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건강에 관심이 많은 국민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불만 제로나 비슷한 부류의 기존 프로그램들을 뛰어넘는 인기를 누릴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다시금 채성일의 눈을 쳐다봤다.
삼십대 중반을 넘긴 채성일의 눈동자는 여전히 청춘의 에너지를 담고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프로그램 성공을 향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한지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채성일과 약속을 잡을 때부터 마음의 결정을 내려 놓았었다.
프로그램 설명을 들으니 그 결정을 밀어붙여도 될 것 같았다.
“채 PD님, 부족하지만 도움이 된다면 같이 하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한 원장님이 도와주시면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다름 없습니다!”
채성일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한지호는 환자들 사이에서 트레이드 마크가 된 부드러운 미소로 응답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 이 프로그램을 올해 MBS 최고의 히트작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겠습니다.”
방송국 관계자들이 들으면 웃음을 터트릴지 모르지만, 채성일은 한지호의 각오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기투합을 결심한 두 사람이 어떤 일을 만들어낼지 아직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8장, 쇼 닥터(show doctor) (1)
원화 한의원은 개원 초기부터 주5일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어느덧 개원 한 달째가 됐고, 한지호의 명성 덕에 제법 많은 VIP 환자들이 원화 한의원을 찾았다.
덕분에 첫 달부터 적자를 내지 않았다.
병원 운영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개원 첫 달부터 흑자를 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3천만 원에 달하는 월 임대료, 직원들의 월급, 그 외 관리비와 약재비 등 각종 비용을 한 달 안에 뽑아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기존에 꾸준히 판매되며 입소문을 얻은 청우단의 인기가 여전하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환자의 수는 적어도 한 명 한 명의 단가가 최소 수백만 원 이상에 달하기에 흑자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흑자를 내는 정도에 만족할 한지호가 아니었다.
사무장 박우식이나 코디네이터 정주은의 지적처럼 많은 환자들이 상담 과정에서 비싼 가격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떨어져 나간다.
한지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크게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 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VIP 환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원화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지은 환자들이 효과를 체험하면 알아서 소문을 내줄 게 분명하다.
청우단이 입소문으로 여의도 금융권의 히트 상품이 된 것처럼 원화 한의원도 강남 VIP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터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차근차근 오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약을 지으며 소문이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기에 한지호는 기본에 해당하는 첫 째 방법을 지키면서 두 번째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채성일이 연출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단기간에 인기와 명성을 쌓는 것이다.
지상파 방송국의 TV 프로그램이 가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한지호는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통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한의사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TV를 통해 인기를 얻고 화제몰이에 성공하면 더 많은 상류층이 원화 한의원을 찾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담 과정에서 알게 되는 비싼 진료비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내리는 환자들이 늘어날 것 같았다.
한지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 그것이 원화 한의원을 VIP 전문 한의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의 첫 촬영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방송을 위해 한지호는 수요일을 비웠고, 대신 휴무였던 토요일 날 오전 진료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오는 환자를 다 받으며 빡빡한 스케줄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아니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VIP 전문 한의원을 추구하며 얻은 장점 하나는 시간 조율이 자유롭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원장들은 병원에 묶여 다른 일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반해 한지호는 사전 예약제라는 시스템을 활용해 언제든 자유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방송을 비롯한 대외 활동, 그리고 직접 한의원에 방문하기를 꺼리는 최상류층을 만나는데 아무 제약이 없는 것이다.
“진짜 얼마 안 남았네.”
달력을 본 한지호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막상 TV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는 금요일 저녁 시간이라는 황금 시간대에 편성이 확정 됐다.
그렇기에 첫 방송이 나간 후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담당 PD인 채성일과 여러 차례 미팅을 했고, 이번 주말에는 전체 출연진이 사전 리딩을 한다.
드라마처럼 대본이 타이트하게 짜여 있는 건 아니지만 첫 촬영 전에 출연진 모두가 모여 호흡을 맞춰보는 것이다.
한지호는 새삼 TV 프로그램 출연을 확정지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다.
깔끔한 셔츠 위로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넓은 책상 앞에는 원장 한지호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함판이 세워져 있었다.
강남 중심부에서도 손꼽힐 규모를 자랑하는 한의원의 원장 자격으로 MBS의 건강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게 됐다.
전국의 수많은 20대 한의사 중에서 한지호가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건 확실하다.
이제 그의 경쟁 상대는 한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 과정을 마친 또래 한의사들이 아니다.
30대, 아니 40대와 50대에서 국내 한의학계를 이끌어가는 선배들이 한지호의 경쟁 상대였다.
그가 TV에 나오고, 원화 한의원이 자리를 잡을수록 한의학계의 중견 선배들도 한지호를 경쟁 상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우우웅-
그때 책상 위에 올려든 스마트 폰이 묵직한 진동음을 토해냈다.
진료를 마치고 여유가 있는 시간이라 폰을 꺼내 놓았던 것이다.
한지호는 상념에서 벗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한지호입니다.”
“한 원장님, 잘 지내고 계시지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플래티넘 홀딩스에서 VIP 고객들의 자금 관리를 맡고 있는 유건영의 전화였다.
유건영은 한지호가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는데 첫 다리를 놓아준 사람이다.
그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황만금과 김해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한지호는 멀고 험한 길을 돌아와야 했을 터였다.
“유 팀장님.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자주 못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개원 초기에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한지호와 유건영은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둘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였고, 각각 상대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회에서는 실적 없는 관계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확실한 실적을 공유할 때 좋은 관계가 맺어지고, 오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지호와 유건영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소식 들었습니다.”
“네? 무슨 소식을 말씀하시는 건지.”
“MBS 방송에 출연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금요일 프라임 타임에 들어가는 예능 프로라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통화를 하던 중 한지호가 눈을 크게 떴다.
따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유건영이 방송 출연 소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따르는 유건영의 대답은 더욱 놀라웠다.
“모르셨습니까? 오늘부로 MBS에서 보도 자료를 뿌렸습니다. 원래 새로운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전부터 인터넷 뉴스에 자료를 뿌리며 홍보를 하니까요. 야소녀 모임에 참석했던 K대 훈남 한의사인 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도 출연을 확정지었다, 이런 문구까지 보도 자료에 실려 기사로 났습니다.”
“아……. 아직 첫 촬영도 들어가기 전이라 벌써 홍보를 하는지 몰랐네요.”
“홍보는 한 타이밍 빨리 하는 게 정석이니까요.”
한지호는 뒤통수에 망치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유건영의 말이 그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다.
이제껏 홍보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입소문과 방송 출연이면 충분하다고 자신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유능한 마케팅 전문가를 찾아 원화 한의원의 브랜드 홍보를 맡겨야 할 것 같았다.
방송 출연과 동시에 투자금 여분을 홍보에 쓰려던 계획을 실행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지상파 방송국도 홍보에 심혈을 기울이는 걸 보니 경각심이 든 것이다.
“아무튼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고객들 중에서 한 원장님을 뵙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혹시 제 이름을 말씀하시는 고객이 찾아가면 특별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 팀장님의 고객이라면 더욱 신경을 써드려야죠. 여러모로 도와주시는 것,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저도 병원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스시나 같이 드시죠.”
“언제든 좋습니다.”
“그럼 프로그램도 대박나길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한 원장님.”
“네. 조만간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유건영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고객들을 한지호에게 소개시켜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단순히 한지호를 돕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플래티넘 홀딩스의 고객들이 한지호의 치료에 만족하면 소개를 시켜준 유건영도 더 큰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유건영처럼 지속적으로 새로운 VIP들을 소개해줄 수 있는 인맥은 소중하기 그지없었다.
그와의 대화 도중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도 수확이었다.
“제대로 엑셀을 밟아보자.”
한지호의 혼잣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강남 중심부에 원화 한의원을 연 것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이제 엑셀을 밟고 속도를 높이며 질주 할 차례다.
방송 출연과 본격적인 홍보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줄 것이다.
엑셀을 밟겠다고 다짐한 한지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갈지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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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전 모든 출연진이 모여 리딩을 하기로 한 날, 한지호는 상암으로 차를 몰았다.
MBS는 여의도와 일산, 그리고 상암에 사옥을 가지고 있다.
원래는 여의도가 방송국들의 메카였지만 작년부터 상암 시대가 열렸다.
MBS를 비롯해 주요 방송국들이 상암에 신사옥을 건설했고,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상암에서 촬영하고 있다.
월드컵 경기장을 끼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방송국 사옥과 미디어 빌딩이 늘어선 상암 신도시가 나온다.
미래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암은 강북과 강남을 잇는 서울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MBS 사옥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한지호는 빌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사옥 지하 2층과 1층에 푸드 코트를 비롯한 복합 몰이 들어서있고, <건강 백서, 진짜! 가짜!>팀이 오늘 지하의 이자까야 한 곳을 통째로 빌렸기 때문이다.
차가 막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한지호가 서둘러 걸었다.
MBS 직원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옥 지하의 몰을 이용하고 있었다.
독특한 풍경을 지닌 상암 신도시 전체가 서울 시민들에게 또 하나의 여가 공간이 된 것 같았다.
“저기다.”
한지호는 약속 장소인 이자까야를 발견했다.
이자까야 입구에 ‘오늘은 사정상 외부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라는 입간판이 서있었다.
한지호는 성큼성큼 이자까야 안으로 들어섰다.
조명이 살짝 어두웠지만 채성일 PD를 찾기 어렵지 않았다.
이자까야 중앙에 테이블 여러 개를 붙여 놓았고, 채성일이 꼭짓점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조연출 PD와 작가진, 조명과 오디오 분야의 스탭들도 모두 모여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이미 테이블 위에 다양한 안주가 깔려 있었고, 다들 맥주나 사케를 한 잔씩 걸친 것 같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지호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등장에 일순 이자까야 전체가 조용해졌다.
채성일은 반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지호를 소개했다.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 원장님이십니다. 우리 프로그램의 핵심 멤버이시죠.”
채성일의 소개에 맞춰 한지호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프로그램과 관련된 사람들이 전부 모인 자리이니 격식을 갖췄다.
“한의사 한지호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천히 한 분 한 분 따로 인사를 드리며 통성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짝짝짝짝짝-!
대표 작가가 너스레를 떨며 박수를 치자 다른 스탭들도 동참했다.
의례적이지만 떠들썩한 환영 인사를 받은 한지호는 채성일 옆에 앉았다.
채성일은 그가 앉자마자 빈 잔에 사케를 채워주며 입을 열었다.
“한 원장님, 이쪽은 프로그램 메인 MC를 맡은 문주연 아나운서입니다. 문 아나, 이쪽은 내가 여러 번 말한 한 원장님이셔.”
한지호의 맞은편 자리에는 단아한 인상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몇 개의 TV 프로그램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