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4화 (14/255)

# 14

“다 지나간 일인데요. 이제 와서 털어봤자 증거도 안 나오고, 공소 시효도 소멸됐을 겁니다. 게다가 정계에 로비를 잘 해놓으셔서 털릴 일도 없고요. 지금은 막대한 자금을 운영하는 개인 투자회사의 회장님이시지요.”

“아무튼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섭고 대단한 분이시군요.”

“하하하, 그 정도로 돈이 많은 부자 중에 무섭고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유건영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한지호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부자들은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지호가 생각하기에 불법 도박은 큰 범죄다.

아무리 오래 된 과거라고 해도 편하게 말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건영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황만금의 과거를 언급했다.

과정이 어찌됐든 지금 현재 어마어마한 부자이니 상관없다는 것이다.

유건영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지닌 관점인 것 같았다.

한지호는 새삼 부자들의 세계가 야생의 정글이라는 걸 느꼈다.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맹수들이 즐비한 정글이다.

그러한 정글에서 잡아먹히지 않고 떳떳한 맹수의 왕으로 성장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청우단 1000알을 추가로 주문 받은 것보다 냉엄한 교훈을 얻은 게 더 크게 와 닿았다.

“그럼 청우단 1000알이 준비되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입금은 오늘 안으로 해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주일 뒤에 다시 뵙죠.”

일식당에서 나온 둘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한지호는 유건영의 뒷모습을 오래 쳐다봤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녀들이 유건영을 발견하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플래티넘 홀딩스라는 대단한 회사에서 중역을 맡고 있는 인재다.

평창동의 황만금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누구 못지않게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황만금과 유건영은 한지호를 조심스레 대하며 존중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한지호에게 잘 보이고자 애를 쓰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그들이 한지호를 어려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한지호가 지닌 의술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황만금은 치료를 받는 환자이고, 유건영은 그 치료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이다.

한지호는 사용하기에 따라 의술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지니는지 체감했다.

단순히 침을 놓고, 한약을 팔아 돈을 버는 것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뛰어난 의술은 곧 막강한 권력이 될 수도 있다.

과거에는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녔어도 진짜 천하제일이 되는 게 불가능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머리를 쓰기에 따라 천하제일이라는 꿈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띠링-

그때 문자 알람 소리가 한지호의 상념을 깨웠다.

스마트 폰을 확인한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로 올라간 유건영이 곧바로 천만 원을 입금시킨 것이다.

한지호는 규호의 의술이 얼마나 대단한 무기인지 자각하고 있었다.

+++

최 사장이 한지호를 반겼다.

요즘 들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한지호일 것이다.

단순히 약초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큰 손님이 되어서만은 아니다.

약초쟁이인 최 사장의 열정을 일깨워준 사람이 한지호이기 때문이다.

사실 명징약초 최치우는 약초꾼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소싯적에는 직접 팔도강산을 누비며 심마니들을 제치고 다녔고, 명징약초를 차린 뒤에도 날고 기는 약초꾼들이 그를 형님으로 모셨다.

경동시장 약재상 거리에 깨끗한 약초를 구비해놓은 곳이 명징약초밖에 없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최치우의 인맥과 명성이 있기에 서울에서는 구하기 힘든 질 좋은 약초를 공급받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네.”

“잘 지내셨죠?”

“그럼, 그럼.”

“제가 부탁드린 건…….”

“그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 지난번에 이어 또 200만 원 어치를 추가로 주문할 줄은 몰랐으니 말이야. 그렇다고 아무 약초나 구해주면 자네가 안 받을 거 아닌가. 팔도의 약초꾼들이 깨끗한 약초를 구하는 대로 내게 보낼 걸세.”

한지호는 청우단 재료를 구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속해서 대량으로 깨끗한 약초를 구하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나마 명징약초가 있어서 믿을만한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전화로 해도 된다.

한지호는 의문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시간이 걸리면 전화로 이야기 해주셔도 됐을 텐데요.”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러나.”

“네?”

“자네 얼굴도 보고, 차도 한 잔 마시고 싶어서 그랬지.”

최 사장이 멋쩍은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한지호도 덩달아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최 사장님 차나 얻어 마시고 가야겠네요.”

“잠깐만 기다리게.”

최 사장은 신이 나서 가게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그가 깊은 향을 풍기는 차를 잔에 담아 왔다.

“봄에 나는 야생화들을 볶아 만든 차일세. 이름은 없지만 시중에 파는 고급 차보다 훨씬 나을 거라 자신하네.”

“음-. 정말 향이 깊고 은은하네요. 사장님 찻집 차리셔도 되겠어요.”

“정말 그래볼까?”

“농담입니다. 명징약초가 없어지면 전 어디서 약초를 사라구요.”

“커허허, 치켜 세워주니 고맙구만.”

최 사장은 한지호의 칭찬이 싫지 않은 듯 만족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그가 직접 내온 차는 정말 일품이었다.

한지호도 오랜만에 제대로 우려낸 차를 즐겼다.

한방에서 차(茶)는 몸의 기운을 북돋는 용도로 처방을 내릴 때 사용한다.

기운과 체질에 맞는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중국인들이 기름진 음식을 주로 먹고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다름 아닌 차 문화다.

물 대신 차를 달고 사는 문화가 중국인들의 건강을 지켜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달그락.

간이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은 한지호는 따뜻한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온 걸 느꼈다.

전생을 각성한 이후 감각도 한층 예민해졌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져 좋고 나쁜 것을 더 확실히 판단할 수 있게 됐다.

“원하는 약초는 일주일 안에 물량을 맞춰서 구해 놓겠네.”

약초를 기다리는데 일주일, 청우단 1000알을 만드는데 일주일.

합해서 2주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유건영에게 양해를 구하면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어차피 1000알이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 한지호에게 보답을 하는 차원에서 주문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여분을 만들어 사장님께도 좀 드릴게요.”

“그것만 기대하고 있다네.”

한지호가 청우단을 주겠다는 말에 최 사장이 눈을 빛냈다.

대체 어떤 효능을 지닌 한약이기에 이토록 잘 팔리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껏 200만 원 어치 약초를 연달아 두 번이나 구매한 개인 고객은 없었다.

그만큼 한지호가 만들어 파는 청우단이 각광을 받는다는 뜻이다.

약초쟁이인 최 사장이 호기심을 갖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사장님.”

그때 한지호가 다른 말투로 최 사장을 불렀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간 모양이다.

“왜 그러나?”

“혹시 녹용도 구할 수 있을까요?”

“녹용?”

“네. 러시아 산 분골이 필요합니다.”

“시중에 떠도는 러시아 산이 대부분 가짜라는 건 알고 있겠지? 게다가 분골이라면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걸세.”

“그래도 사장님은 구하실 수 있죠?”

“자네 부탁인데 구해 봐야지. 일단은 기다려보게.”

“알겠습니다. 사장님만 믿고 있을게요.”

분골은 녹용의 여러 부위 중에서도 가장 끝부분에 있는 조직이다.

극소량만 얻을 수 있고,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다.

문제는 돈이 있어도 제대로 된 분골을 구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러시아 산 녹용이라고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중국산이고, 분골 역시 가짜가 많다.

한지호는 황만금 치료의 화룡점정을 위해 러시아 산 녹용 분골이 필요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눈앞에 가져오면 바로 구분할 수 있다.

일단 명징약초 최 사장의 능력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차 잘 마셨습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올게요.”

“약초는 차질 없이 준비해 놓겠네. 녹용 분골도 그때쯤이면 구할 수 있을지 답을 줄 수 있을 걸세.”

“네.”

경쾌하게 대답한 한지호가 명징약초 밖으로 나왔다.

황만금도, 유건영도, 그리고 약초꾼 세계의 고수인 최치우도 한지호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한지호가 지닌 특별한 능력에 매료된 것이지만, 사람이 풍기는 매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전생을 깨달은 이후 자신감을 얻은 한지호는 당당하면서도 거만하지 않은 태도로 주위를 사로잡고 있었다.

원래 그는 고아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한의대에 입학한 걸로 자부심이 강했었다.

거기에 천하제일의 의술과 오금희라는 무공, 전생의 경험이 더해졌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한지호는 현실이라는 험악한 정글을 맨몸으로 당당히 헤쳐 나가고 있었다.

8장, 한 걸음 더 (1)

치료는 별 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동안 한지호는 유건영에게 천만 원을 받고 1000알의 청우단을 추가로 팔았다.

약초 값 200만 원을 제외하고 800만 원씩 두 번.

한 달 안에 무려 1600만 원이 통장에 들어왔다.

텅 비다 못해 찢겨 나가기 직전이던 한지호의 잔고가 두둑해졌다.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던 처지에서 더 좋은 집을 찾아봐도 될 형편이 된 것이다.

3주 째 치료를 받은 황만금은 줄어든 발작 횟수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여전히 발작과 통증 증상이 남아있지만, 하루에 열 번 넘게 고통을 받던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는 세상 누구보다 한지호를 신뢰하는 것 같았고, 채식과 금욕에 이어 자금 관리에 신경을 끊어야 한다는 원칙을 잘 지켰다.

늦은 밤, 한지호는 침대에 누워 지난 치료 과정을 복기하고 있었다.

매일 침을 놓지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게 아니었다.

화기를 억누르는 혈도에 침을 놓을 때도 매번 깊이를 다르게 조절한다.

그 날 그 날 황만금의 상태에 따라 침술의 강도를 컨트롤 하는 것이다.

황만금의 태자병을 치료하는 건 한지호에게도 큰 공부가 되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임상 실험을 하는 셈이다.

기억과 경험, 능력을 얻었지만 그것들을 몸에 체화시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지호는 꾸준히 오금희를 수련하는 동시에 황만금을 통해 규호의 의술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중이었다.

“조금 더 과감하게 혈도를 자극하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그는 오늘 점심에 펼쳤던 침술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황만금은 지난 3주 동안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발작이 줄어들자 몸에 생기가 돌았고, 채식을 함에도 식사량을 회복해 오히려 살이 붙었다.

신경질적인 인상의 깡마른 노인에서 제법 봐줄 만한 인상이 된 것이다.

“내일은 깊이 침을 놓아야겠어. 훨씬 더 아프겠지만 이제 적응이 되신 것도 같으니까.”

한지호는 한층 과감하게 혈도를 자극하리라 작정했다.

완치가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욕심을 내도 될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눈을 감았다.

시간이 늦었기에 잠을 청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눈을 감자마자 책상 위에 올려둔 스마트 폰이 울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우우웅-

진동 모드지만 조용한 원룸 안에서는 어떤 벨소리보다 시끄럽게 들렸다.

무시하고 잠을 자기에는 진동이 끊이지 않고 울렸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한지호가 스마트 폰을 집었다.

그는 발신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누가 전화를 하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보세요.”

“한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제법 익숙한 목소리였다.

한지호는 그가 평창동 저택의 집사임을 알아차렸다.

“네?”

“황 회장님께서 평소보다 더욱 심하게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그게 무슨…….”

“하루에도 몇 번씩 발생했다 잦아드는 발작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 테니 최대한 안정을 시키고 계세요.”

“119를 부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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