 환자들은 부원장 진료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문재영은 성실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환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지호가 홍콩을 다녀오며 문재영에게 하루 동안 한의원을 맡긴 후 부원장 진료를 선택하는 환자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 덕에 한지호는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김금순을 치료하는데 신경을 쓸 수 있게 됐고, 앞으로는 홍콩에 한의원을 여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서 사람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한 손이 열 손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림의 오래 된 격언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혼자서는 천하 통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방천화극과 적토마로 천하를 호령했던 여포 봉선의 최후를 생각해보라.

화타와 규호의 의술을 이어 받은 한지호에게도 충실한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문재영, 그리고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다른 한의원 원장들은 의술이라는 분야에서 그를 도와 줄 소중한 인재들이다.

한의원 네트워크를 만들고, 서로 교류하며 사람을 키우기로 결정한 건 참 잘한 선택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암센터 복도를 걷다보니 문득 조기운이 떠올랐다.

조기운은 한 달 넘게 지방을 떠돌며 위천 한방 병원의 실태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틈틈이 한지호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를 했지만, 얼굴을 못 본지 너무 오래됐다.

오른팔이자 의동생 같은 조기운의 깨끗한 이목구비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유초아와 천사원 사람들, 또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지방에서 고생 중인 조기운까지.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을 살뜰하게 챙겨야겠다는 결심이 새삼 강하게 들었다.

“아.”

어느덧 그의 몸은 김금순의 병실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면 다른 생각을 꺼두고 치료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병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아이고, 선생님!”

한지호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 김금순이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항상 원화 한의원 진료를 마치고 암센터로 오기 때문에 김금순을 보는 시간이 정해져있다.

그렇기에 이맘때쯤 올 거란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지호는 웃으며 김금순과 인사를 나눴다.

2인실이라고 해도 암센터 특수 병실이 워낙 넓기에 옆 환자에게 피해를 줄 염려는 없었다.

“하루 동안 잘 지내셨죠?”

“예, 예. 선생님 덕분에 오늘도 잘 지냈습니더.”

“약은 드시기 어떠세요?”

“쓰기는 엄청 쓴데 꼬박꼬박 잘 묵고 있습니더. 제가 까먹을라치면 간호사가 와서 챙겨 주니까 염려 안 하셔도 됩니더.”

한지호는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협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조기 진단은 한지호 덕에 해냈고, 수술은 유방이 집도했다.

이후의 치료는 역시 한지호가 도맡고 있지만 Y대 암센터 입원 병동에서 김금순의 상태 체크와 전반적인 관리를 책임지는 중이다.

누구 하나도 빠지면 안 되는, 협진이라는 타이틀이 딱 어울리는 과정이다.

“저녁 약도 드셨겠네요?”

“예.”

“그럼 진맥을 하고 나서 침을 놓겠습니다.”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있던 김금순이 팔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병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매일 진맥을 하고 침을 놓는다.

자칫하면 치료가 일상으로 느껴지고, 매너리즘에 빠져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한의사로서 실격인 것이다.

한지호는 마치 김금순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진맥과 항암 치료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쩌면 수많은 한의사들도 진맥으로 암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긴 힘들 거라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지호는 그저 시간이나 때우고 있어 보이기 위해 진맥을 하는 게 아니었다.

맥을 짚으면 인체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환자의 몸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좋은 방향으로 회복되고 있는지, 혹은 급격한 변화로 악영향이 생겼는지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특히 김금순은 수술을 받은지 얼마 안 된 환자다.

수술은 그 자체로 사람의 몸에 커다란 부담을 주는 극단적인 행위다.

성공적으로 종양을 절제했지만, 몸이 받은 데미지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기에 침술과 약재로 치료를 하면서 몸이 잘 회복하고 있는지 체크하는 게 더더욱 중요한 법이다.

두둥- 두둥-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한지호를 안심시켰다.

그는 다른 한의사들처럼 단순히 맥박만 듣고 진단을 내리지 않았다.

환자의 호흡과 목젖의 움직임, 눈으로 보이는 여러 징후들, 후각으로 느껴지는 체취의 변화까지.

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토대로 진단을 내린다.

그렇기에 대학 병원의 정밀 검사 기계로도 잡아내지 못한 병을 먼저 알아차리기도 하는 것이다.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정말이지예?”

“저는 환자분들에게 절대 빈말을 하지 않습니다. 신뢰를 잃으면 치료가 끝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한지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기뻐하면서도 궁금해 하는 김금순에게 차근차근 진맥 결과를 알려줬다.

“맥의 세기가 정상인 수준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면역력도 높아지고 있다고 판단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매일 아프게 침 맞고 쓴 약 묵는 효과가 있는 거네예?”

“그럼요.”

한지호는 오늘 침을 놓고 난 뒤 정밀 검사를 의뢰할 생각이었다.

암센터의 장비와 검사 기술을 이용해 김금순의 상태를 크로스 체크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자신의 판단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를 위해 만전에 만전을 기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침을 놓겠습니다.”

한지호가 침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김금순은 반사적으로 상의를 걷어 올렸다.

어느새 자동으로 반응할 만큼 한의학적 치료에 익숙해진 것이다.

병상 위에 바로 누운 그녀는 상의를 걷었을 뿐 아니라 양 팔도 드러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복부에만 침을 놓았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며 한지호는 침술의 범위를 넓혀갔다.

이제는 종아리와 발바닥, 그리고 양 팔까지 침을 놓고 있었다.

더 많은 혈도를 자극해 체온을 끌어올리며 몸의 면역력과 자생력을 북돋는 침술 치료가 궤도에 올랐다는 뜻이다.

과연 정밀 검사에서 항암과 방사선을 대신할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까.

한지호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침 하나 하나를 놓을 때마다 온 마음을 담았다.

+++

“알고 계시다시피 췌장암 환자의 20% 내외만 수술을 시도할 수 있소. 한 원장님이 아니었으면 김금순 환자는 수술을 받지 못하다가 다른 환자들처럼 3기, 4기가 되어서야 센터에 들어왔을 것이오.”

유방이 모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협진 프로젝트의 담당 교수들이 모인 회의 자리에서 격론이 오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센터장 최규열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다른 교수들도 눈치 보지 않고 주장을 내세웠다.

“알고 있습니다. 한 원장님이 조기 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김기준 교수가 유방의 말을 받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약간 비꼬는 말투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유방과 한지호를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정밀 검사 결과 김금순 환자의 암 수치가 기대만큼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환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수치를 이만큼 낮춘 것도 대단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더 끌다가 항암을 할 타이밍을 놓치면, 그래서 재발이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 교수님은 지금이라도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한 원장님의 한의학 치료를 그만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1차 항암 치료로 젬시타빈(gemcitabine) 정도만 써보자는 것입니다.”

같은 주임 교수라도 유방의 가장 선배다.

그래서 김기준이 말을 높이고 있지만, 의견을 쉽게 철회할 것 같진 않았다.

유방은 심각한 표정으로 김기준의 말을 들었다.

췌장 담도암 센터의 내과 전문의로 오랜 경력을 쌓은 그의 말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한지호를 신뢰하는 입장이지만, 사실 항암 없는 한의학 치료만 하는 게 일반적인 선택은 아니다.

최규열이 없으니 유방 혼자서 두 교수의 파상공세를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래저래 부담스러운 게 당연했다.

분위기가 이전 회의와 다르다는 걸 느낀 박상욱이 김기준의 말을 거들었다.

“당장 방사선 치료까지 시작하거나 엘로티닙(erlotinib), 카페시타빈(capecitabine)을 병합 투여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지금 김금순 환자의 컨디션으로는 플라티눔(platinum)계를 병합해서 써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인 항암, 젬시타빈을 단독으로 쓰는 것 정도로 경과를 지켜보자는 김 교수님 의견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젬시타빈은 췌장암의 1차 항암에 가장 많이 쓰이는 치료제다.

쉽게 말해 항암 치료의 기초에 해당되는 약이다.

박상욱은 방사선을 포함한 다른 약물 치료를 강권하는 것도 아니고, 젬시타빈만 투여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상당히 합리적인 의견이기에 유방의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한지호가 나서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말없이 김기준 교수와 박상욱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가 손을 들었다.

“한 원장님,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이오?”

“물론입니다. 주치의로서.”

한지호는 자신이 주치의라는 걸 강조하며 입을 열었다.

때마다 강조하지 않으면 암센터의 다른 교수들은 한지호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려 들 것 같았다.

그는 일주일 전 회의에서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수치가 나빠진 것도 아니고, 환자의 상태와 멘탈 모두 아주 좋습니다. 한의학 치료는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계획한 방향대로 치료가 되고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래도 젬시타빈 정도는 병행해도 문제가…….”

“제가 납득할 때까지, 혹은 확실한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항암제 투약을 하지 않겠습니다. 센터장님께서도 동의 하신 사안인 줄 압니다.”

한지호는 최규열의 이름을 거론했다.

수치가 전반적으로 완화 됐는데도 김기준과 박상욱이 들썩이고 있다.

만약 조금이라도 상태가 악화되면 둘을 제어하기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김기준과 박상욱이 나쁜 의사라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의 항암 치료 패턴을 따르는 게 그들의 의학적 상식일 뿐이다.

한지호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의술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뿐, 누구는 악당이고 누구는 주인공인 유치한 싸움이 아니다.

한지호는 불안해하는 두 교수를 위해 기한을 못 박았다.

“김금순 환자님은 일주일 뒤로 퇴원 날짜가 잡혔고, 통원 치료를 받게 될 예정입니다. 퇴원 직전에 한 번 더 수치 체크를 해보죠. 그때 결과를 보고 나서 항암제 투여에 대해 다시 논의합시다.”

지금은 자신의 치료 방식을 밀어붙이지만, 여지를 남겨뒀다.

김기준과 박상욱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또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남은 일주일, 김금순의 몸 상태가 완만한 곡선 대신 가파른 직선의 형태로 빠르게 회복 되어야 한다.

누구도 자신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갈팡질팡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인체 친화적인 한의학 치료가 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김금순의 몸이 좋아진 것보다 훨씬 빠르게 자가 치유가 이뤄질 거라고 믿었다.

그는 암센터에서 잔뼈가 굵은 김기준 교수와 박상욱 교수의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을 상상했다.

일주일 뒤, 그 모습을 실제로 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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