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13화 (113/255)

# 113

4장, 의전(醫戰) (2)

“안건을 제소한 K대 김영찬 교수님의 변론을 들어보겠습니다.”

윤리위원장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넓은 회의실 안에는 협회장을 비롯해 윤리위원장과 윤리위원들, 그밖에도 협회에서 한 자리씩 차지한 나이 지긋한 한의사들이 모여 있었다.

분위기는 법정을 연상시켰다.

협회장과 윤리위원장이 판사인 것 같았고, 나머지 위원들이 배심원처럼 보였다.

김영찬은 한지호를 고소한 검찰이고, 한지호와 박우식은 피의자이자 변호인 신분으로 참석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한의사들에게는 협회 윤리위원회가 법정보다 더 무서울지 모른다.

현실의 실정법과는 관련이 없지만 이 바닥만의 법이 살아있는 그들만의 리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밉보이면 한국에서 평탄하게 한의사로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연륜과 경험이 충분한 박우식조차 긴장하는 게 이해가 됐다.

그에 반해 한지호는 느긋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김영찬이 제소의 변을 말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을 때 눈빛이 날카로워졌을 뿐, 위축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먼저 귀중한 시간을 내서 모여주신 협회장님과 윤리위원장님, 그리고 협회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립니다.”

발표를 위해 걸어 나온 김영찬이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지호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완전히 다른 말투였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겸손한 태도가 한지호의 신경을 긁었다.

그는 한지호와 박우식이 앉아있는 쪽을 살짝 흘겨보더니 변론을 시작했다.

“본 안건의 당사자인 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은 사적으로 저의 제자입니다. 그렇기에 스승으로서 제자의 치부를 언급한다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잘못된 길을 가는 제자를 바로잡는 게 스승의 역할이라 생각하며 윤리위원회에 안건을 제소하게 됐습니다.”

가식적인 말이었다.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있던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흥분하지 말자. 김영찬의 페이스에 넘어갈 필요 없어.’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힘을 풀었다.

흥분하는 쪽이 지는 싸움이다.

한지호는 이미 많은 준비를 해왔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김영찬과의 전쟁을 망칠 수 없는 노릇이다.

마음과 호흡을 다스린 한지호가 가만히 앉아 김영찬을 쳐다봤다.

김영찬은 분위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주저 없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지호 원장은 영종도 블랙문 카지노의 의료 자문 역할을 맡았습니다. 블랙문 카지노는 정선에 이어 국내 두 번째 내국인 카지노입니다. 카지노로 인해 수많은 도박 중독자들과 가정 파탄자들이 양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TV 출연 등으로 인지도를 얻은 한의사가 의료 자문을 맡았다는 것은 한의사회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입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협회 윤리위원회 차원에서 징계를 내려주신다면 저희 K대 한의학과에서도 자체적으로 조치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촉구하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한의사회의 기강 확립과 윤리적인 이미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찬은 매우 공손하고 조리있는 말투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미리 원고를 쓰고 준비를 꼼꼼히 한 게 분명했다.

한지호와 대화를 나눌 때 보여주던 거만하고 위압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아마 윤리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친분이 있는 협회의 주요 임원들과 말을 맞춰 놓았을 것이다.

김영찬의 가족이 괜히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라 불리는 게 아니다.

한국 한의대의 최고봉인 K대 전임 학과장이 김영찬의 아버지이고, 삼촌부터 조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의학계에서 날리는 인물들이다.

어찌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의술보다 인맥이 중요한 협회 안에서의 싸움에서는 김영찬이 골리앗이었다.

짧고 굵은 발언을 마친 김영찬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협회라서 말투와 태도는 공손할 지언정 눈빛에 담긴 거만함은 여전했다.

반대편에 앉아있는 한지호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오만함이 일렁거렸다.

한지호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거만한 표정을 언제까지 지을 수 있을지 두고보겠다는 뜻이었다.

김영찬이 자리로 돌아가자 윤리위원장이 한지호를 호명했다.

“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님. 본 안건에 대한 반론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가볍게 대답한 한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우식은 불안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한지호를 바라봤다.

그는 며칠 밤을 새며 최선의 대답을 준비해 놓았다.

사업을 하던 때의 경력을 살려 협회 임원들의 마음을 돌릴만한 원고를 작성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협회장이나 윤리위원장 모두 김영찬과 가까운 사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셈이었다.

한지호의 태도가 자신만만한 걸 보면 비장의 카드를 준비한 모양이지만, 완벽하게 불리한 싸움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박우식은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한지호의 뒷모습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원장님, 이 압박감을 이겨내실 거라 믿습니다.’

사무장의 간절한 바람이 통한 것일까.

단상 중앙에 선 한지호는 긴장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협회와 윤리위원회 앞에 서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한지호의 첫 멘트를 들은 박우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작성해준 원고대로 한지호가 스스로를 낮추며 말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괜히 자존심을 못 이겨 건방진 태도를 보이면 더욱 불리한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다.

한지호는 자신을 잘 컨트롤하고 있었다.

박우식은 손에 땀을 쥐고 그를 지켜봤다.

“김영찬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블랙문 카지노의 의료 자문 직책을 맡게 됐습니다. 그러나 카지노의 의료 자문을 맡은 것이 어째서 한의사의 명예를 실추시키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종도의 블랙문 카지노는 정부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시설입니다. 불법적인 도박 시설과 합법적인 카지노는 엄격히 구분 되어야 합니다. 정부가 인정한 합법 시절의 의료 자문이 문제가 된다면 대한 한의사 협회가 정부의 방침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협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낯빛이 변했다.

한지호의 말이 지당하기 때문이다.

블랙문 카지노는 불법 사설 도박 업체가 아니다.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은 시설이고, 국내 두 번째 내국인 카지노이기에 인천시와 정부가 공을 들여 키우고 있는 관광 업장이다.

그곳의 의료 자문을 맡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내리면 인천시와 정부의 방침에 반발하는 것으로 보여 질 여지가 충분하다.

공공기관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필수인 협회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한지호는 실리적인 이유를 내세워 협회 윤리위원회 임원들의 기선을 제압한 셈이었다.

공손한 말투와 깍듯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뼈 있는 말로 협회 전체를 압박한 것이다.

원고를 작성해준 박우식도 한지호의 정중하면서 당당한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한지호는 협회 임원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물론 법적인 문제를 떠나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찬 교수님께서도 그런 점을 우려하셨겠지요. 하지만 윤리적으로도 카지노, 특히 내국인 카지노에는 의료 자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영찬 교수님 말씀처럼 카지노에는 도박 중독에 걸린 환자들이 많이 몰려듭니다. 한의사로서 심각한 중독 환자들을 상담하고 치료하여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기 위해 의료 자문 직책을 수락한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TV에 자주 나오며 이름을 알린 제가 책임감을 가지고 카지노의 의료 자문을 맡은 걸 잘 설명하면 사회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저는 원화 재단을 만들어 고아원을 후원하고 있고, 매 달 의료 봉사 개념으로 지역민과 노인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제 행동이 한의사회의 윤리와 동 떨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논리정연한 말이었다.

여기까지가 박우식이 작성해준 원고다.

윤리위원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김영찬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한의사 협회장도 설득을 당한 얼굴이었다.

나머지 위원들의 분위기도 한지호 쪽으로 돌아섰다.

처음부터 김영찬은 노이즈를 일으키기 위해 제소를 한 것이다.

실제로 징계가 내려질 확률이 높지 않다는 걸 알고도 한지호의 이름에 어떻게든 먹칠을 하려던 계산이었다.

한지호의 변론이 끝나자 김영찬은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직까지 그가 잃은 것은 없다.

애꿎은 한지호만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만약 징계를 받지 않게 되고, 반론 기사를 내보내도 그동안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유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완벽에 가까운 반론으로 불을 껐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할 것 같았다.

심사 결과가 나와야 알지만, 분위기로 보아 윤리위원회에서 무리하게 징계를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변론을 마치셨으면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윤리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박우식의 옆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이 더 남은 듯 협회 사람들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해당 안건에 대한 변론과 별개로 이 자리를 빌려 윤리위원회 위원분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한지호의 발언에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김영찬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누가 나서서 한지호를 제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미 빈틈없는 변론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은 한지호는 물 흐르듯 페이스를 주도했다.

“K대 한의학과 김영찬 교수님을 윤리위원회에 제소합니다. 김영찬 교수님은 K대 출신 제자들의 한의원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여 특정 약재를 대량으로 구매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압력을 받아 약재를 구매한 원장님 13분의 서명을 대신 받아왔습니다. 약재 구매 내역과 통화 기록까지 모두 정리해왔습니다. 윤리위원회에서 이 안건을 정식으로 다뤄 더 이상의 피해가 나오지 않도록 시정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벼락이 떨어진 듯 어색한 적막과 고요가 커다란 회의실을 휩쓸었다.

한지호는 수면 아래에서 김영찬을 묻어버린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부당한 압력을 받은 한의사들이 감히 김영찬에게 대들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 백서, 진짜! 가짜!>에서 활약하는 국민 한의사 한지호가 총대를 메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지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김영찬의 권위를 무너트리겠다고 약속했다.

K대 출신의 원장 13명이 한지호에게 힘을 실어줬고,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협회에서도 안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외통수다.

김영찬은 자신이 만든 무대에서 거꾸로 저격을 당했다.

그가 평정심을 잃고 본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 건방진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헛소리를-!”

침묵을 깨고 튀어나온 김영찬의 외침은 그리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가 이빨을 드러내봤자 고양이의 비웃음을 살 뿐이다.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김영찬을 똑바로 마주봤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도 은사를 제소하게 되어 마음이 아프지만 이게 다 한의사회의 명예를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한지호, 출신도 없는 고아 새끼가……!”

김영찬이 기어코 막말을 내뱉었다.

순간 한지호의 온몸에서 얼음장처럼 싸늘한 냉기가 뿜어졌다.

김영찬과 그 주위 공간을 집어삼킨 기운은 살기라도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다.

“협회의 윤리위원회입니다. 말씀을 삼가시지요.”

한지호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같이 막말로 대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금희의 내공으로 공기를 짓누른 채 내뱉은 문장이 칼날처럼 김영찬의 가슴에 꽂혔다.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그때 잠시 넋이 나가있던 협회장이 사태를 수습했다.

“김 교수, 말이 너무 지나쳤네. 한 원장, 자네도 그만하지.”

한지호는 그제야 화살처럼 쏘았던 기운을 거두고 협회장을 쳐다봤다.

“협회장님, 제가 제소한 안건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까?”

“13명의 원장들이 서명을 했고 증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으니…… 윤리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다룰 수밖에 없지 않나. 다음 회의에서 안건으로 다루고 심사를 하겠네.”

김영찬 가족과 친하게 지내는 협회장으로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한지호가 들고 나온 외통수를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김영찬은 분노와 당혹감, 그리고 한지호의 살기에 억눌린 무력감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더 이상 난장판이 되기 전에 협회장이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했다.

“오늘 열린 윤리위원회 회의는 이것으로 종료하겠소. 양 측의 소명과 변론을 들었으니 심사를 거쳐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다음 회의에서는 한지호 원장이 제소한 안건을 다루겠소이다. 크흐음.”

한지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판을 뒤집는데 성공했다.

그와 박우식의 눈이 마주쳤다.

사무장 박우식은 예상을 뛰어넘는 한지호의 역공에 감탄한 듯 멍하게 웃고 있었다.

한지호는 박우식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기세를 올려 김영찬을 한의학계의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일만 남았다.

더불어 한지호를 주축으로 젊은 한의원 원장들의 신흥 세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미 팔부능선을 넘긴 게임이다.

‘살 한 점을 내주고, 가장 맛있는 뼈를 취했지.’

미소를 짓는 한지호의 얼굴에서 삼국시대를 수놓았던 책사(策士)들의 모습이 엿보였다.

한의사들의 전쟁에서 최후에 웃는 자는 한지호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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