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20대 초반답게 당돌한 구석도 있지만 통통 튀는 매력으로 느껴질 뿐, 절대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연예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늘 호평을 받는 것이다.
덜컥-
그때 카페 출입문이 열렸다.
한지호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고, 모자를 푹 눌러쓴 여성을 확인했다.
이지은이 매니저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온 것이다.
그녀는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한지호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새하얀 피부가 빛을 발했다.
“한 선생님.”
목소리는 작았지만 반가움이 묻어났다.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은 이지은이 한지호를 빤히 쳐다봤다.
한지호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혼자 왔어요?”
“매니저 오빠가 근처까지 데려다줬어요.”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군요.”
“아니에요. 알아서 들어간다고 그냥 보냈어요.”
“차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려고…….”
“한 선생님이 데려다 주셔야죠. 설마 저 혼자 택시 태워 보내실 건 아니죠?”
“지은씨도 참 대책이 없어, 대책이.”
한지호는 고개를 저었지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매니저를 보내고 무작정 데려달라는 이지은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가 웃음을 터트리자 이지은도 미소를 지었다.
겨우 웃음을 멈춘 한지호는 보약 상자를 가리켰다.
“이거 지은 씨 체질에 맞춰 지은 보약이에요. 특히 성대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약재를 많이 썼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크리스탈이랑 여정이도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오늘 다 전달했습니다. 각자의 체질에 맞춘 보약이니 이전에 먹던 것들과는 다른 효과가 있을 겁니다.”
“역시 한 선생님은 자신감, 자신감하면 한 선생님.”
“그보다 커피부터 마시죠. 계속 빈 테이블로 앉아있었더니 신경이 쓰이네요. 뭐 마실래요?”
“전 케냐 아이스요.”
“알겠습니다.”
한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을 하러 걸어갔다.
카페 주인은 이지은이라는 탑 스타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케냐 아이스 한 잔이랑 예가체프 따뜻하게 한 잔 부탁드립니다.”
“네, 두 잔 해서 1만 4천 원 입니다. 핸드 드립이라 시간이 약간 걸려요. 나오면 자리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미중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카페 주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았다.
주문과 계산을 마친 한지호는 다시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
이지은은 상자를 열고 낱개로 포장된 보약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지금 바로 먹어보고 싶은데, 안 되겠죠?”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식후에 복용하는 게 좋습니다. 약성이 강한 편이라서요.”
“그럼 아껴놓고 내일 아침부터 꼬박꼬박 챙겨 먹을게요. 고마워요, 한 선생님.”
“믿고 약을 짓게 해줬으니 내가 더 고맙죠.”
“그런가요? 헤헤.”
이지은이 해맑게 웃었다.
삼촌팬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녀의 웃음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게 더 이상 놀랍지 않았다.
한지호는 연예인이나 상류층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려 살아가는 일상에 적응했다.
저벅저벅-
둘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카페 주인이 커피를 들고 온 것이다.
“케냐 아이스 어디에 드릴까요?”
“이쪽이요.”
이지은은 카페 주인과 눈을 맞추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한적한 시간에 자주 방문하며 아지트로 삼은 카페라 주인과도 안면이 있는 모양이다.
카페 주인은 이지은과 목례를 하며 손수 드립한 커피를 놓았다.
그는 연예인이 왔다고 특별히 아는 척을 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주인의 이런 면모가 이지은을 카페 단골로 만든 것 같았다.
“여기 커피 엄청 맛있어요.”
“확실히 향이 깊고 좋군요.”
이지은의 말에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 카페 주인의 모습에서 커피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눈을 살짝 감고 예가체프 한 모금을 음미했다.
“아, 참. 우리끼리 약 값은 알아서 정했어요.”
“네?”
커피 잔을 내려놓은 한지호가 이지은을 쳐다봤다.
그가 만든 보약에 정해진 가격은 없었다.
크리스탈이나 김여정에게도 따로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지은이 알아서 약 값 이야기를 꺼내준 것이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갔다.
“한 선생님이 아무에게나 약을 지어주는 분이 아닌 거 잘 알고 있어요. 전에 제가 행사비를 보내드렸잖아요? 이번에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요.”
일주일 안에 고음을 회복시켜준 대가로 이지은은 한 회 행사비를 통째로 입금시켰었다.
그렇지만 가수인 이지은이나 크리스탈 말고 배우인 김여정은 어떻게 계산을 할까.
한지호의 궁금증을 꿰뚫어 봤는지 이지은이 설명을 덧붙였다.
“여정이는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 한 회 출연료가 행사비 대신인 거죠. 여주인공을 맡았으니 페이가 꽤 될 거에요.”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내가 만든 약의 가치를 인정해줘서 고맙습니다만……. 행사비나 드라마 출연료는 소속사에서 관리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죠. 행사비랑 출연료에 맞춰서 우리 사비에서 치료비와 약 값을 내는 거예요. 정산은 오래 걸리지만, 우리 애들이 이제 그만한 위치는 되잖아요.”
이지은이 솔직하게 말했다.
야소녀 모임의 멤버들은 쇼핑 한 번에 몇 천만 원을 쓸 수 있는 인기 연예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지호에게 고가의 치료비와 약값을 지불해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크리스탈 씨, 여정 씨, 그리고 지은 씨의 체질에 맞춰 지은 보약은 세 분이 지불한 돈 이상의 효능을 발휘할 겁니다.”
세 사람의 행사비나 출연료는 수천만 원에 달한다.
이지은의 행사 출연료가 3천만 원이고, 크리스탈도 비슷할 것이다.
여주인공이 된 김여정의 드라마 출연료는 그보다 조금 적겠지만 크게 떨어지지 않을 터였다.
한지호는 보약을 지어 수천만 원을 받는 걸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난치병을 고쳐준 대가로 1억 원을 받고, 목을 낫게 해준 대신 3천만 원을 받으며 눈높이가 달라졌다.
돈의 개념이 다른 VIP들의 세계에 익숙해진 것이다.
한지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냈다.
야소녀 멤버 세 명에게 보약을 지어주고 최소 6천만 원 이상을 받게 됐다.
순식간에 대기업 직장인의 일 년 연봉을 벌었지만 비교적 덤덤했다.
이 정도의 수입이 당연하게 와 닿는 것이다.
“한 선생님, 그런데 오늘 따라 안색이 어두워 보였어요. 무슨 고민 있는 건 아니죠?”
“고민이야 늘 있지만, 별 거 아닙니다.”
한지호는 내심 자신의 마음이 읽혔다는 것에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이지은은 어리지만 사람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다.
괜히 솔로 여가수로 수많은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게 아닌 것이다.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향긋한 커피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지은이 여동생이 아니라 편한 동갑 친구처럼 느껴졌다.
보약을 전달하러 만난 것이지만 데이트나 다름없었다.
한지호는 이지은과 의외로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를 넘기기 직전이었다.
손님도 없고, 시간도 늦었으니 문을 닫을 법도 한데 카페 주인은 커피 원두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밤을 새며 수다를 떨 순 없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진짜 시간 빨리 가네요. 아쉬워라.”
“지은 씨 집은 어디죠?”
“강남이에요. 압구정 로데오 근처.”
“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우리 집에서 멀면 안 데려다 주려고 그랬어요.”
한지호는 농담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은이 매니저를 보내고 혼자 왔으니 집까지 데려다 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남자의 99%는 이지은을 데려다 주는 걸 귀찮은 일이 아니라 축복이라 생각할 것이다.
보약을 지어준 대가로 수천만 원을 받고, 인기 절정의 연예인들과 어울리는 삶.
한지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 아니 스스로 쟁취한 것들을 당당하게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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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을 데려다 주고 신사동 오피스텔로 돌아온 한지호는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봉투를 꺼냈다.
홀로 소파에 앉아서 봉투를 열어보는 한지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스윽-
봉투 안에서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겨우 종이 한 장이지만 한지호의 손길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한 장의 종이가 현금 1억 원 이상의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평창동의 현금 부자 황만금이 써준 신용증.
한지호는 태자병을 치료해주고 받은 신용증을 만지작거렸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것일까.
입술을 다문 채 신용증을 꺼낸 한지호의 눈동자에서 고뇌가 엿보이고 있었다.
3장, 기로(岐路) (2)
한지호는 신용증에 적힌 내용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황만금의 이름과 신용을 걸고 한지호 선생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단한 한 문장 밑에는 황만금의 인감도장 직인과 친필 싸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너무 막연한 내용이다.
인감과 친필 싸인이 있으니 최소한의 법적 효력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황만금이 얼마든지 부탁을 거절 할 수도 있다.
신용과 맹세라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지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은 충분히 알 것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려운 법이니…….”
한지호는 오래된 격언을 곱씹었다.
태자병이 완치됐을 때 황만금은 1억 원 수표와 함께 신용증을 내밀었다.
그는 신용증이 1억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녔다고 말했다.
정말 큰 부탁을 할 때 신용증을 쓰겠다는 한지호의 말을 듣고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나 막상 신용증을 내밀고 부탁을 하면 시원하게 들어줄까.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문제였다.
분명한 건 한지호가 신용증을 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가볍고 사소한 일을 황만금에게 부탁할 리 없다.
당분간 신용증을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한지호의 심경에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김해수와 이지은, 크리스탈과 김여정을 두루 겪고 유명세를 얻으며 고민이 깊어진 것 같았다.
MBS 예능국 채성일 PD의 섭외 전화는 기폭제가 되었다.
“오랜만에 황 회장님을 만나야겠어. 신용증을 쓰지 않더라도 조언을 구할 수 있을 테니.”
한지호는 황만금을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신용증을 내밀며 큰 부탁을 할지 결단을 내리진 않았다.
대신 산전수전을 겪으며 거물이 된 황만금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받고 싶었다.
“부딪치고 깨지면서 알게 되겠지. 벌써부터 몸 사리지 말자, 한지호.”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각오를 다졌다.
밤이 깊었다.
신용증을 고이 갈무리한 한지호가 침대 위에 누웠다.
푹신한 라텍스 침대가 그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는 고민과 잡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한지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깊은 단잠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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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한지호는 결심한 것을 뒤로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전생을 각성하기 전부터 작정한 일은 반드시 해내고마는 근성의 소유자였다.
웬만한 깡다구 없이는 보육원 출신이 한의대를 졸업하기 힘들다.
부잣집 엄마들의 치맛바람과 동기들 사이의 살벌한 경쟁은 의대와 한의대를 전쟁터로 만든다.
과외 알바로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벌면서도 한의대 6년의 전투를 이겨낸 한지호다.
그의 근성과 강단은 어떤 의미에서 전생의 규호보다 더 강할지 모른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한지호는 정장을 갖춰 입었다.
야소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백화점 명품관에서 구입했던 알마니 정장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한 벌에 무려 450만원이나 하는 옷이니 패션과 편안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당연하다.
현재로선 알마니 정장이 한지호가 가진 가장 비싼 옷이다.
최고의 옷을 입는다는 건 최선의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만나겠다는 뜻이다.
중요한 손님이나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때 헐렁한 추리닝을 입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어떤 옷을 입느냐는 결국 그 사람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지호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아직까지 새 차나 다름없는 아우디 A5 쿠페의 검은색 몸통에서 반짝반짝 광이 올라왔다.
철컥-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한지호는 심호흡을 했다.
아침 이른 시간이지만 황만금은 진즉 일어나 식사를 마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