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8화 (18/255)

# 18

뜻밖에 얻은 힘을 바탕으로 하늘 높이 오르거나 혹은 그 과정에서 추락하거나 극과 극의 인생을 살게 될 것 같았다.

황만금의 말을 듣고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니 속이 편해졌다.

적어도 지금은 위로 올라가는 중이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1억 짜리 수표가 한지호의 비상(飛上)을 증명하고 있었다.

평범한 한의사였다면 태자병을 치료하지도, 그 대가로 한 번에 1억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올라가다 추락의 위험이 따른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추락을 두려워하면 절대 하늘을 날 수 없다.

한지호는 자신의 인생에 솟아난 날개를 믿고 저 높은 태양을 쳐다보기로 작정했다.

“아주 높이 올라가겠습니다.”

“자네라면 그럴 거라 생각하네.”

황만금이 덕담을 해주었다.

한지호는 그를 보며 도전 정신을 느꼈다.

눈앞의 노인은 불법 도박으로도 평창동에 대저택을 짓고, 1000억 원 이상 규모의 자금과 부동산을 굴리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삼국지 시대의 엄청난 경험과 능력, 그리고 천하제일의 의술을 갖고 있다.

불법 도박에 비해 꿀릴 게 전혀 없는 카드다.

한지호는 반드시 하늘 높이 올라서 천하를 내려다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1억 원 수표를 받은 날, 그의 의지는 전보다 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

어느 날 갑자기 1억 원 수표가 생긴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은행에 저축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쇼핑이나 유흥에 돈을 펑펑 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길을 걷다가 1억 원을 주은 게 아니었다.

의술을 발휘해 병을 고치고 치료비로 1억 원 수표를 받은 것이다.

연남동 자취방으로 돌아온 그는 1억 원 수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루 종일 고민을 했다.

태자병이 완치된 이상 황만금을 치료하러 평창동에 갈 일은 없어졌다.

그가 특별히 한지호를 찾지 않는 한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 한지호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청우단을 만들어 파는 것뿐이다.

치료비로 1억 원을 받았다는 기쁨도 잠시, 한지호는 어떻게 하면 다시 1억 또는 그 이상을 벌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기쁨에 취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이렇듯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며 앞날을 고민하는 건 삼국시대의 곽가나 가후를 연상시켰다.

실제로 규호는 곽가와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대신 가후와는 여러 차례 만나며 독특한 교분을 나누었었다.

그런 영향이 한지호에게도 스며든 모양이었다.

“개원이라, 개원.”

오래도록 고민을 하던 한지호가 개원(開院)이라는 말을 읊조렸다.

원래 청우단을 팔아 돈을 마련하면 자신의 한의원을 열려고 했었다.

황만금에게 받은 1억 원이면 서울 변두리에 작은 한의원을 열 수 있다.

아니면 청우단을 파는데 집중하며 돈을 더 모으면 된다.

청우단만 꾸준히 팔아도 올해 안에 서울 중심지에 한의원을 열 수 있는 돈을 모을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고민 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지난 한 달 동안 벌게 된 1억 2천만 원 가까운 돈을 모으고, 부족한 자금을 추가해 개원을 하면 된다.

자기 이름으로 병원을 내는 것은 모든 의사들의 로망이다.

한지호도 전생을 각성한 후 한방 병원에서 월급 받는 한의사가 아니라 개원을 한 원장이 되고 싶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루 종일 1억 원 수표를 노려보며 고민을 하는 이유가 생겼다.

개원을 해도 진짜 큰돈을 벌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월급을 받는 처지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개원을 한 뒤에는 병원에 묶여 있어야 한다.

한방 병원의 주 수입은 침을 맞으러 오는 만성 환자들에게서 나온다.

매일 같이 침을 놓아주고 약간의 진료비와 보험 공단의 부담금을 받는 것, 그러다 간혹 약을 짓는 환자들에게 이득을 남기는 게 일반적이다.

제법 잘 되는 한의원은 여전히 큰 수익을 올리고, 더러는 프렌차이즈 형식으로 병원을 확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한의원에서 병을 치료해주고 1억 원을 받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간호사와 직원을 둔다고 해도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

청우단과 태자병 치료로 큰돈을 번 한지호는 예전과 시각 자체가 달라졌다.

불과 한 달 전에는 자기 병원을 여는 것이 목표였지만, 이제는 병원 원장이 되는 것도 시시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개원을 하면 원장님 소리를 들으면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겠지. 한의원 원장이면 사회적으로도 대우를 받을 테고.”

한지호는 대학생 때부터 내내 꿈만 꿔온 개원의 장점을 떠올렸다.

그러나 장점을 언급해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한방 병원에 취직해서 안정적이지만 재미없게 사는 것이나 개원을 해서 한의원 원장이 되는 것이나 비슷비슷하게 느껴졌다.

안정적인 수익, 사회적인 인정은 한의대를 졸업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다른 세계의 맛을 본 한지호가 거기에 만족할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술과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차츰 자각하는 중이었다.

이 힘을 잘 사용하면 진짜 큰돈을 벌면서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잘 나가는 한의원 원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판도를 움직이는 거물이 되고 싶었다.

전생을 깨달았으면 그 정도 야망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짜악!

한지호가 양 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오랜 고민에 종지부를 찍고 결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끝까지 가보는 거야.”

혼잣말이지만 묵직하고 강렬한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끝까지 가보자는 말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명확해 보였다.

한지호는 책상 위에 올려둔 1억 원 수표를 지갑에 넣었다.

마치 만 원 지폐와 다를 게 없다는 듯, 앞으로 얼마든지 1억 원을 벌 수 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수표를 정리했다.

그는 한 때의 목표였던 개원을 거추장스럽다고 판단했다.

한의원을 열어 현실에 안주하는 선택을 과감히 접은 것이다.

지금처럼 야인으로 남아 상류층으로부터 진짜 제대로 된 큰돈을 버는 쪽이 낫다고 여겼다.

위험하지만 더 재미있고, 대책 없지만 훨씬 짜릿할 것이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클 게 분명했다.

치료를 해주고 1억 원 수표를 받는 게 당연해질 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인생의 진리에 운명을 던진 것이다.

“바람이나 쐬고 오자.”

그는 1억 원 수표가 들어있는 지갑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수표를 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로 나갈 작정이었다.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지갑에 만 원을 넣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성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벌써 성공한 것처럼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행동하다 보면 자연스레 목표를 이루게 될 것이다.

한지호는 1억 원 수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큰 꿈을 꾸면서 동시에 점점 더 큰 액수의 돈을 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꿈의 크기만큼 그릇도 커지는 법이다.

한지호의 그릇이 얼마나 더 커질지, 아직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

“여긴가?”

한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부천 외곽의 성당 앞에 서있었다.

작은 성당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는 꽤 큰 건물이었다.

시설도 괜찮아 보였다.

이만하면 마리아 수녀와 유초아가 신세를 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천사원이 무너지고, 그동안 남아있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광주 고모네로 간 지훈이는 감감 무소식이었고,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진 민기와 민우 형제는 열심히 적응을 한다고 들었다.

고3이기에 받아주는 보육원이 없는 유초아는 이 성당에서 마리아 수녀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문득 천사원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떠올렸다.

공중보건의 복무를 마치고 기분 좋게 천사원을 찾았던 날, 건설회사 용역들을 만나 부딪쳤던 기억은 악몽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다.

그때 용역들과 싸우며 본능적으로 오금희를 펼쳤고, 말도 안 되는 폭행 사건을 계기로 전생을 각성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아 수녀와 유초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꼭 전하고 싶은 선물도 가져왔다.

깜짝 선물을 주면 마리아 수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돈을 버는 것만큼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하다.

평생 처음으로 큰돈을 만진 한지호는 먼저 가족이나 다름없는 마리아 수녀와 유초아를 생각했다.

전생을 깨닫고 야망에 불타는 사람이 됐어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따뜻함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10장, 연결 고리 (1)

“바쁠 텐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니.”

마리아 수녀가 인자한 웃음으로 한지호를 맞이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잘 지내고 계셨죠? 자주 들리지 못해 죄송해요, 수녀님.”

“아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이렇게라도 와줘서 고마울 뿐이야.”

“초아는요?”

“아직 학교에서 오지 않았단다.”

“맞다, 고삼이죠.”

한지호는 새삼 유초아가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시기가 바로 고3이다.

한지호는 유초아를 계속 어린 아이로만 생각해왔다.

그녀가 벌써 19살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 지호 너는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거니?”

마리아 수녀가 걱정이 묻어나는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일이 아주 잘 풀릴 것 같습니다, 수녀님.”

“병원에 취직이 된 거니?”

“음… 말하자면 복잡하지만, 열심히 한약을 만들고 치료를 하고 있어요.”

“정말 잘 됐구나. 그래, 그거면 되었다.”

마리아 수녀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지호가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청우단을 만들고 태자병을 치료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다만 병원에 취직하지 않고 큰돈을 벌기 위해 야인으로 남았다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어머니와 같은 마리아 수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수녀님, 성당에서 지내시기 불편하진 않으세요?”

“불편할 게 뭐가 있겠니. 형제나 자매와 같은 분들과 아주 잘 지내고 있단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서 초아가 조금 힘들어하지만, 그래도 시설은 천사원보다 성당이 더 좋구나.”

“다행이네요. 초아가 여려 보여도 씩씩한 아이니까 금방 적응하겠죠.”

“그래. 이번에 꼭 대학에 붙어야 할 텐데. 사실 대학에 붙어도 그 다음이 문제이긴 하지만…….”

마리아 수녀가 말끝을 흐렸다.

한지호는 한의대에 합격했기에 과외라는 고액 알바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대학생들에게는 과외 자리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20살부터는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보육원 아이들이 대학에 다니기란 현실적으로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리아 수녀는 유초아가 대학에 붙어도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 거란 염려를 하고 있었다.

한지호도 그런 문제를 모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힘들게 대학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직한 얼굴로 마리아 수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이 공부를 하면 학비는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아도 그렇고, 다른 보육원에 간 민기와 민우, 또 지훈이도 제게는 막내 동생들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너에게 어떻게 그 큰 부담을 지울 수 있겠니.”

“요즘엔 국가장학금도 잘 나오잖아요. 부족한 부분만 제가 도와주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생활비는 각자 알바로 벌게 해야죠. 그래도 돈 때문에 대학을 못 다니게 할 수는 없잖아요.”

“지호야…….”

마리아 수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큰아들이나 다름없는 한지호가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척 미안했기 때문이다.

20살이 되면서 보육원을 떠난 아이들은 대부분 세상의 밑바닥에서 험하게 살아간다.

간혹 성공을 해도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부끄러워하며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한지호처럼 자기 몫을 하면서 출신 보육원을 잊지 않고 챙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받은 은혜를 고마워할 줄 알고, 천성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수녀님, 그리고 드릴 게 있습니다.”

한지호가 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받고 안에 든 것을 살핀 마리아 수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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