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5장, 쐐기를 박다 (2)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여의도 콘래드 호텔의 프라이빗 라운지에 14명의 남자들이 모였다.
무려 14명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공간이 비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가장 큰 방을 빌렸기 때문이다.
다른 호텔도 아닌 콘래드의 프라이빗 라운지는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지호처럼 유명하고, 젊고, 돈까지 잘 버는, 그야말로 부족한 게 없는 인물은 비밀스러운 회원 카드를 발급 받는 게 어렵지 않았다.
사실 이곳은 야당의 거물 국회의원 민시헌에게서 청탁을 받았던 장소다.
그러나 어떻게 이 장소를 알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은밀한 모임을 가지기에 서울에서 이보다 더 적합한 공간을 찾기 힘들다.
한지호는 김영찬 교수를 찍어내는데 힘을 실어준 13명의 한의원 원장들과 함께 축배를 들고 있었다.
“새로운 바람을 위하여!”
“위하여-!”
한지호의 건배 제의에 맞춰 13명의 원장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손에는 투명하게 빛나는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달콤한 샴페인을 한 모금씩 넘기자 넓은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13명의 원장들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여기 모인 13명은 모두 젊은 원장들이다.
마흔을 넘긴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30대 중후반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한지호는 막내일 수밖에 없다.
사적으로는 K대 한의학과의 후배인 셈이다.
그런데 막내인 한지호가 사고를 쳤다.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김영찬 교수의 권위를 절벽 밑으로 걷어 차버린 것이다.
게다가 한지호처럼 유명한 한의사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자연스레 한지호가 이 모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됐고, 다른 13명도 위화감 없이 그를 인정했다.
애초에 13명의 원장들은 한지호가 총대를 메고 나서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김영찬의 압력을 받았을 처지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김 교수가 이렇게 한 방에 가다니! 국민적 여론 때문에라도 협회에서 징계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게 다 한 원장님 덕분이죠.”
“그러게. 우리 한 원장이 한의학계의 거물 하나를 밀어냈어. 썩은 거물 하나를!”
젊은 원장들이 신이 나서 한지호를 치켜세웠다.
그들 모두 K대에서 김영찬에게 배운 제자들이다.
그렇지만 평소 김영찬의 거만하고 차별적인 태도에 쌓인 게 많았다.
뿐만 아니라 강제로 약재를 구입하게 만들었으니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김영찬의 몰락은 이들에게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시원함을 선사해줬다.
한지호는 호들갑스럽지 않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윤리위원회의 심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힘을 모아주셔서 이만큼 싸울 수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무슨 그런 겸양의 말씀을! 한 원장이 일일이 나서서 우리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용기를 내지 못 했겠지. 그만큼 김영찬 교수의 존재감이 크지 않아?”
서른아홉 살, 모임의 멤버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인 최 원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지만, 김영찬은 13명의 원장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오죽하면 자기 한의원을 가진 원장들이 약재를 강매 당하고 있었겠는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단지 김영찬이 K대 한의학과의 유력한 교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임 학과장이었고, 직계 친척 대부분은 대형 한의원을 운영하는 이 바닥 큰손들이다.
특히 국내 최고 브랜드인 위천 한방병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려졌다.
사람들이 로열 패밀리라는 낯 뜨거운 말을 쓰는 것도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김영찬의 가족들에게 밉보이면 좁은 한의학계에서 살아남아 목소리를 내기 힘겨워진다.
특별히 가족들이 나서지 않아도 무형의 위세가 어마어마한 법이다.
그러나 한지호가 외통수를 치고 들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지호는 국민 여론이라는 무기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미 여론이 불처럼 번진 뒤에는 제 아무리 로열 패밀리라고 해도 손 쓸 방법이 없다.
전직 대통령의 가족도 감옥에 가는 세상이다.
김영찬을 구하려 무리수를 뒀다간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걸 똑똑한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한지호는 협회 윤리위원회가 김영찬에게 징계를 내릴 거라고 확신했다.
윤리위원회의 심사 결과가 나오면 K대 한의학과에서도 몇 개월 감봉 또는 정직 수준의 징계를 내릴 것 같았다.
한의사 자격을 박탈하거나 교수 자리에서 쫓아내진 않을 것이다.
사실 협회나 K대 모두 여론에 등 떠밀려 마지못해 징계를 내리는 꼴이다.
김영찬은 시간이 흐르면 멀쩡하게 대학으로 복귀해 또 아이들을 가르치겠지만,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앞으로 김영찬이 예전처럼 한의학계 구석구석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영찬은 누구보다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다.
한지호는 이번 사건을 통해 김영찬에게서 가장 소중한 부분을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를 한의사 사회에서 발언권이 없는 식물인간으로 만든 셈이기 때문이다.
꿀꺽-
한지호가 다시 샴페인 한 모금을 마셨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샴페인이 오늘따라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냥 웃고 떠들기만 할 일은 아니다.
축배를 들기 위한 모임이지만, 동시에 미래를 함께 의논해야 한다.
샴페인 잔을 내려놓은 한지호는 안색을 바꾸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함께 건넜습니다. 김영찬 교수는 순리대로 처리가 될 것입니다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
한지호의 말에 분위기가 살짝 어두워졌다.
다들 굳이 드러내서 표현은 하지 않아도 다가올 앞날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김영찬이라는 대어를 잡았지만, 그는 거대한 기득권 카르텔의 일각에 불과하다.
혹여 김영찬이 속한 로열 패밀리가 앙심을 품고 나중에라도 복수의 칼날을 휘두른다면 누구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복수하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약재상들에게 따로 말을 해서 최상급의 약재를 공급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좋은 약재를 구하지 못하면 약의 효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약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게 된 환자들이 먼저 떠나갈 것이다.
또 한의학계의 중요 학회나 세미나에 초청받지 못하게 만들어 고립시키는 방법도 있다.
이른바 왕따를 시키는 것이다.
그리 되면 시대의 변화나 민감한 보건부 정책 정보에 뒤쳐질 뿐 아니라 원장들의 멘탈이 나가기 쉽다.
기득권이 작정하고 복수를 하면 상상을 초월한 방법들이 동원된다.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나오나 싶을 만큼 온갖 꼼수들로 훼방을 놓는다.
승전 소식에 흥겨워하던 13명의 원장들도 다가올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일부러 미래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분위기를 다운 시키려고 말을 꺼낸 게 아닙니다.”
한지호가 다시 웃음기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자리에서 일부러 어려운 화제를 제시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 깊이 묻어뒀던, 그리고 김영찬을 치기로 작정했을 때부터 구상했던 계획을 터놓기 시작했다.
“김영찬 교수를 몰아내는데 힘을 합친 우리 14명의 명단은 이미 그쪽에 넘어갔을 겁니다.”
여기서 그쪽이라 함은 김영찬을 필두로 한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 카르텔을 뜻한다.
한지호가 말을 시작하자 원장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집중했다.
한지호 역시 말이 새어나갈 염려가 전혀 없는 프라이빗 라운지임에도 자연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김영찬 교수의 아버지, 김성백 전임 학과장은 한의학계의 원로이자 최고 거물입니다. 더 중요한 건 위천 한방병원의 병원장과 이사장도 김영찬 교수의 외가 쪽 친척이라고 들었습니다.”
모두 아는 정보지만 새삼스럽게 들어도 식은땀이 흐르긴 했다.
한의학계 기득권 갑질의 상징으로 국민적 낙인이 찍힌 김영찬이지만, 그의 백그라운드는 요즘 말로 넘사벽이었다.
순간, 한지호의 눈빛이 변했다.
윤리위원회에서 기습적으로 김영찬을 제소할 때 보여줬단 바로 그 눈빛이었다.
사냥감을 쫓는 맹수의 눈빛.
수십만 명이 싸우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의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내뿜는 강렬한 카리스마에 13명의 원장들은 저도 모르게 압도당했다.
한지호는 좌중을 완전히 장악한 채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삽니다.”
침묵을 가르는 폭탄 발언이었다.
김영찬 교수를 제소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13명의 원장들은 뭉치면 산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지호를 중심으로 한 신흥 세력을 만들어서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협회와 한의학계를 장악한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김영찬 교수의 부당한 압력과 관련된 증거를 한지호에게 넘겨준 순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가장 먼저 대답을 한 건 모임의 최고 연장자였다.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최 원장이 앞장서서 묘한 기류를 정리했다.
“나이는 어리고, 또 학교 후배지만…… 한 원장이 아니면 누가 나서서 젊고 의식 있는 한의사들을 모으겠어. 솔직히 말해서 얼굴 역할을 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도 한 원장밖에 없고.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한 원장을 중심으로 협회, 세미나, 한의원 운영까지 뜻을 함께 하지.”
한의사 협회 내부에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물론, 한의원 운영까지 상담할 정도의 파트너가 되겠다는 말이다.
최 원장이 포문을 열자 다른 원장들도 질세라 말을 보탰다.
가장 선배가 막내인 한지호를 중심으로 인정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부담이 없어진 탓이다.
“나도 앞으로 중요한 일마다 한 원장의 말을 듣고 힘을 보태겠네. 협회에서도 그렇고, 세미나에서도 나이 든 교수 출신 원장들의 비위를 맞추는 거 더는 못 하겠어. 젊고 쌩쌩한 우리들이 모여서 새로운 바람을 만들어 보자고!”
“저도 한 원장님 하시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겠습니다. 저보다 다섯 학번 후배지만, 어차피 학교 다닐 때 별로 본 기억도 없고. 선후배 기수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맞아, 맞아. 나도 한 원장과 뜻을 같이 해야지. 어차피 협회나 교수님들에게도 이번 일로 단단히 찍혔을 거고. 우리도 나름 한의사회의 중역들인데 한 원장을 중심으로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서로서로 한의원 운영에 관해서 정보도 나누고. 그럼 좋은 거 아니겠어?”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뜻이 모여졌다.
한지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14명.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하나같이 최고의 명문 한의대인 K대 출신이고,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젊은 한의사들이다.
각자 인지도나 한의원의 크기는 달라도 힘을 모아서 낼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한지호와 힘을 합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이 모임이 정식으로 발족하고 나면 한의사회에 엄청난 폭풍이 몰아칠지도 모른다.
다른 젊은 한의원 원장들도 여기 모인 14명과 비슷한 심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나이 든 교수들과 협회 임원들의 눈치를 보며 한의원을 운영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줄을 잘 서서 딸랑거리는 몇 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군들 억하심정이 없겠는가.
모든 협회가 다 그 모양 그 꼴이지만, 한의사 협회도 내부를 살펴보면 온갖 비리와 권력 다툼 등 신물 나는 일들이 많다.
“좁은 한의사회에서 우리까지 권력 다툼에 뛰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협회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이러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김영찬 교수를 비롯한 그 누구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도록, 편하게 한의원 운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존재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선배님들의 믿음을 발판으로 삼아 제 역할을 하겠습니다.”
짝짝짝짝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3명의 원장들이 박수를 쳤다.
국민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한지호가 원톱이 되어 세력을 만든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두근거리는 일이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한지호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젊은 한의사 모임에서 정말 괜찮은 사람들을 선택해 원화 한의원의 브랜드 파트너로 삼을 작정이었다.
위천 한방병원처럼 대형 프랜차이즈가 되지는 않아도 원화 한의원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를 형성해둘 필요는 있다.
그는 중국 대륙 진출까지 고려한 여러 플랜을 가동하고 있었다.
김영찬을 공격하면서 젊은 한의사들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만드는 것도 계획의 일환이다.
한 번에 한 가지 목표만 이루는 게 아니라 일석이조, 일석삼조를 성취하며 큰 그림을 그려가는 한지호의 모습은 제갈공명이 부럽지 않았다.
김영찬의 권위에 말뚝을 박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날개를 단 한지호가 샴페인 잔을 높이 들었다.
“위하여!”
“위하여-!”
한지호와 젊은 한의사들이 무엇을 위하게 될지, 그 창창한 앞날이 기대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