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7화 (17/255)

# 17

하지만 황만금은 선뜻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내 자네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네만…… 녹용은 양기를 북돋는 약재 아닌가?”

“맞습니다. 특히 러시아 산 분골은 그 효능이 탁월하죠.”

“태자병은 양기와 화기가 과해서 발생했다고 들었네만, 어째서 양기를 일으키는 녹용을 먹으란 말인지 잘 모르겠네.”

황만금은 그동안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들을 주치의로 뒀고, TV에 나오는 유명 한의사들에게 보약을 지어 먹었다.

그렇기에 일반 사람보다 한약에 대한 지식이 있는 편이었다.

그가 제기한 의문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지호가 아무 이유 없이 구하기 어려운 러시아 산 녹용 분골로 약을 만들었을 리 없다.

한지호는 학생을 타이르는 선생님처럼 차분한 말투로 설명을 했다.

“그동안 침술과 한약으로 꾸준히 회장님 몸 안의 양기와 화기를 제어했습니다. 특히 어젯밤에는 더 강력한 방법을 썼기 때문에 몸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녹용 분골로 만든 약은 제가 인위적으로 억누른 양기를 서서히 회복시켜줄 겁니다.”

“양기와 화기가 넘쳐서 그걸 억눌렀던 것이고, 태자병이 완치된 지금은 과하게 억눌러진 양기를 녹용으로 보완해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로구만.”

“바로 그렇습니다.”

“역시 자네는 다르네. 생각지도 못했던 것까지 내다보는군.”

“그게 의원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맞네. 요즘 그런 사람을 찾기가 워낙 어려워서 말이지.”

황만금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자병의 완치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음까지 생각한 한지호를 더욱 신뢰했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 태자병을 진단해내고 치료한 게 아니었다.

황만금은 한지호가 유명하고 잘 나가는 한의사들보다 훨씬 낫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한지호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황만금의 시선에서 무한한 신뢰를 느끼고 있었다.

완치 이후를 위해 녹용 분골을 미리 준비해둔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 식사가 이어졌다.

한지호가 29년을 살면서 먹어본 아침 중 가장 호화로운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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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아침을 먹는 한지호는 집사의 안내를 받고 먼저 2층 서재로 올라갔다.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황만금이 급하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매일 침을 놓고 치료를 했던 서재는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었다.

벽면에 들어찬 원목 책장은 고급스런 분위기를 물씬 풍겼고, 꽂혀있는 책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최신 신간부터 화제의 베스트셀러들은 물론이고, 재테크와 국제 정세에 관한 어려운 책들도 많았다.

그저 꼬장꼬장한 늙은이로 보이는 황만금이 이런 책들을 다 읽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지호는 황만금이 서재의 책들을 다 읽을 거라고 짐작했다.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 굳이 서재를 만들 이유가 없다.

외부에서 온 손님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서재를 만든 건 아니었다.

황만금은 평소 서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그가 비록 불법 도박으로 돈을 번 사람이라도 지금은 거액의 자금을 굴리는 큰손이다.

이렇게 넓은 규모의 서재는 황만금이 어마어마한 돈을 관리하기 위해 계속 공부를 해왔다는 증거였다.

사람들은 흔히 부자는 게으를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건물 임대료를 받으며 탱자 탱자 노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부자에 대한 이미지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부를 물려받았건 자기 손으로 이뤄냈건 상관없이 대다수의 부자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아간다.

계속 자산을 증식해가는 부자들의 자기 관리와 공부에 대한 집착은 보통 사람들이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한지호는 황만금의 서재에서 그런 흔적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만금은 한지호 자신이 올라서려는 세계에 이미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환자와 의사로 만났지만,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이든 배울 필요가 있었다.

끼익-

그때 서재 문이 열렸다.

황만금이 살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다름 아니라 유 팀장의 전화를 받느라고.”

“아닙니다. 서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아, 유 팀장이 자네 안부를 묻더군. 조만간 우리 셋이서 저녁이라도 먹지.”

“네. 언제든 좋죠.”

“태자병을 치료하느라 본의 아니게 자금 관리를 일임했는데 유 팀장이 제법 괜찮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네.”

“그렇습니까?”

“어찌 보면 자네 덕분에 유 팀장이 기회를 잡은 셈이지. 병이 완치 됐지만 계속 조심해야 한다고 하니 조금 더 믿고 맡겨둘 생각일세.”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회장님 체질은 제가 치료를 위해 지키라고 말씀드린 세 가지 원칙을 늘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게 태자병의 재발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채식, 금욕, 자금 관리에 신경을 덜 쓰기. 항상 유념하도록 하겠네. 치료를 받을 때처럼 100% 지키지는 못해도 예전보다 조심해야지. 나도 오래 살고 싶으니까.”

한지호는 자신의 말을 계명처럼 받아들인 황만금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의사의 말을 잘 듣고 지키는 환자는 고마운 존재다.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부쩍 의사를 의심하고 믿지 않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그래봤자 인터넷 검색을 의사보다 더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황만금이 빨리 완치될 수 있었던 건 태자병 치료에 관해서 한지호를 전적으로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물론 환자의 신뢰를 얻어 내는 것도 의사의 능력이고, 그런 점에서 한지호는 탁월하기 그지없었다.

“녹용 분골로 지어온 약을 드시면서 생활 습관을 유지하시면 당분간 건강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거 참 듣기 좋은 말이네. 앞으로 태자병이 아니라도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자네부터 찾겠네.”

“네. 편하게 연락 주세요.”

“그리고 말인데…….”

황만금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끝을 흐렸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때 흔히 나오는 버릇이었다.

한지호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아마 그동안 미뤄왔던 치료비 문제를 꺼낼 것 같았다.

“자네에게 적절한 치료비가 얼마일지 생각해봤네. 마음 같아선 뭐든 주고 싶네만, 납득할 수 있는 대가를 주고받는 게 사회생활의 원칙 아니겠나.”

역시 한지호의 예상대로 황만금이 치료비를 언급했다.

한지호는 그동안 돈에 대한 관심을 억누르고 태자병을 치료하는데 집중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열심히 수고를 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차례였다.

국내 최고의 의료진들이 병명도 알아내지 못했던 태자병을 완치시킨 건 모두 한지호의 공이다.

그는 내심 천만 원 이상의 거금을 기대하고 있었다.

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한의학 치료의 대가로 천만 원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황만금의 재력과 한지호의 성과를 생각하면 그만한 기대가 과한 것만은 아니었다.

“혹시 자네가 따로 원하는 것은 없는가?”

황만금이 넌지시 한지호의 의사를 물었다.

한지호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지만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

돈을 가진 사람 앞에서 돈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주도권을 뺏기게 된다.

부자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를 돈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한지호는 전생을 통해 경험한 부자 상대법을 잊지 않았다.

그의 전생인 규호는 오나라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인 노숙 앞에서도 고개를 꼿꼿이 세웠었다.

물론 규호는 진정으로 돈이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어쨌든 그 결과 노숙으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아 빈민들을 구제했었다.

그러한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기에 황만금을 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유 팀장님을 통해 회장님과 인연이 닿았고, 태자병이라는 희귀병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한 번도 치료비를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달리 원하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순간 한지호는 돈에 연연하지 않고 병을 치료하는데 뜻을 둔 남다른 한의사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황만금에게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황만금은 치료비를 따지지 않는 한지호의 태도를 보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이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기에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도 의연한 한지호가 더욱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자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그래서 내가 알아서 준비했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황만금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장의 수표였다.

한지호는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태연한 얼굴로 황만금과 수표를 쳐다봤다.

“받게. 태자병을 치료해준 보답이네.”

“황 회장님, 이 수표는…….”

수표에 적힌 숫자를 확인한 한지호의 눈이 커졌다.

태연하려 해도 저절로 동공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액수였다.

동그라미가 무려 여덟 개.

기대했던 천만 원에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 수표에는 1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9장, 리얼 머니(real money) (2)

“액수가 너무 큽니다.”

덥석 1억 원이 적힌 수표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한지호가 사양하려 하자 황만금이 그의 손에 수표를 쥐어줬다.

“받게. 그만한 대가가 있으니까.”

“그래도 이건…….”

“자넨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태자병을 치료하지 못했다면 계속 괴로워하며 남은 나날을 보냈을 걸세. 이 정도 보답은 내게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야.”

황만금의 말이 맞았다.

1억 원은 큰돈이지만, 황만금 입장에서는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액수였다.

그는 수표를 건넨 뒤 한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평생 만난 한의사 중 자네가 최고였어. 태자병도 그렇고, 간밤의 급한 상화에서 나를 살린 것도.”

“정말 이 수표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된다니까 그래도. 수표라서 싫으면 현금으로 줘야 받겠나?”

더는 거절 할 명분이 없었다.

한지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회장님의 마음으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주게.”

그가 수표를 갈무리하자 황만금도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황만금은 무려 1억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주고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부자였다.

반면 1억 원 수표를 주머니에 넣은 한지호는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말이 쉬워 1억이지 실제로 그만한 돈을 한 번에 받을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되겠는가.

청우단을 팔아 천만 원을 두 번씩 벌었을 때도 하늘을 날아갈 기분이었다.

그런데 1억은 아예 차원이 다른 액수다.

전생을 각성하며 천하제일의 의술과 특별한 능력을 얻은 한지호는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억대 연봉을 금방 이뤄버렸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1억 2천만 원을 번 것이다.

약초와 녹용 분골 값을 제해도 1억 1000만 원 이상의 순수익을 올린 셈이다.

당장 이 돈으로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언젠가 목표대로 진짜 상류층이 되면 그도 1억 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의술을 바탕으로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한지호에게는 매일 매일이 신세계였다.

“이게 전부가 아닐세. 집사에게 말해 내 이름으로 된 신용증을 써주겠네. 자네가 큰일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꼭 필요할 때 내가 무엇이든 내어 주겠다는 약조일세. 쓰기에 따라 1억보다 훨씬 큰 가치를 지닌 것이겠지.”

“회장님의 신용이 담긴 증서는 정말 큰 도움이 필요할 때 쓰겠습니다.”

“허허허, 겁이 나는구만. 그러게, 정말 제대로 내 돈이나 힘이 필요할 때 쓰게. 그래야 이 황만금의 신용이 아깝지 않지.”

황만금의 신용증은 1억 원보다 훨씬 더 값진 가치를 지녔을 게 분명했다.

어떤 씩으로 그의 도움을 구하느냐에 따라 수십, 수백 억의 효과를 낼 수도 있다.

한지호는 언제든 쓸 수 있는 치트키를 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봤네만…….”

황만금이 한지호를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한지호는 주머니에 넣은 수표 생각을 접어두고 황만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껏 돈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는데 1억짜리 수표 때문에 무너질 순 없었다.

정당한 치료비를 받은 것이고, 그 액수가 크다고 해도 당당하고 의연할 필요가 있다.

“자네와 같이 특출 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더군. 아주 높이 올라가거나 아니면 바닥까지 추락하거나. 악담으로 듣지 말게. 나는 자네가 아주 높이 올라가기를 바라며 지켜보겠네.”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불법 도박으로 밑바닥에서 돈을 벌어 거액을 굴리며 회장 소리를 듣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황만금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을 것이다.

한지호는 그의 미묘한 조언을 새겨들었다.

사실은 전생을 각성한 순간부터 계속 고민하던 것이었다.

특별한 의술과 능력을 얻었는데 평범한 한의사로 살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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