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태자병으로 인한 발작이면 응급실에 가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안정제를 놓는다고 완화 될 증세가 아닙니다.”
“그럼 얼른 오십시오, 한 선생님.”
“지금 바로 나갑니다.”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지체하지 않고 옷을 챙겨 입었다.
얼른 밖으로 뛰쳐나온 그는 운 좋게 금방 택시를 잡았다.
만약 택시까지 잡히지 않았다면 정말 짜증이 폭발했을 것이다.
“평창동으로 가주세요. 급하니까 빨리 부탁 드려요.”
택시 기사에게 당부를 한 한지호는 인상을 쓰고 고민에 빠졌다.
분명 황만금의 태자병은 빠른 속도로 낫고 있었다.
발작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발작이 일어날 때 황만금이 느끼는 통증도 완화 됐었다.
예전에는 온몸이 뜨겁고 불에 타는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아프긴 해도 참을 수 있다고 황만금이 직접 말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작 증세가 심해졌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집사가 놀라서 오밤중에 전화를 걸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혹시라도 치료가 잘못 된 것일까.
한지호는 택시 뒷좌석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술과 한약, 그리고 습관 개선을 통한 치료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의심의 바람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갈팡질팡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평창동으로 달려가는 길,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들을 헤집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황만금을 완치 시키고 더 큰 기회를 얻기 전에 만만치 않은 고비가 등장한 것 같았다.
이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아주 많은 것이 바뀔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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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문이 벌컥 열렸다.
한달음에 계단을 거슬러 올라간 한지호는 창백한 안색의 집사를 발견했다.
“황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침실에서…….”
늘 기계처럼 무감정한 표정이던 집사도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한지호는 말끝을 흐리는 집사를 재촉했다.
“어서 안내해주세요.”
“따, 따라오십시오.”
집사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경호원과 메이드들이 모두 거실에 서있었다.
다들 오밤중에 일어난 뜻밖의 사건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한지호는 문득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집사의 전화를 받고 자신이 119를 불러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황만금이 잘못되면 그 책임은 전부 한지호가 지게 될 것이다.
가슴 언저리에 묵직한 바위가 놓인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부담을 느껴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한지호는 1층에 있는 황만금의 침실로 들어갔다.
웬만한 아파트 전체 넓이와 맞먹는 침실은 옛날 왕족들의 거처처럼 화려하게 장식 돼 있었다.
침대의 크기 역시 킹 사이즈를 두 개 붙여놓은 것처럼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얇은 잠옷을 입고 침대 위에서 괴로워하는 황만금에게 시선이 고정됐다.
“으으으…… 으으으으…….”
황만금은 진이 빠진 듯 힘 빠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됐고, 눈의 초점도 약간 풀린 것 같았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다.
한지호는 급히 황만금의 맥을 짚으며 안절부절 못하는 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발작이 시작됐습니까?”
“평소처럼 잠자리에 드셨는데… 1시간 전부터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 하셨습니다. 매일 일어나는 발작이라 곧 잦아들 거라 생각했는데 지속시간이 길어져 한 선생님에게 전화를 건 것입니다.”
“1시간 내내 이렇게 괴로워하고 계셨다구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발작과 통증이 완전히 멈춘 적은 없습니다. 한 번의 발작으로 이렇게 길게 힘들어 하시는 것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알겠습니다. 나가 계세요.”
“괜찮겠습니까?”
“괜찮게 만드는 게 제 일입니다. 필요하면 부를 테니 나가 계세요.”
한지호는 강경한 어조로 집사를 내보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편이 낫다.
곧이어 넓은 침실에 황만금과 한지호만 남았다.
황만금은 여전히 침대 위에서 끙끙 앓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두 눈을 감고 진맥을 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1시간 넘게 발작을 했다면 이미 탈진 상태가 됐을 것이다.
계속 시간을 끌게 되면 70살이 넘은 황만금의 노쇠한 육신이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질 지도 모른다.
손끝의 감각에 신경을 쏟자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수집 됐다.
진맥은 그저 그런 요식 행위가 아니다.
제대로 진맥을 하면 한 사람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할 수 있다.
삼국시대 전통의 진맥법을 알고 있는 한지호에겐 청진기나 다른 검사 장비가 필요 없었다.
그의 손이 어떤 현대 기기보다 정확하게 환자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맥에는 큰 문제가 없어. 심장 박동도 정상이고. 발작이 일어날 상태가 아닌데?’
진맥을 마친 한지호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황만금을 살펴봤다.
그는 초점을 잃어가는 황만금의 눈동자를 살펴보고, 처음 진단을 내렸을 때처럼 목젖을 만졌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 지속된 발작과 통증으로 체력이 소진됐기 때문이다.
목젖의 움직임은 정상, 그렇다는 건 발작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태자병 환자들이 발작을 하면 온몸이 불처럼 뜨거워지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 시간은 짧으면 3분, 길어도 10분을 넘기지 않는다.
지금 황만금처럼 모든 상태가 정상인데 1시간 가까이 발작 증세를 보이는 경우는 없다.
순간 한지호의 뇌리로 사자성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회광반조!”
그는 대단한 발견을 하고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처럼 뭔가를 알아냈다는 눈빛이었다.
회광반조(廻光反照)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기운이 돌아오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병상에서 다 죽어가던 노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제정신을 차리는 경우가 있는데, 보통 그때 유언을 남기고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한다.
회광반조가 끝난 후에는 어김없이 상태가 더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한지호가 뜬금없이 회광반조를 외친 것은 사람뿐 아니라 질병에도 그와 비슷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진맥을 한 결과 황만금의 몸에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작이 길게 지속되는 건 태자병이 회광반조를 하는 것이다.
한지호에 의해 완치되기 전에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벼운 감기에 걸려도 낫기 직전에 열이 난다.
열이 나고 동통을 느낀 다음에야 감기 기운이 가라앉는다.
마찬가지로 희귀 질병에 속하는 태자병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단계까지 온 것이다.
진단을 내린 한지호는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위험한 고비가 끝난 건 아니었다.
황만금은 70대 노인이다.
젊은이들과 달리 길게 지속된 발작과 통증을 견뎌낼 체력이 부족하다.
심각한 탈진 증상으로 몸이 상해 자칫 다른 병에 걸리거나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다.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태자병의 회광반조를 빨리 끝내야 한다.
스윽-
한지호가 황만금의 상의를 벗기고 준비해온 침을 꺼냈다.
유난히 긴 장침을 손에 잡은 그가 입술을 굳게 닫았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경지의 침술을 펼치려는 것이다.
황만금의 혈색이 1초가 다르게 안 좋아지는 상황, 태자병의 회광반조라는 진단을 내렸어도 여전한 위험을 침 하나로 돌파해야 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한지호가 손을 뻗었다.
그의 침에 황만금의 생명이 달려 있었다.
8장, 한 걸음 더 (2)
‘믿어보자. 나를, 그리고 내 전생을.’
한지호는 각오를 다졌다.
장침 중에서도 더 기다란 침을 아주 위험한 혈도에 꽂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황만금의 심장이 있는 곳에 고정 돼 있었다.
심장은 몸에서 화기(火氣)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태자병의 원인이 된 불의 기운은 심장을 근거지로 두고 있다.
그렇기에 심장 부근의 혈도를 깊이 자극해 들끓는 화기를 누르려는 것이다.
황만금의 몸을 괴롭히는 태자병의 회광반조 현상을 끝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질병의 회광반조 현상은 흔히 한의학에서 언급되는 명현현상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명현현상은 주로 원래 질병과는 전혀 다른 악질적 증세가 나타났다가 치료되는 경우를 뜻한다.
약을 먹고 구토를 하거나 설사에 시달리다가 병이 완쾌되는 경우가 명현현상에 해당된다.
하지만 회광반조는 해당 질병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강하게 치솟는 걸 뜻한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명현현상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
그냥 자연적으로 회광반조 현상이 끝나길 기다리다간 황만금이 견디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 것 같았다.
꾸우욱-!
침이 피부를 뚫고 황만금의 가슴 안으로 깊이 박혔다.
한지호는 침을 놓는 손에 전해지는 감각을 놓치지 않고 정성을 기울였다.
계획보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도 의료 사고를 내게 된다.
심장 부근의 혈도는 하나 하나가 생명과 직결 된 사혈(死穴)이자 생혈(生穴)이다.
“후우우우!”
장침을 절반 이상 꽂아 넣은 한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두 개의 침을 더 심장 부근에 놓을 예정이었다.
투둑-
한지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황만금의 배에 떨어졌다.
그만큼 한지호도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꾸욱!
또 한 개의 장침이 심장 부근에 꽂혔다.
연달아 두 개의 침을 위험한 혈도에 꽂아 넣은 한지호는 마지막 침을 들었다.
세 개의 침이 심장의 혈도를 자극하면 치솟던 화기가 가라앉을 것이다.
인위적이고 즉각적으로 심장의 기운을 눌러 화기를 차단하는 방법이다.
대신 잘못하면 심장이 과하게 억눌려 심장 마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평범하게 침을 놓는 걸로 보이겠지만, 한지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하나만 더. 제대로 하자.’
한지호가 마지막 남은 침을 황만금의 심장에 푸욱 찔러 넣었다.
꾸욱!
세 개의 침을 심장 부근에 놓았다.
위험한 혈도들을 자극했지만 다행히 심장 마비와 같은 부작용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지호는 염려와 기대가 섞인 눈빛으로 황만금을 쳐다봤다.
시름시름 앓으며 신음을 흘리던 황만금에게 과연 변화가 일어날까.
한지호의 침술로 태자병의 회광반조 현상이 끝날지 귀추가 주목되는 순간이었다.
“흐으읍…….”
신음 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시작됐다.
이전보다 몸을 떠는 빈도가 줄었을 뿐, 황만금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심장 부위의 혈도 세 곳을 자극했어도 태자병의 회광반조 현상을 끝내지 못한 것이다.
한지호는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누워 있는 황만금의 전신을 살폈다.
이대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가.
마냥 기다리다간 황만금의 몸이 버텨내지 못할 게 자명해 보였다.
“방법을 생각하자, 방법을….”
한지호는 입 밖으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모든 해답은 한지호 자신 안에 있다.
그의 전생인 규호의 기억 속에는 분명 해답이 있을 것이다.
한지호는 황만금의 심장 부근에 꽂힌 세 개의 침을 노려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 순간, 불현듯 깨달음이 스쳐갔다.
“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린 한지호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자신이 매일 수련하고 있는 오금희가 해법이었다.
오금희는 화타가 다섯 동물의 모습을 본 따서 만든 무공이면서 동시에 인체의 오행을 바탕으로 한 기공법이다.
곰은 목(木)에 해당하는 간이고, 원숭이는 토(土)에 해당하는 비장, 호랑이는 금(金)에 해당하는 폐, 사슴은 수(水)에 해당하는 신장, 마지막으로 새가 화(火)에 해당하는 심장과 연결 돼 있다.
한지호는 지난 한 달 가까이 꾸준하게 오금희를 수련해왔다.
그러나 몸을 강하게 만들고 초능력과 같은 힘을 주는 무공으로만 생각했었다.
전생에 사부였던 화타가 오금희를 창안한 이유는 의술을 위해서라는 걸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침술로 황만금의 몸에 들끓는 화기를 감당할 수 없다면 오금희가 대안이다.
불을 끄려면 물이 필요하다.
즉 수기(水氣)를 바탕으로 하는 사슴의 힘, 녹공(鹿功)을 펼치면 된다.
자기 안의 해답을 찾아낸 한지호가 침실 문을 쳐다봤다.
황만금의 침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바깥에선 집사와 다른 사람들이 한지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침실 안에서 치료 과정을 지켜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 오금희를 통해 치료를 시도하는 걸 본다면 한지호를 정신병자라고 신고할 것 같았다.
“녹공으로 신장을 자극하는 거야.”
한지호는 스스로 해야 할 바를 명확하게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