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성형외과 의료기기를 제외하면 1억입니다.”
“망해서 나가는 처지에 1억이라. 성형외과와는 아예 관련이 없는 한의원을 열 생각인데 권리금이 걸리긴 하네요.”
“강남 바닥 권리금이야 정하기 마련이라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형외과에서 적자를 보는 상황이라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봐도 될 것 같군요.”
“이 곳이 마음에 드십니까?”
“네. 1층과 2층 모두를 임대하는 조건으로 건물주와 협의를 해주세요. 저도 더 알아보면서 계약을 할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한지호의 말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급히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사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 권리금을 지불하면 눈앞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한지호는 이유 모를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왠지 눈앞에 보이는 빌딩 1층과 2층에 자신의 한의원이 들어설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5층짜리 메디컬 전문 빌딩 전체를 한의원으로 잡아먹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상만 해도 짜릿해지는 기분이었다.
강남 복판의 5층 빌딩 전체가 자신의 한의원이 될 거라고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지호는 스스로의 꿈이 허황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껏 기적을 만들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라니요, 이게 제 일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자리에서 개원하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한지호의 말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만약 임대 계약이 성사되면 그는 꽤 큰 금액을 중개 수수료로 가져가게 된다.
신사동의 럭셔리 오피스텔을 계약했던 한지호는 이미 그의 VIP 고객이 돼 있었다.
강남 전역을 돌아다니며 충실하게 정보를 수집한 한지호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대략적인 시세와 조건을 파악했고, 마음을 잡아끄는 장소를 발견했으니 하루만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제 보금자리로 돌아가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일만 남았다.
한지호는 착실하게 더 높은 영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
딩동-
한지호가 벨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커다란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는 다시 황만금의 평창동 저택을 찾았다.
한동안 강남 일대의 부동산 입지를 조사하고 사업계획서를 썼기 때문이다.
신용증을 들고 찾아와 병원을 열고 싶다고 말한 한지호에게 황만금은 정밀한 사업계획서를 요구했다.
오늘 한지호는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의술은 굳이 더 증명할 필요가 없다.
황만금은 누구보다 한지호의 의술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다만 거액의 투자를 받아 병원을 열 자격이 있는지, 단순한 한의사가 아니라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테스트 받는 것이다.
평창동의 큰손 황만금은 돈 앞에서 무시무시하게 냉정해진다.
아무리 한지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도 무작정 허튼 돈을 쓸 인물은 아니다.
한지호가 신용증을 내밀며 투자를 요청해도 얼마만큼의 돈을 쓸지는 황만금의 판단에 달려있다.
신용증을 믿고 허술하게 준비를 했다면 황만금으로부터 제대로 된 투자를 받기 힘들 것이다.
‘없다고 생각하자.’
한지호는 신용증의 존재를 머리에서 지웠다.
그는 저택 계단을 올라가며 한 사람의 사업가로서 투자자를 만나는 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황만금의 태자병을 고쳐줬던 것도, 그로부터 생명의 은인 대우를 받는 것도 잊어야 한다.
사업계획서를 보여주고 설명을 할 때 개인적인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황만금보다 더 냉정하고 철저한 자세로 사업계획서를 풀어 놓아야 승산이 있다.
한지호는 신용증을 빌미로 어설프게 투자를 받고 싶지 않았다.
돈에 대한 감각 하나로 어마어마한 거부가 된 황만금의 마음을 100% 움직이고 싶었다.
“오셨습니까.”
정원 건너편에서 여느 때처럼 집사가 한지호를 맞이했다.
한지호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집사와 인사를 나눴다.
생전 처음으로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들고 왔으니 긴장이 되는 게 당연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오늘은 평소와 달리 긴장이 되는군요.”
“무슨 일인지 들었습니다. 처음 회장님을 뵀을 때 한 선생님이 보여줬던 패기를 잊지 마십시오. 그거 하나면 회장님께서도 흡족해 하실 겁니다.”
집사가 의외의 조언을 해줬다.
그는 반평생 황만금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집사의 조언은 빳빳하게 굳어있던 한지호의 어깨를 풀어줬다.
“그때의 패기…….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집사님.”
“올라가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집사는 살짝 웃음을 짓고 등을 돌렸다.
그를 따라 저택 이층의 서재로 올라간 한지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할 것 없다.
처음 평창동 저택으로 불려와 태자병을 진단하고 치료를 자신했을 때처럼 패기와 깡다구를 보여주면 된다.
어차피 그는 전문적인 사업가가 아니다.
경영학 수업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처지였다.
그저 한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준비를 했으니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될 것 같았다.
똑똑-
“회장님, 한 선생님이 왔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노크를 하고 허락을 얻은 집사가 문을 열어줬다.
한지호는 그와 눈을 맞추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하지 못했던 집사의 조언이 긴장을 풀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갖게 해줬다.
이래서 세상 어디에나 배울 게 천지라는 옛말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어디서든 배움을 얻을 수 있다.
한지호는 처음 평창동 저택에 왔던 때를 회상하며 어깨를 쫘악 폈다.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님.”
“여전히 아주 좋은 컨디션으로 지내고 있지. 오늘은 자네가 온다고 해서 아침부터 몸이 더 가벼웠네.”
“빈말이신 걸 알지만 듣기 좋은 말씀이군요.”
“빈말이라니! 자네가 어떤 사업계획서를 들고 올지 기다리느라 기대되더군.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야.”
황만금은 눈을 크게 뜨고 한지호를 쳐다봤다.
사실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한 재산을 쌓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만 해도 막대한 수익이 창출된다.
그런데 한지호가 병원을 열겠다고 나서니 옛날 생각이 난 것 같았다.
아들, 아니 손자뻘의 한지호는 황만금에게 과거의 도전 정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가 한지호의 사업계획서를 기대하는 건 투자를 해서 이익을 보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한지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세상을 향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한지호는 황만금의 말년에 더없는 자극이었다.
“미리 다과를 준비시켜 놓았네.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들어보지.”
황만금이 책상에서 일어나 서재 복판의 소파로 걸어갔다.
소파 앞의 작은 테이블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홍차와 다양한 종류의 쿠키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한지호와 함께 먹을 다과를 준비해 놓은 것이다.
원래 황만금은 이렇게 손님 접대를 준비하는 성격이 아니다.
상대가 한지호이기에 나름 최대한 배려를 하며 신경을 쓴 셈이었다.
한지호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준비된 다과는 보나마나 값비싼 최고급 홍차와 수제 쿠키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입안을 감싸는 홍차의 향이 무척 그윽하고 좋았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한지호가 사업계획서를 꺼냈다.
깔끔하게 갈무리 된 몇 장의 A4 용지가 가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황만금에게 계획서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먼저 강남 일대에서 병원이 들어서기 좋은 부동산 입지와 임대 조건을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부동산 전문가와 함께 발로 뛰며 눈으로 확인한 것들입니다.”
“그렇지. 입지 확인은 무조건 발품을 팔아야 하는 법이야.”
“강남 지역 병원들의 집결지는 크게 논현동과 삼성동으로 나뉩니다. 논현동 일대에는 성형외과와 피부과를 중심으로 메디컬 단지가 형성 돼 있고, 삼성동 부근에는 좀 더 전문적인 중소형 병원들이 많습니다.”
“핵심부터 바로 짚고 넘어가지. 그래서 자네가 마음에 든 동네는 어디였나?”
“우선 순위를 정해 놓았습니다. 사업계획서에도 나오지만 제가 1위로 정한 곳은 역삼역 부근입니다.”
“역삼역? 어째서 그곳인가?”
“강남 일대 어디와도 접근성이 좋은 지역이고, 한의원이 들어서기 좋은 분위기입니다. 성형외과 위주에 지나치게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논현동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성동 부근은 주로 대학병원 과장 출신들이 개인 정형외과나 신경외과 전문 병원을 차리는 동네입니다. 이미 색이 정해진 지역보다는 접근성이 좋으면서 특정 과에 편중되지 않은 역삼동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황만금은 한지호의 설명을 들으며 사업계획서를 검토했다.
귀는 한지호에게 열어두고 눈은 계획서를 꼼꼼히 읽고 있었다.
예리한 눈빛으로 서류를 넘기는 황만금은 노회한 거물 투자자의 포스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곧이어 황만금이 사업계획서에서 한지호가 말한 입지를 찾아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보이네. 5층짜리 작은 빌딩이지만 지하철 역 부근 대로변에 있고, 병원들만 입주해서 산만하지 않은 느낌이고……. 대신 그만큼 비싸겠지?”
“1층과 2층을 전부 임대할 때 보증금 3억, 월 임대료 3천입니다. 현재 성형외과에서 주장하는 권리금은 1억입니다.”
“적지 않은 액수로구만. 거기에 더해 인테리어 공사비와 홍보비, 인건비 등 이것저것 초기 지출이 추가 될 터이니.”
“처음에는 비교적 작은 금액을 투자해서 개원하는 방향도 생각해 봤습니다. 입지를 양보하고, 투자금을 줄여 위험 부담을 최소화 한 상태에서 효율적인 병원 운영을 하는 방안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1순위를 여기로 찍었다는 건 과감한 투자를 원한다는 뜻 아닌가? 그로인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도 말이네.”
“회장님의 말씀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습니다.”
“내 말이?”
“성을 쌓는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하셨지요.”
“그랬지.”
“제 이름을 건 성, 앞으로 제 식구들을 지켜줄 성을 아무렇게나 쌓고 싶지 않습니다. 노른자 땅에 누구보다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저의 성을 세우겠습니다. 거기에 따르는 모든 위험 부담은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
한지호의 눈동자가 서광을 뿜어냈고, 담담한 목소리에 실린 힘은 황만금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황만금은 한지호를 처음 만났을 때가 겹쳐 보이는 기분이었다.
당당하게 태자병을 완치키시겠다고 선언했던 그때의 한지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지호의 패기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고, 다양한 경험으로 더욱 성숙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향한 황만금의 신뢰는 최고조에 이른 상태다.
황만금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한지호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신용증을 가져다주게.”
“신용증 말씀이십니까?”
“내 신용과 이름을 걸고 자네가 최고의 성을 쌓을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5장, 카운트다운 (1)
한지호는 신용증의 가치를 실감했다.
신용증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투자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업계획서를 검토한 황만금은 신용증을 거둬가며 거액의 투자를 약속했다.
10억.
무려 10억 원의 투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황만금은 전권을 한지호에게 맡겼다.
투자자인 자신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마음껏 성을 쌓으라는 뜻이었다.
이후 한의원의 수익을 나누며 투자금을 갚는 조건도 무척 후했다.
시중 은행의 이자보다 훨씬 저렴한 조건으로 10억 원을 투자한 것이다.
말이 투자이지 사실 후원이라 봐야 한다.
태자병을 완치시키고 받았던 1억 원 수표보다 신용증의 가치가 훨씬 더 컸다.
한지호는 초기 자금에 대한 부담을 덜고 자유롭게 자신의 구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
투자를 약속받은 한지호는 곧장 부동산 중개업자를 찾았다.
중개업자를 통해 역삼역 5층 메디컬 빌딩의 건물주와 임대 협상을 진행시켰다.
동시에 그는 매물을 내놓은 성형외과 원장과 약속을 잡았다.
권리금이라는 애매한 문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사실 권리금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없고, 건물주 역시 권리금 문제는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 분명히 존재하는 룰이고, 그만큼 다루기 어려운 문제였다.
서로의 입장은 간단하다.
한지호는 권리금을 줄이길 원하고, 성형외과 원장은 한 푼이라도 더 받아 손해를 보전하길 바란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을 하느냐가 쟁점이다.
“쉽게 생각해야지.”
한지호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혼잣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