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6장, 법보다 주먹 (1)
“이거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한지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팀 DK 사무실에서 오대경이 입수한 자료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한국 한약 협회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막 나가는 단체였다.
협회장 김일은 역시 최치우의 표현대로 독하고 약은 인간이라는 게 티가 났다.
“심각하지예? 파면 팔수록 먼지 덩어리가 아주 막…….”
오대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폭 두목처럼 생긴 그가 표정을 찡그리니 한층 더 험악해 보였다.
하지만 오대경은 막무가내로 생각 없이 사는 폭력배가 아니다.
굉장히 똑똑하고 깔끔하게 의뢰를 해결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록 음지에 숨어서 일하지만, 상류층들의 사건을 전담하며 사회화가 많이 된 상태다.
한지호는 떡 벌어진 덩치를 자랑하는 오대경에게서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 김일은의 차명계좌에서 대포 자동차 업주에게 돈을 보낸 내역 말입니다.”
“네.”
“이 계좌가 김일은의 차명계좌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다 준비를 해놓았지예. 해당 계좌에서 김일은의 와이프에게 송금을 한 내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한약 협회의 공금이 이 계좌로 들어간 내역도 확보 했습니다.”
“김일은이 뺑소니 사건의 배후일 뿐 아니라 협회 자금을 유용했다는 증거까지 되는 셈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뺑소니 사주, 불법 대포차 구매, 공금 유용. 삼종 세트 아입니까.”
“김일은을 엮을 증거는 충분하고, 한국 한약 협회와 관련된 자료도 설명을 부탁합니다.”
한지호는 처음부터 김일은이 뺑소니 사건의 배후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 없이 복수를 감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확실한 증거가 나타났으니 마음 놓고 무자비한 복수를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김일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국 한약 협회 전체가 복수의 대상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한약 협회는 김일은의 사조직이나 다름없고, 심각한 비리의 온상이었다.
그런 단체가 다이어트 한약을 비판했다고 한지호를 협박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치우를 자동차로 치고 달아났다.
가만히 놔두면 한지호와 원화 한의원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단체다.
나름대로 격식을 갖춰서 항의를 한 한의사 협회와 비교하면 조폭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한지호는 이참에 김일은과 한국 한약 협회의 싹을 밟아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오대경은 살짝 들뜬 말투로 한국 한약 협회의 자료에 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임마들, 그러니까 한국 한약 협회 말입니다. 정치권이랑 보건복지부에 끈이 있다 아입니까. 그 끈을 이용해서 각종 규제나 법규를 만들고, 그렇게 자기들 힘을 과시하는 거지예. 그래서 협회 소속 한약방들로부터 회비를 받고, 그 회비로 또 로비를 하고. 한편으로는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한약방은 수시로 조지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한약방을 압박하는 겁니까?”
“간단하지예. 윗선에 압력 넣어가 보건복지부나 식약청 조사관들 파견해서 꼬투리 잡고, 영업 방해하고, 별 거 아인 걸로 벌금 먹이고. 뭐 그런 거 아이겠습니까.”
“얄밉긴 해도 교묘하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플레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식약청 직원등을 대상으로 한 로비는 불법입니다. 쉽게 말해 뇌물, 접대. 뭐 이런 거지요.”
“아까 전에 보여준 카드 내역이 그 증거군요.”
한지호는 머릿속에서 뭔가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오대경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협회의 법인 카드로 일식집에 2천만 원이나 결제해놓은 거, 미리 식비를 내놓은 거라고들 하지만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저렇게 카드 그어 놓고, 현금으로 받아가는 거지요. 업무상 배임, 횡령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보시면 룸살롱이나 고급 주점에서 결제한 내역도 심심찮게 나오고요. 확실한 뇌물의 증거는 아니더라도 배임, 횡령의 증거로는 충분하고 주요 인사들에게 접대를 했다는 혐의는 충분히 씌울 수 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아니, 충분을 넘어 차고도 넘치는 증거들이다.
오대경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경찰이나 검찰이 울고 갈 정도의 자료를 확보했다.
한지호가 그에게 의뢰비 잔금을 입금하면 자료가 담긴 usb를 건네줄 것이다.
“유 팀장님의 말씀대로 명불허전이군요. 오대경 씨, 앞으로도 계속 볼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원장님께서 찾아 주신다면야 늘 특급으로 모셔야지예.”
오대경은 괜한 립서비스를 하는 게 아니었다.
한지호는 여느 VIP들보다 더 후한 의뢰비를 지불했다.
뺑소니 사건의 증거를 찾기 위해 만만찮은 금액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삑- 삐빅!
스마트 폰으로 잔금을 이체시킨 한지호가 오대경을 쳐다봤다.
“입금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원장님! 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만 주십시오.”
오대경이 어울리지 않게 깍듯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관계에서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지호는 다양한 자료와 증거가 담긴 usb를 챙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에게 오대경이 질문을 던졌다.
“그걸로 검찰에 고발하실 계획이십니까?”
한지호는 오대경을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고발도 해야죠. 그 전에 법보다 무서운 게 뭔지 가르쳐준 다음에 말입니다.”
“법보다 무서운 거라…….”
오대경은 한 방 맞았다는 얼굴로 한지호를 바라봤다.
한지호는 웃음을 남긴 채 팀 DK의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마음껏 칼을 휘두를 순간만 남은 것 같았다.
+++
한국 한약 협회의 사무실은 서대문에 있었다.
광화문과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라인에는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물론 한국 한약 협회가 고층 빌딩을 통째로 쓸 정도의 규모는 아니다.
그래도 꽤 비싸 보이는 빌딩 한 층을 빌려 쓰는 걸 보니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각 지역의 영세 한약방을 협박해 뜯어내는 협회비가 이들의 자금줄이다.
한지호는 망설임 없이 고층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미 한국 한약 협회에 전화를 해놓았다.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직접 얼굴을 보이겠다며 약속을 잡은 것이다.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김일은은 최치우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뺑소니 사고를 내버렸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독한 인간이고, 그런 사람의 안방으로 들어간다는 건 목줄을 내어주는 행위다.
하지만 한지호는 거침이 없었다.
설령 한국 한약 협회 사무실 안에 덩치 큰 용역이나 조폭들이 우르르 깔려 있어도 무서울 게 없기 때문이다.
오금희를 수련한 그는 현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지 오래였다.
의술보다 더 무서운 무공이 그의 단전 안에 잠들어 있다.
만약 김일은이 허튼 수를 쓴다면 끔찍한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한지호는 여유로운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띠딩-
8층에 이르러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내리자마자 곧바로 한국 한약 협회 사무실의 출입문이 보였다.
한지호가 그 앞에 서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지이이잉!
현대식 고층 빌딩에 어울리는 최신 시설이었다.
출입문이 있는 복도 위에는 CCTV가 달려있는 게 보였다.
한지호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단정한 외모의 여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김일은 협회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한지호라고 합니다.”
“네, 안으로 모실게요.”
한지호는 여직원을 따라 사무실 안쪽의 협회장실로 걸어갔다.
파티션이 쳐져있는 사무실 내부는 여느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상근하는 직원들 몇몇이 컴퓨터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한지호는 월요일 진료를 마치고 왔고, 퇴근 시간이 지났기에 한국 한약 협회 사무실에도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예상과 달리 양아치나 조폭, 용역으로 보이는 남자들은 없었다.
그저 퇴근 시간을 넘긴 평범한 법인 회사의 사무실 같은 풍경이었다.
똑똑-
“회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차단막으로 가려진 협회장실 안쪽에서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직원이 문을 열어줬고, 한지호는 꽤 넓고 깔끔한 협회장실 안에 들어갔다.
유리창을 블라인드로 막아 놓았기에 바깥 사무실과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었다.
김일은은 한국 한약 협회장이라는 명패가 놓인 책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가 한지호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인가? 이렇게 먼저 찾아올 거면 그간의 연락들은 왜 전부 무시했나?”
김일은은 다짜고짜 지난 일을 따지고 들어왔다.
한지호는 다이어트 한약을 다룬 <건강 백서, 진짜! 가짜!> 2화가 방송된 후 빗발쳤던 김일은과 협회의 연락을 하나도 받아주지 않았었다.
만약 김일은이 최치우를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계속 무시하고 살았을 것이다.
한지호는 대답하는 대신 김일은의 눈을 마주봤다.
제법 나이가 들었지만 운동선수처럼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 그리고 군살은 있어도 근육질로 보이는 덩치는 김일은의 왕년을 짐작케 했다.
이목구비도 서양인처럼 굵고 짙은 편이었고, 희끗희끗한 머리칼 색만 제외하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눈빛이 강했다.
최치우와 비슷한 연배라고 들었는데 약초꾼 출신들은 다들 나이에 비해 팔팔한 것 같았다.
한창 시절에 험난한 산을 밥 먹듯 타면서 좋은 약초를 골라 먹었을 테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일은은 정장을 입고, 머리에 무스를 발라 깔끔하게 뒤로 넘겼다.
털보 수염을 자랑하는 최치우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였다.
한국 한약 협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다면 건설 업체 사장이나 폭력 조직의 원로로 의심 받았을 것이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한지호는 김일은의 강한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말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김일은도 살짝 놀란 눈치였다.
둘은 기다란 소파에 마주 앉았다.
한지호는 시간을 끌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그의 본론에 김일은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그랬냐니, 무턱대고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다이어트 한약 방송으로 많은 한의원과 한약방이 힘들어졌고, 협회원의 이익을 지켜야하는 한국 한약 협회가 발끈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 협회가 지켜야 할 선을 넘기라도 했단 말인가? 모든 연락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사과를 하러 온 줄 알았더니… 도리어 적반하장을 하려 온 게야?”
김일은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역정을 냈다.
외부와 차단된 협회장실의 공기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한지호는 단전에 잠든 오금희의 기운을 전신으로 퍼트리며 입을 열었다.
“명징약초 최치우 사장님. 얼마 전에 뺑소니 사고를 당하셨죠. 사고 직전 김일은 협회장님으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권고를 받았고. 정말 할 말이 없으십니까?”
“이, 이, 이 사람 이거 아주 안 되겠구만! 지금 나를 뭘로 보고-! 증거 있나? 증거 있어?”
김일은이 빨개진 눈으로 삿대질을 했다.
이로서 한지호는 확실하게 판단을 내렸다.
한국 한약 협회장 김일은은 대화가 통하거나 반성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판단을 내렸으니 행동을 할 차례다.
소파에 앉아있던 한지호가 벼락같이 몸을 일으켜 맞은편의 김일은을 부여잡았다.
“케엑… 케켁!”
멱살을 잡힌 김일은이 괴로운 듯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반항을 하거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번개처럼 달려든 한지호가 그의 멱살을 잡고 목을 조였다.
“증거? 당연히 있지. 그 증거들은 경찰서에서 직접 확인하면 되고.”
“지금 뭐 하는… 크읍!”
김일은이 목소리를 내려다 말았다.
한지호가 멱살을 잡지 않은 손으로 그의 혈도를 눌렀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결국 체질과 혈도(穴道)로 인간의 몸을 파악하는 학문이다.
무공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한지호는 오금희 웅공의 무지막지한 기운을 손가락 끝에 담아 김일은의 혈도를 누르고 있었다.
현대에 들어 완전히 사라진 점혈법(點穴法)을 펼치는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김일은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순 없었다.
한지호가 먼저 김일은의 아혈(啞穴)을 짚어 일시적으로 목소리를 못 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당신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한지호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흥분하지 않는 모습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처한 김일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는 것, 그리고 여러 곳의 혈도가 눌리며 온몸을 덮쳤던 극렬한 통증이 그를 급격히 위축되게 만들었다.
한지호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김일은의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최 사장님이 겪은 불편과 고통을 딱 두 배로 느끼게 될 겁니다. 그것도 평생.”
저승사자의 선고처럼 무서운 말이 김일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손가락으로 혈도 몇 번 누른 것이 전부이지만, 김일은은 평생 악몽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한지호의 복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줄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