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5장, 쐐기를 박다 (1)
윤리위원회에서 한지호가 역공을 가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장식했던 뉴스 헤드라인도 뒤바뀌었다.
- 한의학계 내부의 권력 싸움. 젊은 한의사를 죽이려는 기득권의 음모인가? -
- 건강 백서의 한지호 원장, 다시 부당한 압력에 맞서 싸우다! -
불과 며칠 전까지 카지노의 의료 자문을 맡았다는 사실로 한지호를 공격했던 기자들이 태도를 바꿨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하이에나처럼 흥행이 될 것 같은 이슈를 찾아다닌다.
백수오 사건에 이어 한지호가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모양새를 갖추자 열심히 기사를 쓰기 바빴다.
어차피 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높은 조회수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그런 언론의 속성을 잘 이해했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언론을 이용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한의사 협회 윤리위원회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기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이 바로 박우식이다.
사무장을 통해 정보를 흘려서 기사가 나가도록 소스를 준 것이다.
윤리위원회 이후 여론이 양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돈 때문에 카지노까지 가서 의료 자문을 하냐는 악의적 댓글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한지호의 입장 전문이 공개되고, 그가 한의학계의 권력자인 김영찬 교수와 맞서 싸우는 상황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역전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득권의 부정부패, 그리고 갑질에 무척 민감하다.
사람들이 보기에 김영찬 교수가 한의원 원장들에게 약재 구입을 강요한 것은 기득권의 갑질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그러한 갑질에 맞서 싸우다가 억울하게 카지노 의료 자문으로 윤리위원회에 회부 된 것처럼 보였다.
냄비를 닮은 인터넷 여론은 뜨겁게 끓었다.
가짜 백수오 파동으로 한지호는 이미 국민적인 여론을 등에 업은 전력이 있다.
카지노 의료 자문을 맡은 게 의심스러워도 한지호에게 여론이 우호적으로 쏠리는 게 당연했다.
해명문도 논리적이었지만, 그보다 기득권과 싸운다는 이미지가 먹혔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영찬 교수에 대한 비난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악플과 성토는 대부분 김영찬 교수의 몫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한의학계 기득권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한지호가 의도한 결과였고, 이를 되돌리긴 힘들어 보였다.
K대 한의학과 차원에서 성명문을 내고 김영찬 교수를 옹호했지만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대학 교수라는 직업은 딱 봐도 기득권으로 보인다.
비난을 받는 상황에서 대학이 직접 나서서 쉴드를 치려는 수작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지호는 여론의 흐름을 지켜보며 충실하게 일상을 영위했다.
매일 진료를 하고, 수요일마다 계속되는 방송 촬영도 빼먹지 않았다.
블랙문 카지노에는 굳이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마창우가 2주에 한 번씩 주요 투자자들에게 성실히 경영 안내문을 메일로 보내주기 때문이다.
의료 자문이라는 이름만 걸어놨을 뿐, 카지노의 운영에 골치 아프게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대신 블랙문 카지노에서 도박 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실행하게 되면 의료 자문으로서 역할을 다할 예정이었다.
“저기, 한 원장님?”
그때 익숙하지 않은 남자의 음성이 한지호의 상념을 깨웠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한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여기 인수 확인서에 사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사인을 했다.
그는 지금 대치동의 수입차 전시장 VIP 룸에 앉아있었다.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은 남자는 수입차 브랜드의 영업 과장이다.
2대8 가르마가 눈에 띄는 영업 과장이 한지호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고생이라니요. 최대한 본사를 독촉했지만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기다리신 만큼 만족하실 거라고 자신합니다.”
“예약이 밀려있는데 특별히 빼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과장님.”
드디어 예전에 계약을 해놓은 자동차를 받는 날이었다.
한지호는 여배우 김해수에게 선물 받은 아우디 A5를 조기운에게 줬다.
그러면서 새로운 자동차를 계약했는데 이제야 인수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고가의 수입차는 우리나라에 소량만 배정된다.
그에 반해 계약을 하고 차를 원하는 사람들은 줄을 서있다.
본사의 물량 배정 여부에 따라서 1년 넘게 대기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스스슥-
인수확인서에 서명을 한 한지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기운이한테 귀찮은 부탁 할 일은 없겠네.”
차를 넘긴 그는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조기운을 불렀었다.
조기운은 전속 기사처럼 한지호의 발이 되어 움직였다.
원래 그런 일을 하는 사이이고, 6천만 원 가량의 A5를 선물했으니 조기운이 불만을 품을 리도 없다.
다만 한지호가 매번 불편했을 따름이다.
요즘 들어 이지은과 데이트를 할 때도 그녀의 차를 이용했다.
크게 상관은 없지만 남자가 매번 7살이나 어린 여자친구의 차를 타고 데이트를 한다는 게 신경은 쓰였었다.
한지호도 약간은 보수적인 관념을 가진 한국 남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부터는 한결 편해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차를 인수하고 곧장 이지은부터 만나기로 약속을 해 놓았다.
“한 원장님, 앞으로 혹시 고장이 나거나 차와 관련해서 무슨 일이든 필요하실 때 제게 전화를 주십시오. 차만 팔고 끝인 딜러들과 달리 끝까지 최우선적으로 모시겠습니다.”
인수확인서를 챙긴 영업과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른 수입차 딜러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걸 강조하며 믿음을 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한지호는 거물급 고객이다.
흔히 독일 3사로 불리는 벤츠나 BMW, 아우디가 아닌 한 등급 위의 차를 구매했다는 것부터 남달랐다.
게다가 TV에 출연하는 유명한 의사들은 보통 병원 명의로 차를 자주 바꾼다.
영업 과장이 보기에 한지호도 차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를 팔아줄 수 있는 소중한 고객인 것이다.
한지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잘 하겠다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할 것인가.
이미 키를 받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제가 원장님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습니다. 항상 안전운전 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몸 안 좋으시면 한의원 찾아오세요.”
덕담을 주고받은 한지호가 VIP 룸 밖으로 나왔다.
차가 멀쩡하게 도착했는지는 인수확인서를 쓰기 전에 꼼꼼히 살펴봤다.
전시장을 가로질러 문을 열고 나설 때까지 영업 과장이 뒤따라왔다.
아마 차를 몰고 가는 것을 보면서 인사를 할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전시장 밖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차를 말없이 쳐다봤다.
아까도 봤지만 아직까지 감동이 남아있었다.
원화 한의원을 통해 얻는 수익이 기대 이상이기에, 또 굵직한 사업을 추진하려면 함께 어울릴 사람들과 클래스를 맞춰야 하기에 욕심을 냈다.
사실 좋은 차를 타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도 없지 않았다.
욕망은 나쁜 게 아니다.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겠는가.
한지호는 자동차 키를 만지작거렸다.
날개 모양과 그 중심에 있는 대문자 B가 손끝에 생생히 느껴졌다.
영국 럭셔리 카의 자존심, 벤틀리(Bentley).
한지호는 귀족들의 차로 명성이 자자한 벤틀리 컨티넨탈을 구매한 것이다.
옵션을 포함한 차량 가격은 3억 원.
한의원의 법인세가 절세되는 효과가 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액수의 차량이다.
예전에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아들들 또는 쳐다보기도 힘든 회장님들이나 타는 차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0원 한 장 물려받은 게 없는 한지호는 고작 서른 살에 자기 힘으로 벤틀리를 샀다.
묘하게 감격적인 기분이 들었다.
철컥!
운전석을 열고 닫는 느낌이 묵직했다.
한지호가 운전석에서 시동을 걸자 따라온 영업 과장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인사를 받으며 새로운 애마를 몰고 도로로 나온 한지호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수입차의 격전지인 강남에서는 벤틀리를 비롯해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도 왠지 인도를 걷는 사람들이 갓 나온 따끈따끈한 벤틀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오너가 젊다는 걸 과시하려는 듯 새하얀 색깔의 벤틀리가 강남대로에서 존재감을 발산하며 위풍당당하게 달려갔다.
벤틀리를 타고 다른 사람도 아닌 국민 여동생 이지은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길.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한 상황이다.
한지호는 꿈이 아닌 현실을 온전히 즐겼다.
조만간 김영찬의 부당한 압력 행사를 심사하는 윤리위원회가 다시 열린다.
여러 소식들이 복합적으로 그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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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에 대한 심사 결과, 윤리위원회는 안건을 기각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한 한의사 협회의 윤리위원장이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협회 대회의실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한의사들은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한지호의 반론이 완벽했고, 여론도 기울었다.
이 시점에서 무리하게 징계를 내렸다간 한의사 협회 전체가 국민적인 욕을 들어먹을 것이다.
기각 판정을 받은 한지호와 박우식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너무 들떠하지도 않았다.
예견된 승리였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한지호가 기습적으로 제기한 김영찬 교수의 안건이 상정 됐고, 심사를 위해 양 측의 입장을 듣는 순서가 남았다.
지난 회의에서 고발 이유를 충분히 설명했던 한지호는 다시 단상 중앙으로 나섰다.
절차를 위해서, 그리고 더 확실한 증거를 내세우기 위해서다.
단상에 선 그는 맞은편 자리를 쳐다봤다.
원래라면 김영찬 교수가 앉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윤리위원회 회의에 불참했다.
일종의 시위를 하는 셈이다.
자신이 윤리위원회에 제소됐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불리한 현장에 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지호는 김영찬 대신 참석한 낯선 얼굴의 변호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주신 윤리위원회에 감사를 표합니다. 제자로서 교수님을 제소하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만, 한의학계의 악습 철폐와 사회적인 신뢰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13분의 원장님들이 부당한 압력을 받아 특정 업체의 약재를 대량으로 구매했습니다. 모두 K대 출신인 13분의 성함과 소속, 약재 구매 내역, 김영찬 교수님과의 통화 내역을 정리해서 위원회에 드렸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한의원 운영과 상관없는 약재를 대량으로 구매한 점, 해당 업체에 김영찬 교수님의 처남이 근무하고 있는 점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더 알려드릴 내역이 있습니다.”
한지호가 잠시 뜸을 들였다.
방금까지는 지난 회의에서 폭탄 선언을 하며 알렸던 내용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알릴 게 있다는 말에 협회 임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또 무슨 폭탄을 터트릴지 다들 긴장한 눈치였다.
한지호는 여유롭게 호흡을 조절하며 발표를 계속했다.
“지난 1주일 동안 김영찬 교수님이 13분의 원장님들께 지속적으로 협박과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시달림에 지친 몇 분이 통화 내용을 녹음하셨습니다. 그 녹음 파일과 대화 내용을 윤리위원회에 추가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결정타였다.
말이 끝나는 순간 김영찬 교수의 대리인으로 나온 변호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이다.
김영찬은 이제껏 협박과 회유로 안 되는 일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자신만만했을 터였다.
하지만 한지호는 김영찬을 무너트리며 한의학계 내부에 새로운 세력을 만들려고 작정했다.
그 뜻에 힘을 실어준 13명의 원장들도 강압적인 회유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칼을 뽑았기에 뭐라도 베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들 잘 아는 것이다.
“들끓는 여론과 국민들의 질타를 불식시킬 수 있는 윤리위원회의 상식적인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한지호는 발언을 마치며 여론을 강조했다.
국민들이 한의학계 내부의 파워 게임을 주시하고 있다.
추가 증거까지 나온 마당에 협회가 김영찬을 편들면 기득권 갑질을 비판하는 여론은 한층 더 뜨거워질 것이다.
한지호는 김영찬에게도, 협회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외통수를 내민 셈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한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김영찬의 변호사를 바라봤다.
변호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단상 중앙으로 나왔다.
상황이 완전히 기울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한지호는 속으로 환호성을 삼키고 있었다.
이로서 로열 패밀리인 김영찬 교수의 심장부에 쐐기를 박았다.
단순히 그에게 복수를 한 것만이 아니다.
K대 출신의 젊은 한의사들이 한지호를 중심으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한의학계 내부의 파워 게임을 위해서도, 앞으로 전개해나갈 원화 한의원 확장 사업을 위해서도 전기(轉機)가 되는 사건이었다.
변호사의 반론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한지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