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50화 (50/255)

# 50

주치의 역할을 했던 한지호는 황만금의 생활 패턴을 꿰뚫고 있었다.

곧이어 그가 운전석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만약 황만금이 다른 일정이 있으면 오늘 만나는 건 어려워진다.

쓸데없이 알마니 정장을 차려입은 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지호는 일종의 테스트를 하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황만금이 반가워하며 시간을 내준다면 여전히 한지호를 은인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 정도 대우는 받아야 신용증을 내밀고 큰 부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삐이이- 삐이이-

무미건조한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다.

설마 전화 자체를 받지 않으려는 것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스마트 폰 너머에서 황만금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오! 한 선생! 이게 얼마만인가?”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님.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나야 정신없이 지내고 있고, 들리는 말에 자네도 주가가 팍팍 올라갔다면서? 좋은 일일세, 좋은 일이야!”

“회장님 덕분입니다. 태자병을 치료한 이후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게 됐습니다.”

“그게 왜 내 덕분인가, 다 자네의 의술이 만들어낸 복이지.”

황만금의 음성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노인의 목소리답지 않게 에너지가 넘치는 걸 보니 컨디션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

태자병이 완치된 이후 한지호가 지키라고 말한 원칙을 잘 따르는 모양이었다.

만약 예전처럼 여자와 육식, 돈 관리에 푹 빠졌다면 지금처럼 생기 넘치는 목소리를 내진 못 했을 것이다.

한지호는 전화 통화만으로 황만금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회장님, 그간 건광 관리를 아주 잘 하셨군요. 생활 습관도 준수하게 지키신 것 같습니다.”

“나한테 스파이라도 심어 놓았나? 어찌 그걸 아는가?”

“목소리만 들어도 느껴집니다.”

“허허, 역시 자네는 대단한 명의일세. 아니, 아주 무서운 의사야.”

황만금은 전화 통화만으로 몸 상태를 간파하는 한지호에게 혀를 내둘렀다.

가볍게 황만금을 놀래켜준 한지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회장님, 실례인 걸 알지만 혹시 오늘 뵐 수 있겠습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급한 일인가?”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당일 아침에 연락을 해서 나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네.”

황만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평창동에서도 알아주는 큰손 투자자인 그를 만나는 건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일 아침에 급히 연락을 해서 만남을 요청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황만금이 거절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한지호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한 선생, 자네는 극소수의 예외에 속하는 사람이지. 다른 일정이 있네만 집사에게 말해 시간을 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언제쯤 올 텐가?”

“지금 바로 가도 되겠습니까?”

“이왕 말을 꺼낸 것 뜸 들여서 어디다 쓰겠나. 바로 오게. 기다리고 있지.”

“알겠습니다. 금방 뵙겠습니다.”

한지호는 산뜻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황만금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인물이 아니었다.

여전히 태자병을 치료해준 한지호를 은인으로 여기고 있는 게 확실했다.

무례하고 당혹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모든 스케줄을 뒤로 미룬 게 그 증거였다.

툭툭!

한지호는 알마니 정장의 깃을 바르게 폈다.

아침부터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마음을 다잡은 게 헛수고가 아니었다.

부우우웅-

아우디 A5의 엔진 소리도 오늘따라 더욱 경쾌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엑셀을 밟았다.

굳이 네비게이션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목적지는 평창동에 우뚝 솟은 황만금의 저택이다.

한지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준 평창동으로 다시 나아가고 있었다.

+++

딩동-!

초인종을 누르니 지체 없이 대문이 열렸다.

황만금의 저택은 여전히 위압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예전처럼 주눅 들지 않았다.

이 저택에 매일 같이 드나들며 익숙해졌고, 지금은 1%에 속하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선생님.”

계단을 올라 정원을 가로지르니 집사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놓고 한지호를 무시했던 집사지만 이제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황만금이 태자병으로 고생할 때 한지호가 보여준 신기(神技)에 가까운 의술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중년을 넘긴 집사의 눈빛에서 진심어린 존경이 묻어 나왔다.

그는 한참 어린 한지호를 100% 인정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집사님.”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갑자기 연락을 드려 스케줄이 꼬였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한 선생님이 오신다는 말에 회장님께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만큼 한 선생님을 중히 여기고 계십니다.”

집사로부터 또 한 번 황만금의 신뢰를 확인 받으니 속이 든든한 기분이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회장님께선 서재에 계시죠?”

“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굳이 안내가 필요 없지만 집사가 앞장섰다.

넓고 화려한 저택 실내에는 예전처럼 경호원과 메이드들이 곳곳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집사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매일 저택 안에서 얼굴을 마주치고 살아가는 이들의 생리가 궁금했지만 한지호의 소관이 아니었다.

2층 서재 앞에 다다른 집사가 노크를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똑똑-

“회장님, 한 선생님이 왔습니다.”

“얼른 들어오게!”

서재 안쪽에서 황만금의 음성이 울렸다.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서재 문을 열어줬고, 한지호는 그에게 눈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저벅.

서재 안쪽의 책상에 앉아있던 황만금이 일어나 걸어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동작에서 힘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정정한 그의 모습에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 회장님.”

“이렇게 또 보니 좋구만, 좋아. 그간 나도 격조했네.”

황만금과 한지호가 진한 악수를 나눴다.

태자병이 완치된 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그는 예전보다 더 팔팔해 보였다.

원래 지병을 극복하면 컨디션이 바짝 오르는 법이다.

무엇보다 한지호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생활 습관을 고친 게 황만금의 건강 비결이었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뿌듯합니다.”

“모두 자네의 공이니 마음껏 뿌듯해하게. 이 서재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니 나도 감회가 새롭네.”

“회장님께서 수칙을 잘 지키고 계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자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예전처럼 무분별하게 살았다면 또 태자병에 걸렸으려나?”

“그건 알 수 없지만, 지금처럼 정정한 모습은 아니었을 겁니다.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내 어찌 최고의 명의인 자네의 눈을 속이려 들겠나, 허허허허! 아무튼 채식 위주의 생활, 금욕, 돈 관리에 너무 집착하지 않기라는 어려운 과제들을 잘 수행해온 보람이 있구만.”

건강 상태를 칭찬 받은 황만금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이 든 노인에게는 건강 칭찬처럼 듣기 좋은 말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태자병을 고친 명의 한지호가 직접 인정해줬으니 황만금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가? 나야 자네를 오랜만에 봐서 반갑지만,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하고 찾아온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전화로 말씀드린 것처럼 회장님의 조언을 구하고, 또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어서 급히 찾아오게 됐습니다.”

“나의 조언과 도움이라.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세.”

황만금의 서재는 무척 넓어서 책상과 책장들 외에도 편히 앉을 수 있는 소파가 따로 구비 돼 있었다.

소파에 앉아 황만금을 마주 본 한지호는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흐트러지거나 애매한 모습을 보이면 황만금이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환자에게 침을 놓을 때와 마찬가지로 신경을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병원을 열지 않고 프리랜서 한의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거야 익히 잘 알고 있지.”

“태자병을 고친 후에도 자유로운 신분으로 다른 환자들을 치료하고 약을 지었습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유명세를 얻기도 했습니다.”

“자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는 소식은 들었네. 좋은 일이니 흐뭇해하고 있었거늘, 문제가 생겼는가?”

“반짝 떠오른 인기야 금방 가라앉겠지만, 어쨌든 이름이 알려진 이상 확실한 신분과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계속 프리랜서 한의사로 활동하다가 자칫하면 구설수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요.”

“흐음……. 그것도 일리가 있는 고민이구만.”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지호가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골랐다.

허공에서 황만금과 한지호의 눈빛이 얽혀들었다.

그는 길게 뜸을 들이지 않고 속마음을 뱉어냈다.

“제 이름으로 병원을 차리는 게 어떨지, 회장님의 의견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주사위가 던져졌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한지호는 인생의 향방을 바꿀 기로 앞에 서있었다.

4장, 성을 쌓는다는 것 (1)

“여기는 어떠세요?”

“너무 뒷골목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임대료가 저렴합니다. 대로변은 워낙 비싸서요. 자리도 잘 안 나고.”

“요즘 공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외진 곳 이야기죠.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은 권리금도 어마어마합니다. 괜히 강남이겠어요.”

한지호는 부동산 중개업자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사동 오피스텔을 소개해준 부동산을 찾아 병원 입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미뤄왔던 개원을 하고, 단단한 기반을 갖춘 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한의사가 되는 길을 걷겠다고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죠.”

“알겠습니다.”

한지호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본 중개업자가 이동을 권했다.

강남은 넓고, 병원이 들어설 수 있는 건물은 무수하게 많다.

최대한 발품을 팔며 여러 곳을 둘러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지호는 중개업자의 자동차 조수석에 앉은 뒤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평창동 저택에서 황만금과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이제야 그 이야기를 꺼내는군. 자네가 언제쯤 신용증을 들고 찾아와 개원을 말할지 기다리고 있었다네.”

황만금은 병원을 열고 싶다는 말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오히려 고민을 꺼낸 한지호가 더 당황할 정도였다.

“제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셨습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자네의 능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 금방 명성을 얻을 거라 확신했네. 이름이 알려지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켜줄 성이 필요해지는 법, 사업에게는 회사가 성이라면 의사에게는 병원이 성이겠지.”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더 큰 물에서 자유롭게 놀기 위해서는 든든한 울타리,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소속 없이 떠도는 낭인 무사에게 세상은 가혹해지는 법이지. 자네가 더 큰 유명세를 얻고, 곤혹스런 일에 빠지기 전 결심을 내려서 다행이네.”

“그럼 도와주시겠습니까?”

“내 신용이 자네에게 있지 않나. 그러나 지금으로선 부족해.”

황만금은 눈매를 날카롭게 만들어 한지호를 쳐다봤다.

노회한 사업가의 연륜이 그의 눈빛에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개원을 고민 한다고 했지만 속에서 결심은 끝난 것 같고, 그렇다면 사업계획서가 있어야하지 않겠나?”

“사업계획서…….”

“자네의 의술은 국내 한의사들 중에서 최고라고 믿네. 그렇게 놀라운 의술만으로 계속 명성을 쌓으며 큰 돈을 벌 수 있겠지. 하지만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세.”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회장님.”

“중세의 성(城)을 떠올려보게. 영주 한 명이 강하다고 튼튼한 성이 완성 되는가? 아닐세. 바닥부터 기초 공사를 확실히 하고, 믿을만한 사람들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주어야 하네. 그래야만 외부의 공격에서 자네 자신과 식구들을 지킬 수 있는 성이 완성되는 것이지.”

황만금이 비유를 들어 말하는 이야기가 가슴 깊이 콕콕 박혔다.

그의 험난한 인생이 담긴 조언이라 그런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한지호는 두 눈을 빛내며 돈 주고도 못 들을 이야기를 경청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오게. 병원이 들어설 입지, 해당 입지의 보증금과 월세, 권리금, 그리고 입지 선정을 한 이유까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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