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9장, 기적이 아닙니다. (1)
한지호는 오랜만에 부천을 찾았다.
원화 재단이 후원하는 천사원을 방문한 것이다.
합법적으로 마음 놓고 후원하기 위해 원화 재단을 세웠지만, 천사원은 그에게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성공한 청년이 고향을 돕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흔하디 흔하다.
그렇기에 한지호는 천사원을 후원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마리아 수녀가 아니었으면 거리의 버려진 소년으로 자라났을 인생이다.
그는 만만치 않은 액수를 꾸준히 후원하면서도 오히려 천사원의 존재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호야, 너가 오니 아이들이 참 좋아하는구나. 저렇게들 밝게 웃으니 말이야.”
“네, 수녀님. 저도 아이들 보니까 더 자주 오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리네요.”
한지호와 마리아 수녀는 신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어린 민우는 물론이고, 사춘기 청소년으로 훌쩍 큰 민기와 지훈이도 축구공 하나를 갖고 땀을 뻘뻘 흘렸다.
한지호도 방금 전까지 아이들 틈에서 신나게 놀아주다 마리아 수녀 옆에 앉은 것이다.
유초아도 천사원에서 같이 지내고 있지만 대학 강의를 들으러 자리를 비웠다.
가족.
한지호는 천사원에 올 때마다 가족이라는 낯선 단어가 무슨 느낌인지 배우게 됐다.
마리아 수녀와 나란히 앉아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는 이 순간,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요즘은 어떠니? 많이 힘들지?”
“바쁘지만 힘들지는 않아요, 수녀님.”
“뉴스를 보니 암환자를 치료하고 있다면서? 한동안 그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 했단다.”
“네. Y대 암센터의 교수님들과 함께 항암 치료를 한의학 치료로 대체하고 있어요. 그래서 매일 저녁 Y대 병원으로 가느라 천사원에도 자주 못 왔네요.”
“잘은 모르지만 쉽지 않은 일일 거야.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 그렇지만 너의 치료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 많단다.”
“희망… 이요?”
한지호가 눈을 크게 뜨고 마리아 수녀를 쳐다봤다.
마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암환자들과 보호자들이 항암 치료로 힘겨워했니. 만약 지호 네가 하는 한의학 치료의 효과가 입증되면 그 사람들에겐 새로운 길이 하나 더 열리는 거란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지켜볼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렇게 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수녀님 말씀을 들으니 어깨가 더 무거워지네요.”
“너무 부담을 느끼지는 마렴. 대신 건강한 책임감을 느낀다면 좋겠지? 우리 지호는 이제 사회지도층인데 내가 괜한 말을 한 것도 같구나.”
“아니에요, 수녀님. 언제든 꼭 필요한 말씀만 해주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한지호는 진짜 어머니를 대하듯 마리아 수녀를 대했다.
그녀는 한지호가 성공을 했다고 해서 한 번도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원화 재단이 천사원을 후원하고 있지만, 마리아 수녀에게 한지호는 여전히 품 안의 아이인 것이다.
그래서 더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한지호도 마음 편히 마리아 수녀를 만나는 게 가능했다.
‘협진 프로젝트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것…… 잊지 않아야겠다.’
한지호는 단지 김금순 한 사람만 치료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기존의 항암 치료를 견디지 못한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하나라도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 되기를 기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등에 업고 있었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부담스러워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마리아 수녀의 말처럼 건강한 책임감은 좋은 원동력이 된다.
동기부여의 측면에서 강한 자극이 되는 것이다.
“혀엉-!”
“지호 형아!”
그때 한참 놀던 아이들이 축구공을 팽개치고 달려왔다.
땀투성이가 된 세 명의 소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지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 놀았어?”
“응! 나 배고파졌어, 지호 형아.”
막내인 민우가 한지호의 무릎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신나게 뛰어 놀았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한 일이다.
민기와 지훈이도 마찬가지로 허기가 진 것 같았다.
“좋아. 형이 오랜만에 왔으니 맛있는 거 먹어야지.”
“와아아아-! 역시 형아가 최고야!”
“근데 민기, 지훈이.”
한지호는 민우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두 명의 사춘기 소년을 불렀다.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있는 민기와 지훈이가 한지호를 바라봤다.
“너네 공부는 잘 하고 있는 거지? 수녀님 말씀도 잘 듣고?”
“형처럼 되려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민기가 어설프게 존댓말을 썼다.
딴에는 나이를 먹었다고 한참 형인 한지호에게 예전처럼 반말을 하는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한지호는 고개를 돌려 지훈이를 쳐다봤다.
전라도까지 조기운을 내려 보내서 데려온 지훈이기에 더 걱정이 됐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지훈이도 씩씩하게 대답했다.
“공부는 잘 못해도 수녀님 말씀은 잘 들어요!”
“하하하! 그래, 그거면 됐다. 수녀님 속 썩이면 너네들 다 형한테 죽어. 알지?”
한지호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공부는 못 해도 좋다.
아이들이 꼭 자기처럼 한의대나 명문대에 들어가 입신양명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건강하고 바른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할 뿐이다.
어디 가서 고아라서 저렇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떠나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성장하기를 바랄 따름인 것이다.
그렇기에 공부는 못 해도 수녀님 말씀은 잘 듣는다는 지훈이의 말이 더없이 반가웠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한우 먹어야지. 형이 오는 날은? 무조건 한우 먹는 날이야.”
한지호는 무릎에 앉은 민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아 수녀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들과 한지호의 일상적인 대화가 그녀를 기쁘게 했다.
이런 평범한 행복을 다시 찾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겪었다.
그렇기에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상실은 감사의 전제 조건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소중함을 체감하기 힘든 법이다.
한지호는 어렵게 회복한 따뜻하고 푸근한 고향을 다시는 잃지 않을 생각이었다.
천사원 아이들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한지호는 마음속에서 건강한 책임감이 무럭무럭 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김금순이 퇴원하기로 예정 되어 있다.
정밀 검사 결과 수치에 문제가 없다면 김금순은 통원 치료를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녀의 퇴원 예정일은 극비사항이었다.
소식이 알려지면 취재진이 암센터 앞에 장사진을 칠지 모른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 취재진과의 접촉은 자제하는 게 낫다.
김금순 환자의 스케줄은 암센터 내부에서도 소수의 의료진만 알고 있다.
지속적으로 회의에 참여하는 센터장 최규열과 유방, 김기준과 박상욱이 전부다.
협진 프로젝트의 주치의인 한지호도 퇴원 예정일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인원에 포함 돼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그는 원화 한의원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부원장 문재영에게 진료를 맡겼다.
홍콩이나 외국으로 출장을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오늘이 중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김금순은 오전부터 정밀 검사를 받을 예정이다.
검사 결과에 따라 한지호가 계속해서 협진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잡을지가 정해진다.
김기준, 박상욱이 걱정했던 것처럼 김금순 환자의 여러 수치가 불안정하면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다.
방사선은 몰라도 1차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는 두 교수의 주장을 거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부르르릉-
한지호는 설렘과 떨림을 느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새하얀 벤틀리가 환한 라이트를 쏘아내며 달려 나갈 준비를 마쳤다.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했지. 마음을 비우자, 비워.”
한지호는 운전석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곧이어 마음을 다잡은 그가 엑셀을 밟았다.
신사동 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하얀 벤틀리가 강남을 가로질렀다.
예전에 영화배우 김해수로부터 아우디 A5를 선물 받았을 때는 마냥 신이 났었다.
고아에 빈털이었던 자신이 외제차, 그것도 고급 스포츠카를 운전한다는 게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무려 3억 원에 달하는 벤틀리 컨티넨탈을 몰고 다니지만 특별히 감격스럽진 않았다.
이제는 예전과 사는 세계가 달라졌고, 자신의 위치에서 누리는 것들을 당연히 여기게 된 것이다.
거만해졌다거나 감사함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것들과는 조금 다른, 그저 쓸데없이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됐다는 게 더 정확하다.
부와아아앙-!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막히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일찍 나온 덕분에 강북으로 넘어가는 것도 수월했다.
한지호는 버튼을 눌러 음악을 틀었다.
쭉쭉 뚫린 길, 이른 아침의 햇살과 공기, 차 안에 은은하게 깔리는 음악.
이보다 좋은 출근길을 상상하기 힘들다.
한지호는 잠시라도 긴장을 풀었다.
Y대 암센터에서 어떤 결과를 받아들이게 될지, 미리부터 고민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2주간의 한의학 치료는 기존의 항암 치료 못지않은 효과를 보리라 확신했다.
나머지는 하늘의 몫이다.
전전긍긍 집착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안 되고, 안 될 일이 되지는 않는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
한지호는 익숙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신촌으로 질주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하지만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운전석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며 특별한 아침을 열고 있었다.
몇 곡의 노래를 따라하며 달리다보니 어느새 눈앞에 Y대 병원이 보였다.
한지호는 암센터 전용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매일 방문하는 곳이기에 지리가 눈에 훤히 익은지 오래다.
요즘은 마치 Y대 병원에서 일하는 전문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띵동!
엘리베이터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한지호는 암센터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김금순이 입원해있는 병동으로 올라갔다.
아직 검사를 받기 전일 터.
다른 교수들이나 센터장을 만나 인사를 하기 전에 환자부터 안심시키는 게 주치의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저벅저벅.
넓찍한 암센터 병동 복도를 걸어가니 지나가는 간호사 몇 명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매일 같이 병동에 들리는 한지호의 얼굴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이 아니라 다른 의료진과 교수들도 한지호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에서 양한방 협진 프로젝트를 떠들썩하게 보도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유방 교수가 김기준, 박상욱을 제외한 다른 의료진은 한지호에게 의식적으로 거리를 뒀다.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의사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갑자기 암센터의 돌풍이 되어 버린 한의사를 경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물론 한지호는 암센터 내부의 묘한 공기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초점은 오직 김금순 환자에게만 고정 돼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보호자분도 일찍 나오셨네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들어선 병실 안에는 김금순의 아들이 서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아침부터 어머니를 찾아온 것이다.
“네, 선생님. 퇴원 하실 수도 있다고 해서 휴가를 냈습니다.”
김금순의 아들은 한지호보다 대여섯 살은 많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한지호가 아니었으면 어머니의 췌장암을 일찍 발견하지 못했을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고, 선생님. 일찍부터 오셨네예.”
곧이어 김금순이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의 안색이 한 결 좋아 보였다.
어제 저녁에도 진료를 했지만, 퇴원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스윽-
김금순의 아들이 자리를 비켜줬다.
한지호가 병상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공간을 내준 것이다.
“김금순 환자님, 오늘 오전 내내 정밀 검사를 받고 결과가 좋으면 오후에 퇴원이 결정 될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더 입원을 할 수도 있으니 그러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예, 예. 집에 가고 싶지만 그래도 병원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예.”
“검사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맥 한 번만 더 해보겠습니다.”
한지호가 자연스레 김금순의 옷소매를 걷고 팔을 잡았다.
아침의 맑은 기운을 받아 진맥도 평소보다 더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둥- 두둥-
김금순의 맥박이 뛰는 소리가 속이 빈 북 소리처럼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지호는 손가락 끝에서 감지되는 맥박의 리듬을 느끼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눈을 뜬 그가 김금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좀 어떻습니까예?”
“오늘은 아마 김금순 환자님의 인생에서 잊기 힘든 날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