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병원을 키우고 운영할 것인지, 사람은 얼마나 뽑아서 배치할 것인지. 자네가 그리는 큰 그림을 내게 보여주면서 신용증을 사용하게.”
“제게 꼭 필요한 조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자네가 그릴 그림, 기대하고 있겠네.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의술 말고도 능력이 넘치는 친구니까.”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짧은 대화를 마친 한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만금의 서재 안에서 무엇보다 값진 조언을 듣고 가슴에 새겼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과 식구들을 지켜낼 수 있는 든든한 성.
병원을 연다는 건 그러한 성을 만들어 영주가 되는 일이다.
새롭게 마음을 먹은 한지호의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졌다.
고민은 끝났으니 앞으로 나갈 일만 남았다.
황만금의 저택에서 나온 한지호의 눈동자가 열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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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습니다.”
한지호가 그 날의 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자동차가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가에 능숙하게 차를 세운 부동산 중개업자가 손가락을 들었다.
“이 빌딩 2층입니다.”
“고층 빌딩이네요?”
“네, 5층 위로는 사무실 전용으로 쓰이는 빌딩인데 공실률이 아주 낮습니다. 변호사, 세무사 등 전문직 사무실이 많이 입주해 있습니다.”
“대로변 건물은 아니지만 입지가 괜찮군요.”
한지호는 턱을 쓰다듬으며 빌딩 주위를 돌아봤다.
전문직 종사자들의 사무실이 많이 입주해있는 빌딩이라면 병원을 차리기 적합한 건물이다.
사무실 사람들이 오고 가며 같은 빌딩에 있는 한의원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2층이라는 점과 대로에서 살짝 벗어났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은 감이 안 잡힙니다.”
“그러실 겁니다. 개원은 워낙 중요한 일이니 며칠 더 천천히 둘러보시고 생각하시지요.”
부동산 중개업자는 한지호를 재촉하지 않았다.
개원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아는 까닭이다.
한지호는 이미 그를 통해 신사동 오피스텔을 계약하며 만만찮은 수수료를 안겨준 특급 고객이다.
그렇기기에 더 친절히 대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대로변에 위치한 매물들 위주로 보시겠습니까? 권리금이 꽤 비싼 곳이지만 메리트가 확실한 장소입니다.”
“여러 곳을 최대한 많이 보고 비교하는 게 좋겠죠. 가봅시다.”
“네, 차에 타십시오.”
굳이 빌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외부를 둘러본 한지호는 다시 차에 올랐다.
아무래도 며칠 내내 강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병원 입지를 정하는 것부터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당분간 중요한 치료에 매달릴 일은 없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청우단 주문과 고객 관리도 조기운이 맡아서 하고 있기에 부담이 덜했다.
낮에는 부동산을 탐방하고 저녁에는 청우단을 제조하면 된다.
생각보다 조기운의 존재가 큰 힘이 되고 있었다.
황만금도 성을 쌓을 때 믿을만한 사람을 정하고, 그가 자기 역할을 하게끔 만드는 게 핵심이라 말했었다.
한지호는 새삼 인재의 중요성을 느꼈다.
지금은 조기운 한 명만으로도 든든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병원이 커지고, 그가 하는 일이 많아지면 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조자룡의 명맥을 이은 조기운이 운명처럼 눈앞에 나타났듯 하늘이 인재를 내려주길 바랄 뿐이었다.
빵- 빵빵!
그때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한지호의 상념을 방해했다.
퇴근 시간이 한참 멀었는데 강남의 도로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아주 야심한 새벽을 제외하면 강남은 하루 종일 차가 막힌다고 봐야 한다.
처음에는 무슨 이런 동네가 다 있나 싶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웬만한 교통 체증에는 신경도 안 쓰게 됐다.
뉴욕 맨해튼에 사는 사람들이 교통 체증을 신경쓸 리 없다.
강남은 아시아의 맨해튼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한지호는 느긋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목적지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오늘은 부동산 중개업자의 차로 움직이기에 짜증도 덜 났다.
만약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면 막무가내로 끼어드는 자동차들을 보며 화를 가라앉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차가 정말 많이 막히네요.”
“고생 많으십니다.”
한지호는 답답해하는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건성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오너 드라이버가 된 후 운전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막히지 않는 도로에서 시원하게 질주할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들다.
그러나 꽉 막힌 서울 시내, 특히 몇 억짜리 차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강남에서의 운전은 고역이다.
운전대를 잡은 중개업자는 갑갑했는지 창문을 살짝 내리며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DJ들의 멘트와 음악은 운전의 답답함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자동차 오디오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DJ와 게스트들의 멘트, 그리고 익숙한 음악에 귀를 맡기니 어느덧 정체 구간을 지나쳤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도로변에 보이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입지와 조건 등을 알려줬다.
한지호는 창밖을 유심히 지켜보며 강남 일대의 입지 조건과 대략적인 임대료를 파악했다.
이렇게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전체적인 흐름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됐다.
“이번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중개업자는 역삼역 근처의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들어오면서 언뜻 보기론 지하주차장이 있을 정도의 대형 빌딩은 아니었다.
차에서 내린 한지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질문을 던졌다.
“강남이라고 해도 10층 이상의 큰 빌딩에 지하주차장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긴 의외네요? 5층 정도로밖에 안 보이던데.”
“5층 건물 맞습니다. 하지만 보시는 것처럼 지하 1층과 2층을 주차장으로 만들어 놓았죠. 그만큼 건물주가 투자를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건물을 더 높이 올리지 않았죠? 마음만 먹으면 10층 이상을 올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텐데.”
“대로변에 있어서 건설 당시 주변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일조권 문제도 있고, 허가를 받기도 까다롭고. 무엇보다 건물주가 난잡하지 않고 깔끔한 메디컬 전문 빌딩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여기 말고도 여러 빌딩을 소유한 사람이니 크게 아쉬울 게 없었을 겁니다.”
“깔끔한 메디컬 전문 빌딩이라…….”
“네. 입지도 역삼역 부근 대로변이고, 주차장이나 건물 내부 시설도 아주 훌륭합니다. 대신 임대료가 주위 시세보다는 더 비싸다는 점이 걸립니다. 올라가서 자세히 보시죠.”
이런저런 정보를 얻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린 한지호와 중개업자는 우선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깥에서 전체적인 입지와 빌딩의 모습 등을 보기 위해서였다.
“1층의 절반은 로비로 쓰고, 나머지 공간은 성형외과군요.”
“네. 지하주차장 직원과 로비의 안내데스크 직원, 그리고 건물 경호팀 관리비는 임대료에 포함 돼 있습니다.”
바깥에서 바라보니 왜 부동산 중개업자가 극찬을 한 곳인지 알 것 같았다.
역삼역까지 걸어갈 수 있는 접근성, 대로변에 붙어있어 어디서나 보이는 입지, 완벽하게 구비 된 지하주차장, 그리고 5층에 불과하지만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지어진 깔끔한 빌딩 외관까지.
건물주가 메디컬 전문 빌딩이라는 야심을 갖고 꼼꼼하게 시공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빌딩의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1층 절반은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와 안내 데스크로 쓰고, 나머지 절반은 성형외과의 상담실로 사용되는 중이었다.
1층의 반을 상담실로 쓰는 성형외과가 2층 전체를 사용하고, 3층은 피부과, 4층은 치과, 5층에는 안과가 들어서 있었다.
메디컬 전문 빌딩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건물주의 야심대로 다양한 병원이 5층을 알차게 채운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문제가 없다면 부동산 중개업자가 한지호를 데려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형외과 자리가 매물로 나온 겁니까?”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입지가 좋다고 하셨으니 1층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리하십니다, 한 선생님.”
중개업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역삼역 대로변 빌딩의 1층과 2층을 사용하는 성형외과 자리가 매물로 나왔다.
한의원을 개원 할 자리로는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상담실로 쓰이고 있는 1층의 공간만 임대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강남에서 성형외과가 자리를 빼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지호의 물음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도 다 지나간 이야기 입니다. 역삼은 조금 외곽에 속하고, 성형외과들의 격전지인 논현동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성형외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경쟁이 심하다보니 못 버티고 망하는 병원들이 속속 늘어나는 중입니다.”
“그럼 이 빌딩의 성형외과도…….”
“쉬쉬하고 있지만 적자를 보면서 겨우 운영만 하는 겁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권리금도 못 받고 망할지 모르는 처지입니다.”
한지호는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5층 빌딩을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마음을 잡아끄는 빌딩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없지는 않았다.
워낙 좋은 입지로 인해 임대료가 무척 비쌀 게 뻔했고, 여러 의원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형외과도 버티지 못했다는 점이 찝찝했다.
‘겨우 2년 영업할 한의원을 여는 게 아니라 나만의 성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한지호는 황만금의 조언을 되새겼다.
그가 고개를 돌려 결정적인 질문을 날렸다.
“여긴 임대료와 보증금, 또 권리금이 어떻게 되죠?”
“1층만 보시는 거지요?”
“지금 성형외과가 쓰고 있는 1층과 2층 전부 관심 있습니다.”
“네?”
의외의 말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지호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원을 준비하는 한의사가 아니라 축성(築城)을 준비하는 군주의 눈빛이었다.
4장, 성을 쌓는다는 것 (2)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동산 중개업자는 한지호의 눈빛이 가볍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는 아이패드를 손에 들고 눈앞에 보이는 빌딩의 임대 시세를 찾아봤다.
로비를 제외한 1층 절반과 2층 전체를 빌리기 위한 보증금, 임대료, 그리고 권리금을 확실하게 알아보고 말해주려는 것이다.
한지호는 5층짜리 메디컬 전문 빌딩을 바라보며 중개업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보나마나 엄청나게 비싼 임대료가 책정 돼 있을 것이다.
성형외과가 망하고 나간다지만, 그런 이유로 임대료가 저렴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가 노리는 자리는 역삼역 부근의 대로변에 우뚝 서있는 최신식 메디컬 빌딩의 1층과 2층이다.
노른자 중의 노른자 위치를 노리면서 돈이 적게 들길 바라는 건 넌센스다.
그럼에도 눈앞의 빌딩 자리에 꽂힌 건 황만금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는 예상보다 일찍 개원을 준비하게 됐지만 어설프게 병원을 차리고 싶지 않았다.
상류층 사이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쌓았고, 대중적인 인지도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방송에 출연하며 더 유명해질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과감한 투자를 하고 싶은 것이다.
중복되는 투자를 막고, 처음부터 강남 바닥을 진동시킬 작정이었다.
단순히 적자를 보지 않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병원을 운영하겠다는 소심한 마인드가 아니다.
화려하면서 든든한 자신만의 성을 만들어 세상과 맞서 싸울 베이스캠프로 삼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1층과 2층을 동시에 임대하신다면 보증금 3억 원에 월 임대료가 3천입니다.”
“3억에 3천. 역시 강남이 다른 세계이긴 합니다.”
한지호는 높은 금액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헛웃음이 흐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보증금 3억 원에 월세 3천만 원.
강남 빌딩의 임대 시세를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이지만, 강남의 부동산 기준으로 볼 때 충분히 납득할만한 임대료였다.
이런 세상이니 임대업을 하는 건물주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직업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3억에 3천, 3억에 3천.”
한지호는 보증금과 임대료를 여려 번 곱씹으며 생각을 거듭했다.
오래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보증금과 임대료 이상의 수익을 올릴 자신이 있느냐의 문제다.
이만한 자금을 투자해서 최고의 입지에 병원을 열 지, 아니면 한 발 물러서 조금 더 효율적인 자리를 알아볼 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업자를 옆에 세워두고 길게 생각할 순 없었다.
아직 더 알아봐야 할 것이 남아있다.
“권리금은 얼마나 들 것 같습니까?”
“아시다시피 권리금은 건물주가 책정하는 게 아닙니다. 성형외과 원장이 정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현재로서는 제법 높게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의원을 개원하시면 성형외과 장비를 인수하실 이유가 없으니 따로 협상을 해보셔야 할 겁니다.”
“그쪽에서 원하는 금액이 대략 어느 정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