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5장, 재건(再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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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사장님, 저를 믿으시죠?”
한지호가 최치우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가벼운 물음이 아니었다.
그는 최치우의 왼팔을 걸고 치료를 시작하려 했다.
이제껏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치료이기에 환자인 최치우의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왼팔의 반깁스를 풀고 앉아있던 최치우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자네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나.”
“한세 병원에서 하는 재활 치료는 빠지지 말고 다니셔야 합니다. 근력을 회복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네. 귀찮아도 꼬박꼬박 재활을 받으러 다님세.”
“저는 근력이 아니라 손상된 신경 감각을 살리는데 집중할 겁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더 큰 부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 사장님이 저를 믿어준다면, 반드시 왼팔을 사고가 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겠습니다.”
“자네의 의술이 하늘에 다다랐다는 걸 직접 지켜봤지 않나. 마음 놓고 있을 터이니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최치우는 한지호가 편하게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험상궂은 외모의 털보 아저씨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드러웠다.
한지호는 심호흡을 하며 침을 하나 들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최치우의 왼팔을 직시했다.
실밥을 뽑았지만 수술 부위가 100% 아물지 않았다.
검붉은 색깔의 딱지가 수술 자국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아픔을 느낄 정도였다.
딱지가 떨어지고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가 남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흉터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정 보기 싫으면 간단한 성형수술로 흉터를 제거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진짜 문제는 뼈와 근육, 신경이 제 역할을 하느냐이다.
한지호는 딱지로 침을 들지 않은 손으로 최치우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아니 왜……?”
최치우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사고는 왼팔에 났는데 왜 오른팔을 잡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차분한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환자를 안심시키고, 치료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한의사가 해야 할 역할이다.
“다친 부위만 자극한다고 해서 감각이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 우리 몸의 신체 기관은 하나로 연결 돼 있고, 결국 두뇌라는 컨트롤 타워의 지시를 받습니다. 수술을 한 왼팔, 또 반대쪽인 오른팔을 자극하는 건 모두 두뇌를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알겠네. 그저 자네의 치료대로 따라야지.”
최치우는 두 눈을 감았다.
치료를 받을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한지호에게 내맡긴다는 뜻이었다.
한지호는 먼저 최치우의 오른쪽 팔꿈치 아래에 침을 놓았다.
꾸욱-
“흐읍…….”
최치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소싯적에 험한 산을 누비고 다닌 약초꾼 최치우는 타고난 강골이다.
웬만한 고통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지호는 일부러 통각(痛覺)이 민감한 혈도에 침을 놓았다.
억지로라도 고통을 느끼게 하는 치료법이다.
두뇌를 자극시켜 왼팔과 연결된 신경이 살아나게 만들어야 한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오른팔에 두 개의 침을 더 놓았다.
“커흡. 이거 참 부끄럽게도 아픔을 참기 힘들구만. 이제 다 됐는가?”
“이제 시작입니다.”
“시작이라, 알겠네. 쉬운 치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최치우는 잠시 눈을 뜨고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을 번갈아 살펴봤다.
침을 맞은 오른팔에서는 저릿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에 반해 딱지로 덮인 왼쪽 팔꿈치 아래에서는 얼얼하고 불쾌한 감각만 느껴질 분, 무쇠 덩어리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왼팔에서도 똑같은 통증이 느껴지면 엄청나게 기쁠 것이다.
평상시에는 거추장스러운 통증조차도 얼마나 소중한 감각인지 깨닫게 됐다.
“이제 귀와 목에 침을 놓아 직접적으로 뇌를 자극하겠습니다.”
한지호가 다시 침을 들었다.
최치우는 말없이 눈을 꼭 감았다.
침을 든 한지호도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오른팔에 침을 놓았을 때보다 한층 날카로워진 눈빛이었다.
귀와 목은 두뇌와 직결된 기관이다.
특히 귀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웅크린 태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놀랍게도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프랑스의 폴 노지에 박사가 귀에 화상을 입은 환자의 좌골신경통이 치료된 것을 보고 연구하여 귀침을 학문화 시켰다.
태아(胎兒)의 모양을 닮은 귀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의 축소판이다.
중증의 좌골신경통을 앓던 환자가 귀에 화상을 입으며 우연히 완치가 됐던 것처럼, 한지호도 귀를 중점적으로 자극해 최치우의 왼팔 신경을 되살릴 작정이었다.
“후우우-.”
길게 숨을 들이마신 한지호가 최치우의 귀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그는 굳이 오금희의 기운을 일으키지 않았다.
화타의 의술은 오금희에서 시작해 오금희로 끝난다.
하지만 모든 치료에 반드시 오금희를 적용시켜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한의학의 세계는 끝없이 넓다.
화타와 규호의 의술을 지탱하는 뿌리는 오금희지만, 다른 방면의 의술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귀를 인체의 축소판으로 인지해서 침을 놓는 것 역시 끝없이 넓은 한의학 의술의 한 갈래였다.
한지호는 최치우의 오른쪽 귀 중앙에 침을 놓았다.
태아의 모양을 한 귀에서 두뇌와 왼팔에 해당하는 부위를 자극하는 것이다.
“큽…….”
이번에도 어김없이 최치우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른팔에 침을 맞을 때보다 훨씬 더 아플 것이다.
한지호는 비장한 각오로 그의 양쪽 귀와 목 뒤에까지 침을 꽂아갔다.
정작 감각을 상실한 왼팔에는 침을 놓지 않았다.
오른팔과 귀, 목 뒤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치료법이 과연 효과가 있을 것인가.
지금으로선 그저 자신의 의술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새 한지호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만큼 전력을 다해 침을 놓고 있다는 뜻이다.
집중력을 측정하는 기계가 있다면 지금의 한지호에게 최고점을 부여했을 것이다.
“이대로 20분만 있겠습니다. 많이 아팠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자네가 했지. 얼마나 바쁜 사람인 줄 아는데 나를 위해서 이렇게 신경 써줘서 고맙네. 내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이야.”
“은혜라니, 그런 말씀 마세요. 화, 목, 토. 이렇게 매주 세 번씩 침을 맞고 가세요.”
“그렇게나 많이 시간을 내줘도 괜찮겠는가?”
“지금은 최 사장님의 왼팔을 치료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진료가 끝나는 시간을 비워두고 있을게요. 한의원으로 오셔도 좋고, 집으로 오셔도 좋습니다.”
“알겠네. 절대 빼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나.”
최치우는 한지호의 배려에 감동했는지 목이 잠긴 것 같았다.
이제 왼팔의 재활을 위한 첫 걸음을 뗐다.
근력 회복은 한세 병원에서, 그리고 신경 감각 회복은 한지호가 책임지고 이끌어낼 것이다.
한지호는 최치우의 오른팔과 양쪽 귀, 목 뒤에 자신이 놓은 침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얇고 가는 침으로 인간의 몸이라는 우주를 고치는 일, 한지호는 그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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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뽑고, 이런저런 환담을 나눈 최치우가 돌아갔다.
2주 동안 병원에 있었으니 집으로 가서 이것저것 돌봐야 할 게 많을 터였다.
내내 병상을 지켜줬던 이원복은 최치우가 퇴원하자 곧장 계룡산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한지호는 그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전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원복은 최치우의 동생으로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간호를 한 것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마음의 빚을 느꼈고, 다음에 어떤 식으로든 빚을 갚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도 진짜 바쁘게 지나갔다.”
소파에 몸을 기댄 한지호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원화 한의원을 개원한 이후로 매주 시간이 쏜살처럼 흐르는 기분이었다.
지난 주와 이번 주에는 특히 더 많은 일을 했다.
타이트한 진료 일정을 소화하며 촬영도 마쳤고, 이지은과 데이트까지 했다.
게다가 지난 주말에는 천사원 아이들을 찾아 모두 모이는 자리를 만들었고, 유건영의 소개로 오대경이라는 인물을 만나서 한국 한약 협회의 뒷조사도 의뢰했었다.
하나씩 놓고 보면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지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최치우에게 첫 시침까지 마치고 소파에 몸을 묻으니 그간의 피로가 한 번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이틀 내내 잠이나 자버릴까.”
이번 주말에는 연인이 된 이지은이 소속사 일정으로 잠시 일본에 갔다.
그렇기에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토요일 진료를 끝내고 최치우에게 침을 놓고 난 다음이라 마냥 늘어져서 쉬고 싶었다.
한지호는 열과 성을 다해 최치우에게 침을 놓았었다.
그래서인지 침실로 움직이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소파에서 비스듬히 누워 잠이 들 것 같았다.
우우웅- 우우웅-
스스르 눈이 감기려는 찰나, 테이블 위의 스마트 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요즘 스마트 폰의 진동 강도는 무시하고 넘길 수준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벨소리보다 더 크고 강하게 전화가 왔음을 알려준다.
한지호는 스마트 폰의 진동을 무시하지 못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폰의 액정에는 저장해두지 않은 낯선 번호가 떠있었다.
혹시 인터뷰 요청을 하는 신문 기자나 귀찮은 사람들이 아닐까.
잠시 망설인 그는 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귀찮은 용건의 전화라면 빨리 끊어 버리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보세요.”
“한지호 원장님?”
“네, 그렇습니다만.”
“오대경입니다. 기억 하시지예?”
강한 사투리가 들려왔다.
이런 억양을 쉽게 잊을 리 없었다.
팀 DK라는 해결사 업체의 사장 오대경이 낯선 번호로 전화를 해온 것이다.
“번호를 바꿨군요.”
“우리야 대포 폰 돌려가며 생활하는 게 워낙 익숙해가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하신 건….”
“저희에게 맡기신 일, 해결했습니다.”
오대경의 목소리에서 짙은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한지호도 잠이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최치우의 뺑소니 사고와 한국 한약 협회장 김일은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의뢰를 맡겼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결과를 가져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이 괜히 오대경을 해결사로 추천한 게 아니었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 상류층들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명성을 쌓았다더니, 투박한 생김새나 말투와 달리 일 처리는 아주 깔끔하게 하는 것 같았다.
“벌써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돈을 많이 주시는 쪽 일부터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게 이 바닥 생리 아이겠습니까.”
“그런 태도,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그라믄 우선 전화로 간략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결과적으로다가 한국 한약 협회장 김일은이 뺑소니 사고를 지시한 게 맞습니다.”
“……!”
한지호는 말없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예감이 적중했다.
우연치고는 너무 냄새가 많이 나는 일이었다.
사고를 당한 최치우도 김일은의 짓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을 뿐이다.
한지호는 한 쪽 주먹을 꽉 쥐며 질문을 던졌다.
“증거는 확보했습니까?”
“증거 없이 말하믄 프로가 아니지예. 김일은의 차명 계좌를 추적했고, 그 계좌에서 서울 시내 대포 차 업자에게 돈이 입금 됐습니다. 직접 운전해 사람을 친 놈은 아직 못 찾았는데 뺑소니에 쓰인 자동차를 김일은이 구입했으니 말 다한 거 아입니까?”
“그만하면 법정에서도 인정 될 충분한 증거군요.”
“그라고 또 한국 한약 협회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하셨지예.”
“쓸 만한 정보가 있었습니까?”
“임마들 이거 완전 양아치나 다름없습니다. 협회랍시고 지역 한의원과 한약방에 압력 넣어 삥이나 뜯고, 삥 뜯은 돈으로 정치권에 로비해서 또 다시 압력 넣고. 악순환입니다, 악순환.”
오대경은 짧은 기간 동안 뺑소니 사건의 증거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유용한 정보도 입수한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사무실로 가겠습니다. 만나서 자세한 증거를 보며 이야기합시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셔서 잔금도 같이 처리해 주시믄…….”
“증거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이체해 드리죠.”
“예, 예.”
곧바로 잔금을 처리해준다는 말에 전화기 너머 오대경이 반색하며 기뻐했다.
한지호도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쁨보다는 억눌러둔 분노가 다시 타오르는 게 아닐까.
오대경이 찾아낸 증거를 확인한 뒤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한국 한약 협회장 김일은에게 죄 값을 물을 것이다.
재킷을 걸친 한지호가 거울도 보지 않고 문 밖으로 나섰다.
천사원도, 최치우의 왼팔도, 그리고 한지호의 분노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