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5장, 재건(再建) (1)
“지훈아, 민기야. 민우야…….”
성당 입구로 걸어 나온 마리아 수녀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슬픔과 감동이 교차되어 목이 잠겼다.
“수녀님!”
“보고 싶었어요, 수녀님!”
이지훈과 김민기, 김민우는 마리아 수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지훈이와 민기는 중학생이고, 민우는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세 명의 아이들을 오랜만에 어미를 만난 새끼 강아지들처럼 마리아 수녀의 품에 푹 안겨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리아 수녀도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을 껴안고 가만히 서있었다.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한지호와 조기운은 뿌듯한 표정으로 상봉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아 수녀와 함께 나온 유초아도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아이들을 바라봤다.
거의 반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천사원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채 현실을 버텨야했다.
그것은 한지호나 마리아 수녀도 다르지 않았다.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과 능력을 습득하며 정신없이 달려왔다.
황만금과 김해수를 치료하며 의술을 인정받았고, 원화 한의원을 열어 자기만의 성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지상파 TV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대중적인 명성을 얻는 중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오직 더 높이 올라가는데 집중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제나 천사원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리아 수녀는 그의 어머니나 다름없고,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은 동생들이었다.
피를 나눈 혈육은 아니라도 어렵고 가난한 시기를 함께 보낸 끈끈한 정이 있었다.
천사원이 해체되고, 드디어 모두가 다시 모인 오늘은 한지호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다른 보육원으로 전입되어 알게 모르게 눈칫밥을 먹었던 민기, 민우 형제와 모진 고초를 겪으며 세상 경험을 제대로 한 지훈이에게도 잊지 못 할 순간일 것이다.
한지호는 마리아 수녀와 아이들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마리아 수녀가 포옹을 풀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니? 지훈이는 고모네에서 나와 힘든 일을 겪었다면서?”
“수녀님…… 죄송해요. 저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지훈이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열다섯 살.
겉모습만 보면 제법 큰 것 같지만,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여린 감수성의 어린 아이다.
마리아 수녀는 지훈이의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잘못한 게 있으면 잊지 말고 그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며 갚으면 되는 거야. 알겠니, 지훈아?”
“네… 수녀님.”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한지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잠시만 모두 주목!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발표를 할 거야.”
그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유초아도 눈을 크게 뜨고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깜짝 발표를 했다.
“우리들의 고향이자 집인 천사원은…… 곧 다시 세워진다! 부천에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고 있어. 그때까지 지훈이는 이 성당에 머물면 되고, 민기와 민우는 이전한 보육원에서 조금만 더 지내도록 해. 한 달 안에 다시 천사원에 모여 함께 살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정말이에요, 지호 형?”
“지호 형아, 그럼 우리 이제 수녀님이랑 같이 살 수 있는 거야?”
지훈이와 민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민기와 유초아도 놀란 얼굴로 한지호와 마리아 수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정말이야. 형이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한 달이면 새로운 천사원에서 너희들 모두 모여서 수녀님이랑 같이 살게 될 거야.”
“와아아-! 이제 우리 같이 산다!”
어린 아이인 민우가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리를 높였다.
갑자기 만세를 하는 민우 덕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입가를 가리고 웃은 마리아 수녀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호가 열심히 번 돈으로 천사원을 다시 세워주는 거란다. 너희들도 커서 지호처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해. 알겠지?”
“네, 수녀님!”
마리아 수녀의 말에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지호는 부끄러운 듯 괜히 딴청을 피웠다.
황만금에게서 받았던 1억 원 중 5천만 원을 마리아 수녀에게 줬고, 원화 한의원을 통해 버는 수익 일부를 더해서 천사원을 재건하는 건 그리 큰 희생이 아니었다.
어쩌면 더 일찍 천사원을 다시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책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천사월을 세울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한지호 스스로도 뿌듯해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기뻐하는 아이들과 마리아 수녀의 얼굴을 눈동자 깊이 새겨넣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질주를 멈추지 않겠지만, 때로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돌아보는 것도 큰 기쁨을 준다는 걸 배우게 된 것 같았다.
“고마워요, 지호 오빠.”
약간 멀찍이 떨어져있던 유초아가 다가와 입술을 달싹였다.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유초아는 볼 때마다 소녀티를 벗고 있었다.
야소녀 모임의 탑클래스 여자 연예인들을 가까이서 봤던 한지호의 눈에도 유초아의 미모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예뻐진다고 해도 한지호에게 유초아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었다.
슥슥-
한지호가 장난스럽게 유초아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입시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너무 예뻐지는 거 보니까 수상한데.”
“뭐가 수상해요?”
“남자친구 생긴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럴 일 없어요, 절대로.”
“절대로는 또 왜 절대로야. 대학 들어가면 남자친구도 사귀고 해야지. 조금만 더 참고 입시 준비 열심히 해.”
“네… 오빠…….”
유초아는 뭔가 더 말하려다 말았다.
한지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마리아 수녀를 쳐다봤다.
“수녀님, 다 모였는데 같이 밥 먹으로 가요.”
“그러자꾸나. 오랜만에 모였는데 밥이라도 든든히 먹여야지.”
“기운아, 고기집 예약해뒀지?”
“네, 형님!”
한지호와 조기운이 아이들을 이끌고 성당 근처의 고기집으로 움직였다.
아이들은 마리아 수녀와 한지호 옆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지호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갈 줄 몰랐다.
이지은과의 데이트를 연기하면서까지 부천에 온 보람이 있었다.
따뜻한 기운이 한지호의 마음과 몸을 푸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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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원 재건을 결심해서일까.
시간이 평소보다 더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환자들이 줄지 않고 몰려들기에 하루가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여유 없이 진료가 빡빡하게 돌아가다 보니 금방 하루가 끝나는 기분이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는 2화를 통해 얻은 이슈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3화의 시청률이 10% 가깝게 나왔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프로그램이 흥행 흐름을 탔으니 방송국 차원에서도 더 많은 지원과 홍보를 해줄 것이다.
출연자들도 그만큼 프리미엄을 누리는 게 당연했다.
벌써부터 한지호에게 접촉해오는 타 방송 관계자들이 생겨났다.
이대로 가면 스타들만 찍는다는 광고 제의도 들어올 것 같았다.
원화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이 늘어난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다음 주 쯤이면 상담을 맡는 코디네이터와 안내 직원이 충원 될 것이다.
개원 두 달 차에 접어든 한의원치고는 괄목할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진료 스케줄이 타이트한 것 외에도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는 더 있었다.
한지호가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지은은 한국 나이로 올해 22살이다.
29살인 한지호와는 딱 7살 차이.
띠동갑 커플도 흔한 요즘 세태지만,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특별히 세대 차이를 느끼긴 힘들었다.
10대 시절부터 연예인으로 활동해온 이지은은 20대 초반답지 않게 성숙한 사고관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여느 연예인들처럼 다소 세상 물정에 어둡고, 또 여느 20대 초반 여자들처럼 발랄하고 귀여운 면모가 더 컸다.
아침부터 저녁 전까지 진료에 집중하고, 퇴근 후에는 틈틈이 이지은과 연락을 주고받으면 하루가 금방 끝난다.
그렇게 일주일이 바람처럼 지났다.
수요일에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촬영했다.
3화 시청률이 10% 가까이 나왔기 때문에 예능국장이 직접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내 제작진을 격려해줬다.
한지호도 예능국장과 인사를 나눴고, 프로그램이 잘 된 건 전부 한 원장님 덕이라는 과한 칭찬을 들었다.
채성일 PD와 문주연 아나운서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지호를 향한 국장의 칭찬을 당연하게 여겼다.
다만 양승찬은 지난 촬영에 이어 또 다시 조급한 기색을 보이며 종종 방송의 맥을 끊었다.
국장이 왔기에 더 주목받으려 애쓰다 실수를 연발하게 된 것이다.
반면 한지호는 국장이 보건 말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여유롭게 자기 분량을 소화했다.
방송, 의술, 무공 모두 힘을 뺄수록 좋은 결과가 나온다.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과 잔뜩 힘을 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한지호는 자연스레 힘을 빼는 법을 터득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요일 촬영도 잘 끝났고, 스케줄이 없는 이지은과 저녁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목요일과 금요일, 토요일은 또 다시 정신없는 진료의 연속이었다.
토요일 오후부터는 짧은 주말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번 주말에는 평소처럼 마냥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최치우가 금요일에 실밥을 뽑았고, 토요일 점심 무렵 퇴원 수속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왼팔의 감각 상실을 호소하고 있었다.
한세 병원에서는 시간을 오래 두고 재활 치료를 받으며 기다리자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실제로도 봉합 수술 후유증을 겪는 환자들에게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다.
몇 달에서 몇 년을 기다리다가 정 못 참겠으면 다시 신경수술을 받아야 한다.
재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감각이 멀쩡히 돌아오리란 보장은 없다.
요즘처럼 현대 의학이 발달 된 시기에는 처음 수술에서 의사가 특별한 실수를 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과 감각 계통에 문제가 발생한 환자는 끙끙 앓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최치우를 끙끙 앓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감각이 없다고 해서 엄청난 괴로움을 느끼거나 일상 생활을 못하게 되는 건 아니다.
실밥을 뽑은 최치우는 상처가 회복되고 근육이 재활되면 왼팔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남의 팔을 달고 있는 것처럼 이질적인 느낌이 따라다닐 것이며 그에 따라 왼팔의 기능도 원래보다 현저히 떨어질 터였다.
우리 몸은 그리 단순하게 이뤄져 있지 않다.
뼈와 근육만 멀쩡하다고 해서 신체 기관이 100% 작동하지는 않는다.
감각이 둔해지거나 작은 문제만 생겨도 몸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작 종잇장에 손끝을 베여도 그 고통으로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왼쪽 팔꿈치 아래가 마치 쥐 난 것처럼 얼얼하다는 최치우의 증상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한지호는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아직 수술 부위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밥을 뽑았으니 수술 부위 주위에 침을 놓아 자극을 주면 된다.
이것은 한지호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현대 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수술 후유증을 한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원화 한의원의 파트너이자 소중한 지인 최치우의 몸이 달린 문제다.
동시에 한의사로서 한지호의 한계를 시험하는 케이스가 될 것 같았다.
황만금의 태자병과 김해수의 구음절맥은 내과적 질환이다.
구음절맥의 경우 푸른 반점과 피부 함몰이라는 외상이 나타났지만, 본질은 내과 질병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그에 반해 최치우가 앓는 문제는 신경 손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원인 불명의 신경 기능 상실이다.
쉽게 체감되진 않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한의사로서는 어마어마한 도전에 몸을 내던진 셈이다.
“오실 시간이 됐는데.”
토요일 오전 진료를 마치고, 먼저 신사동의 오피스텔 아파트에 도착한 한지호는 시계를 쳐다봤다.
그는 원화 한의원을 개원하기 전에 방 하나를 진료실처럼 꾸며 놓았었다.
퇴원 수속을 마친 최치우는 한지호의 집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토요일이라서 평소보다 차가 더 막히려나?”
한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쳐다봤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가로수길은 자동차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퇴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러 올 최치우가 조금 늦는 게 이해가 됐다.
스으윽-
한지호는 소파에 앉아 준비해운 침을 매만졌다.
요즘은 다들 위생 문제로 일회용 침을 사용한다.
그 역시 일회용 침을 쓰고 버리는데 익숙했었다.
그러다가 전생의 기억을 깨닫게 되면서 저도 모르게 침을 소독해 썼었다.
규호가 살았던 삼국시대에는 침이 귀했기에 함부로 버리지 않고 여러 번 사용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한 전생의 습관이 저절로 몸에 배였던 것이다.
하지만 원화 한의원을 개원하면서 다시 일회용 침을 사용하게 됐다.
의료법도 준수해야 하고,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는데 일일이 침을 소독해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딩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한지호는 준비해둔 침을 원래 자리에 올려놓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천사원에 이어 최치우의 팔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또 다른 도전을 앞둔 한의사 한지호의 눈동자에 기이한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