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MBS에서 대놓고 키우는 여자 아나운서 문주연이 MC를 맡는다는 이야기는 진즉 들었었다.
그러나 직접 만나게 되니 기분이 남달랐다.
문주연의 이미지와 분위기도 기대 이상이었고, MBS 차원에서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밀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주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지호입니다.”
문주연은 아나운서답게 말투가 조금 딱딱했다.
외모, 말투, 옷차림 등에서 단정하고 이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렇다고 거만하거나 차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한지호는 문주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녀도 한지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얽히고 있을 때, 채성일이 또 다른 누군가를 소개시켰다.
“한 원장님, 이 분은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시자 식품의학 전문가이신 양승찬 원장님이십니다.”
문주연 옆에 앉은 남자가 양승찬이었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양승찬은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스마트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얼핏 한류 스타로 유명한 배용준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한지호는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지호입니다.”
“양승찬입니다.”
양승찬의 반응은 냉랭했다.
악수도 마지못해 하는 것 같았다.
문주연이 단정하지만 차가운 느낌을 풍기지 않는 것과는 달랐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 채성일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 원장님도 오셨고, 우리 팀원들이 모두 모였으니 다시 건배를 합시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 대박을 위하여-!”
“대박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잔을 높이 들고 건배사를 외쳤다.
그 덕에 한지호와 양승찬 사이의 묘한 기류는 스리슬쩍 무마됐다.
하지만 한지호는 자신을 향한 양승찬의 차가운 눈빛을 잊지 않았다.
첫 촬영을 앞두고 가진 전체 모임에서 미묘한 불꽃이 튀려다 만 것 같았다.
8장, 쇼 닥터(show docto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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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촬영 날이 됐다.
수요일 아침, 한지호는 얼마 전 새로 산 제냐의 양복을 갖춰 입었다.
방송국 의상실에서 제공하는 옷을 입어도 되지만 몸에 딱 맞는 수트를 입고 싶었다.
요즘 한지호가 구매하는 수트 브랜드는 알마니나 제냐 등급이다.
방송국 의상실에 이런 브랜드의 수트보다 더 좋은 옷이 있을 리 없었다.
작가가 말해주는 의상 컨셉을 지키면서 개인 옷을 입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주 1회 촬영을 위해 따로 패션 코디를 구하고 옷을 협찬 받는 것도 오버이니 말이다.
피부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제냐 수트를 입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선 한지호는 기분 좋게 운전을 했다.
촬영 시작 시간은 오후 1시.
오전 11시까지 상암 MBS 사옥에 도착하면 된다.
출근 시간을 넘겨 차가 막히지 않는 시간이라 운전을 하기 딱 좋았다.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이었다.
이맘때의 가을 날씨가 일 년 중에서 드라이브를 하기 가장 좋은 편이다.
선루프를 열고 가을 바람을 만끽하며 상암까지 달려간 한지호는 MBS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지하주차장에는 누구나 차를 세울 수 있다.
외부 사람들도 MBS 사옥 지하에 있는 쇼핑몰과 푸드 코트 등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층 로비를 지나쳐 방송국 안으로 들어가는 건 엄격하게 통제 되고 있다.
로비에는 경호 직원들이 상주하는 것은 물론, 신분증이나 방문증을 인식시켜야 문이 열리는 차단막이 설치 돼 있었다.
MBS가 유난을 떠는 게 아니었다.
다른 지상파 방송국이나 케이블, 종편 방송국 사옥을 가도 1층 로비의 보안은 철저한 편이다.
방송국이 보안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있다.
내부에서 돌아다니는 프로그램 기획안이나 편성 계획서 같은 기밀 문서들의 유출을 막기 위함이다.
또 만약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지 않으면 연예인들을 보려는 팬클럽 회원들의 방문으로 방송국 복도가 시끌시끌해질 게 뻔했다.
한지호도 오늘 이전까지는 방송국 안으로 들어가 볼 기회가 없었다.
1층 로비에 다다른 그는 안내 데스크로 걸어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내 직원의 기계적인 물음에 한지호가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오늘 촬영이 있어서 왔습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에 출연하게 된 한지호라고 합니다.”
프로그램 이름과 방문 목적을 밝히니 안내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실제 촬영이 있는지, 또 출연진 리스트는 어떻게 되는지 컴퓨터로 확인을 하는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신분증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여기 있습니다.”
한지호는 지갑 속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안내 직원에게 면허증을 건넨 그가 질문을 던졌다.
“매번 방문할 때마다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는지 궁금하군요.”
“아, 아니에요. 고정 출연진이시니 6개월 단위로 방문증을 만들어 드릴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신분증을 확인한 여직원이 계속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곧이어 컴퓨터 옆에 있는 카드 발급기에서 새로운 방문증이 나왔다.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은 면허증과 방문증을 함께 내밀며 말했다.
“정기 방문증 발급 해드렸습니다. 6개월이 지나면 기간이 만료되니 번거로우시더라도 그때는 한 번 더 데스크에 말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방문증을 받은 한지호는 차단막으로 걸어갔다.
MBS 직원들은 사원증을 인식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예인을 비롯해 자주 방송국을 찾는 사람들은 별도의 방문증이 있는 것 같았다.
한지호도 방금 발급 받은 따끈따끈한 방문증을 사용 할 타이밍이다.
삐빅-
카드 모양의 방문증을 붙이니 자동으로 차단막이 열렸다.
교통 카드를 쓰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버스나 지하철을 문 대신 MBS 방송국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괜히 신기한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방송국 안으로 들어가는 거라 그런지 감회가 남달랐다.
차단막을 지나 1층 내부로 진입한 한지호는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프로그램 구성 작가는 방송국에 도착하면 4층 출연자 대기실로 오라고 했다.
MBS 직원들 틈에 섞여 엘리베이터를 탄 한지호는 4층 버튼을 눌렀다.
띠딩!
경쾌한 알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춰 섰다.
상암 사옥은 최신 공법으로 건설된 지 얼마 안 됐다.
그에 맞춰 엘리베이터도 뭔가 독특했고, 멈출 때마다 울리는 알람 소리도 딱딱한 기계음보다 훨씬 듣기 좋았다.
“넓긴 진짜 넓구나.”
4층에 내린 한지호는 안내 표지판을 찾았다.
MBS 상암 사옥이 워낙 넓어서 표지판 없이 길을 찾기 힘들었다.
방송국에 자주 들리며 익숙해지면 모를까, 초행길인 그에게 상암 사옥은 미로나 다름없었다.
“저쪽이네.”
출연자 대기실의 위치를 알아낸 한지호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두 번의 커브를 돌자 대기실이 늘어선 구역이 나왔다.
대기실 문 앞에는 각 출연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한지호 원장님 -
자신의 이름이 붙어있는 대기실을 찾아낸 한지호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다른 사람과 같은 대기실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단독 대기실이 필요하다.
사실 연예인들의 경우 어느 정도 이름값이 있어야 단독 대기실을 배정 받는다.
웬만한 연예인들은 여럿이 함께 쓰는 공동 대기실을 이용하기 마련이다.
MBS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게 대기실 배정에서부터 느껴졌다.
끼이익!
문을 열자 넓은 대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지만 깔끔한 소파와 테이블, 메이크업을 받을 수 있는 거울과 화장대, 게다가 별도의 화장실까지 딸려 있었다.
이만하면 원로 연예인이나 최정상급 인기를 누리는 탑 스타들에게 배정 되는 대기실 같았다.
한지호는 소파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지급되는 출연료도 큰돈은 아니지만 적지 않다.
방송국에서 대우를 해준다는 건 기대가 크다는 뜻이고, 그만큼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시청률과 화제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프로그램은 그리 많지 않다.
한지호는 전문 방송인이 아니지만 <건강 백서, 진짜! 가짜!>가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대박 나야 출연자인 한지호도 덩달아 뜰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방송에 출연하는 이유는 하나다.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더 많은 VIP 환자들이 원화 한의원을 찾게 만들려는 것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원화 한의원을 찾는 VIP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방송을 통해 원장 한지호의 가치를 높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할 수 있어.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한의사? 충분히 될 수 있다. 잘 하자, 한지호.”
첫 촬영을 앞둔 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호흡을 다스렸다.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한지호가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프로그램 메인 작가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 원장님, 일찍 오셨네요.”
“네.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습니다. 약간은 긴장이 되네요.”
“첫 방송이시니 당연히 긴장이 되시겠지만 편안하게 생각해주세요. 그럼 메이크업부터 받으시겠어요?”
“그러죠.”
“대기실에서 메이크업 다 받으시면 막내 작가가 내려와서 안내해드릴 거예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한 원장님.”
“고생하세요.”
메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자 진짜 TV 프로그램 촬영에 돌입한다는 실감이 났다.
한지호는 평소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유명해지기 위한 그의 승부수가 과연 TV에서 통할지 머지않아 결판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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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들 하지 마시고, 생방송 아니니까 실수하면 끊어서 갈 수 있습니다. 너무 대본에 충실하려고 애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 편안하게 흐름대로 가보겠습니다!”
스튜디오를 진두지휘하는 채성일이 목소리를 높였다.
메인 MC인 문주연은 MBS에서 차세대 여자 간판으로 키우는 아나운서라 방송 경험이 풍부하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면서 식품 건강 서적을 여러 권 집필한 양승찬도 케이블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한지호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처음인 초짜였다.
채성일은 출연진이 긴장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정작 여러 대의 카메라 앞에 선 한지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스튜디오라는 환경이 생소하지만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뿐, 별로 긴장이 안 됐다.
어쩌면 황만금과 김해수를 치료하며 극도의 긴장 상태를 경험했기에 웬만한 일에는 덤덤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한지호에게 돈과 명성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험치도 안겨준 것이다.
“그럼 촬영 들어갑니다. 준비들 하시고…… 고!”
채성일의 우렁찬 외침을 신호로 촬영 스튜디오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카메라 감독들은 각자 맡은 인물을 포착했고, 조명과 음향 스텝도 한 치의 실수가 없도록 자리를 지켰다.
메인 MC 문주연이 3번 카메라를 보고 입을 열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의 역사적인 첫 오프닝 멘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아나운서 문주연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건강 비법에 노출 돼 있었습니다. 풍문으로 떠도는 각종 비법과 식품들, 과연 정말 건강에 좋은 것들일까요?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그래서 시청자 여러분이 진짜 건강에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저희가 나섰습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는 무성한 소문 속에서 진짜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과 피해야 할 가짜 비법을 확실하게 구분해내겠습니다. 먼저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짜와 가짜를 파헤칠 전문가 두 분을 모셨습니다.”
문주연은 조금의 실수도 없이 매끄럽게 오프닝 멘트를 전달했다.
단아한 외모로 또박또박 표준어 발음을 뱉어내는 그녀의 지적인 모습에서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화려한 연예인들과는 또 다른 독보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문주연에게 정신이 팔려있을 틈이 없었다.
그녀의 오프닝 멘트를 이어받아 양승찬과 한지호가 시청자에게 인사를 할 차례였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식품 전문가 양승찬입니다.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진짜 도움이 되는 건강 백서를 작성 하겠습니다.”
양승찬은 일부러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며 소개 멘트를 마쳤다.
케이블 방송에 출연한 경험자답게 의도적으로 스마트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다.
지이잉-
이제 한지호를 담당하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한지호는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쳐다봤다.
너무 뚫어지게 응시하면 어색한 티가 난다.
카메라를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미묘한 시선처리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