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9화 (19/255)

# 19

“지호야, 이게 뭐니?”

“나중에 초아 학비나 다른 꼭 필요한 일에 사용해주세요, 수녀님. 언젠가는 천사원을 다시 세워야죠.”

“이렇게 큰돈을 어디서…….”

“저 이래봬도 한의사에요.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이니까 이 정도 돈은 금방 벌 수 있습니다.”

마리아 수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흰 봉투 안에는 오천만 원 수표가 들어 있었다.

한지호는 황만금에게 받은 1억 원의 절반을 마리아 수녀에게 건넨 것이다.

처음으로 번 차원이 다른 액수의 돈이었고, 그만큼 의미 있는 일에 쓰고 싶었다.

오천만 원은 절대 작은 돈이 아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오천만 원을 쉽게 여기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과감하게 1억 원의 절반을 떼어냈고, 자신을 키워준 보금자리를 잊지 않았다.

앞으로 자주는 아니더라도 목돈이 생길 때마다 천사원 재건을 위해 저축을 할 생각이었다.

천사원을 다시 세우겠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한지호의 진심을 느낀 마리아 수녀가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나이든 수녀의 주름진 볼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지호는 그녀에게 건넨 오천만 원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 그는 누구보다 큰 감동을 받고 있었다.

의술로 돈을 벌어 마리아 수녀와 천사원을 위해 쓸 수 있어 행복했다.

한지호는 더 높은 세계로 올라가 1억 원을 우습게 쓰는 사람이 될 거라 믿었다.

그때가 되어도 자신을 키워준 천사원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고맙게 받아야겠구나. 그리고 이 돈은 아이들이 꼭 필요로 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천사원을 다시 세우기 위해 잘 모아두마. 지호야, 너에게 정말 고맙고 또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수녀님과 천사원이 없었다면 전 길바닥에서 소매치기나 하는 삶을 살았을 겁니다.”

“진심으로 네가 자랑스럽단다.”

눈물을 닦은 마리아 수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지호는 황만금에게서 1억 원 수표를 받았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에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듣는 순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미소로 화답하는 그를 보며 마리아 수녀가 화제를 돌렸다.

“밥은 먹고 가야지? 조금 있으면 초아가 올 테니 같이 저녁을 먹자꾸나.”

“네. 맛있는 거 먹어요.”

“그래, 그래야지.”

아직 밥을 먹지 않았지만 벌써 배가 부른 것 같았다.

한지호는 어느 때보다 따뜻한 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었다.

그는 한의원을 열어 안주하지 않고, 맹수 같은 부자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에서 맨몸으로 싸우며 더 큰 전리품을 챙기겠다고 결심했었다.

잔인하고 위험한 정글로 뛰어들기 전에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었다.

마리아 수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밝아 보였다.

+++

학교를 마치고 유초아가 성당으로 왔다.

야간 자율 학습을 신청하지 않았기에 저녁 시간 쯤 하교한 것이다.

그녀는 마리아 수녀와 함께 있는 한지호를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

“왜 울려고 그래?”

한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유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빨개진 눈으로 한지호를 쳐다보며 울먹였다.

“지호 오빠…….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한지호는 유초아의 하얀 뺨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그러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가를 손으로 스윽 닦아줬다.

유초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마리아 수녀가 입을 열었다.

“초아도 왔으니 맛있는 걸 먹으로 가자. 지호도 기다리느라 배가 고팠지?”

“근처에 맛집이 있나요?”

“글쎄…… 잘 모르겠구나.”

“그럼 고기 먹으러 가요. 제가 쏠게요, 수녀님!”

애매할 때는 무조건 고기가 최고다.

소고기, 돼지고기는 어느 식당에서 먹어도 맛있는 법이다.

유쾌하게 쏘겠다고 외친 한지호가 마리아 수녀와 유초아의 팔을 잡았다.

두 여인의 중앙에 선 한지호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왼 팔짱은 어머니 같은 마리아 수녀와 꼈고, 오른 팔은 여동생 같은 유초아가 잡고 있다.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의 따뜻함과 든든함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성당 밖으로 나와 근처의 고기 집에 들어간 한지호는 삼겹살 대신 한우 등심을 시켰다.

“꽃등심 삼인분 주세요.”

“와-! 지호 오빠, 진짜 소고기 먹어도 괜찮아요?”

“그럼, 괜찮아. 마음껏 먹어. 더 시켜 줄 테니까.”

한지호는 일인분에 삼만 원이 넘는 비싼 꽃등심을 주저 없이 골랐다.

마리아 수녀에게 오천만 원을 줬어도 통장에는 여전히 육천만 원 넘는 돈이 남아있다.

그는 돈 때문에 고기 한 번 마음껏 못 먹어본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이제 그런 배고픈 과거는 한지호와 상관없는 남의 일이 됐다.

곧이어 지글거리는 불판 위로 마블링이 살아있는 꽃등심이 올라갔다.

고기 익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한지호는 능숙하게 고기를 구우며 대화를 리드했다.

“학교생활은 어때? 공부는 잘 되고?”

“솔직히…….”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둘의 대화에 마리아 수녀도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다 큰 유초아와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드물기 때문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초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 오빠랑 달라서 공부가 적성에 맞는 거 같진 않아요. 수업도 집중하기 힘들어요.”

“그럴 수도 있지. 모든 사람이 공부를 잘 할 수는 없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당연하지.”

한지호는 보육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내내 전교 5등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불운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자신처럼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공부를 잘 하는 게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다양한 길을 찾아 제대로 된 어른이 되면 충분하다.

“공부 말고 하고 싶은 건 있어? 관심 가는 분야라던가.”

“사실 저번에 길에서 명함을 받았는데요.”

“명함?”

“연예기획사 관계자 아저씨가 명함을 줬어요. 연예인 해볼 생각이 없냐면서. 그냥 됐다고 했는데, 학교 연극 동아리 활동도 재미있구요…….”

유초아는 혼이 날거라 생각했는지 소심하게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한지호는 깜짝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잘 익은 꽃등심을 잘라주며 유초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아기 때부터 유초아를 봐왔고, 여동생 같은 아이라 편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의 미모는 범상치 않았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 작고 붉은 입술과 매끄럽게 솟은 콧날, 사람을 매혹시키는 커다란 눈망울까지.

건설회사 용역들이 유초아를 보고 더러운 농담을 했던 건 그녀가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얼굴만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165cm라는 딱 적당한 키에 비율도 흠 잡을 구석이 없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본 가까운 사이라 의식하지 못했을 뿐, 유초아는 웬만한 연예인 지망생보다 훨씬 예쁜 여자였다.

19살이 되면서 한층 성숙해져 여인의 향기가 물씬 났다.

연예기획사 관계자가 명함을 줬다는 말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 수녀는 내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한지호는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어른의 시각으로 그녀의 꿈을 재단할 마음은 없었다.

“연극이 재밌으면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해봐. 그러다 정말 하고 싶은 걸 발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도 잘은 모르지만, 연예계는 정말 험한 곳이니까 그곳에 뛰어들기 전에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만한 다짐이 있다면 난 초아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응원해줄게.”

“지호 오빠……. 진짜 고마워요. 오빠가 이렇게 말해줘서 힘이 나요.”

유초아는 다그치지 않고 그녀의 고민을 이해해주는 한지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커다란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그저 밝게 웃으며 유초아와 마리아 수녀의 접시에 고기를 놓아줬다.

“자, 이제 슬슬 먹어볼까요? 꽃등심이 아주 맛있게 익었네요.”

노릇노릇 익은 고기를 함께 먹으며 즐거운 저녁 식사가 계속됐다.

나누고 베푸는 행복을 느낀 한지호의 마음도 따스하게 익어가는 것 같았다.

10장, 연결 고리 (2)

+++

부천에서 뜻 깊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한지호는 그날 밤 단잠을 잤다.

모처럼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 다음 아침 일찍 일어났다.

오금희를 수련한 이후 아침마다 몸이 가볍고 상쾌해 날아갈 것 같았다.

화타는 자신이 창안한 오금희를 매일 따라하면 누구나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했는데, 과연 조금의 과장도 없는 말이었다.

한지호는 따라하는 수준이 아니라 오금희를 깊이 파고 있었다.

건강 증진을 위한 도인술을 넘어 본격적인 무공으로 오금희를 수련하는 중이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불을 걷어내자 한지호의 상체가 드러났다.

비쩍 마르기만 했던 볼품없는 몸은 사라졌다.

조각조각 다듬어진 잔근육이 한지호의 상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힘을 쓰기 좋고, 보기에도 딱 좋을 만큼 균형 잡힌 몸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과식을 한 것 같은데……. 별 상관없네?”

침대에서 일어난 한지호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마리아 수녀와 유초아를 만나 평소보다 고기를 많이 먹었다.

그래도 특별히 부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근육이 늘어나고 활동량이 많아지면서 대사량이 증가한 것이다.

예전보다 음식을 많이 먹어도 금방 소화가 됐고, 살이 찔 염려도 없었다.

스트레칭을 마친 한지호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샤워를 하고 공터에서 오금희를 수련할 계획이었다.

수련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 오후에 아주 중요한 미팅을 하러 가야 한다.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에게 긴히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황만금은 태자병에서 완치가 됐어도 유건영에게 맡긴 자금을 회수하지 않았다.

한지호의 조언대로 그를 신뢰하며 기회를 준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건영은 틈만 나면 한지호에게 감사를 표해왔다.

청우단을 추가로 1000알이나 주문했던 것도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플래티넘 홀딩스라는 외국계 금융 기업의 팀장으로 무척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바쁜 사람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1억이 넘는 벤츠 CLS클래스를 굴릴 정도로 능력이 있고, VIP들만 상대하며 아무에게나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한지호의 말에 바로 약속을 잡았다.

유건영이 얼마나 한지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솨아아아아-

한지호는 샤워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을 맞으며 다양한 상념에 빠졌다.

‘황 회장님을 치료한 것처럼 제대로 한 건만 더 올리면 이사를 가는 거야.’

그는 연남동의 좁은 원룸에 계속 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근처의 요양 병원에서 일 할 목적으로 자취방을 구한 것이었다.

천사원 사건 이후 요양 병원 근무가 취소 됐고, 더 이상 어딘가에 묶인 처지가 아니니 연남동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통장에 있는 육천만 원은 큰돈이지만, 그럴듯한 집을 구하기엔 액수가 모자란다.

조금 더 목돈을 만들어 한 번에 괜찮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다.

굳이 대박을 터트리지 않아도 청우단만 꾸준히 팔리면 한강이 보이는 고급 오피스텔에 사는 것도 가능하다.

한지호는 한 두 달만 더 연남동 자취방에 살기로 마음먹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은 벌써 강남의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들뜬 상상을 하며 샤워를 끝낸 한지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편한 운동복을 입고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공복 상태로 자취방에서 나온 한지호는 수련 장소인 공터를 향해 움직였다.

운동도 속이 비었을 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무공 수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파트 공사 현장 부근의 공터에 다다른 한지호가 숨을 골랐다.

“후우- 공기도 좋네.”

공사가 마무리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 공터도 개발 될 것이다.

그때에는 또 다른 수련 장소를 찾아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마음껏 수련할 수 있는 이 공터가 오늘따라 소중하게 느껴졌다.

“몸을 좀 풀어볼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한지호가 자세를 잡았다.

오금희 중에서 녹공으로 황만금을 치료했던 순간의 기억이 생생하다.

무공이 곧 의술이고, 의술이 곧 무공이 되는 게 오금희의 신비로운 힘이다.

그는 수련에 더욱 의욕을 느끼고 천천히 동작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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