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3화 (13/255)

# 13

“자네는 정말 뭔가 다른 한의사 같네. 국내 최고라고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니는 의사, 한의사들도 전부 쓸모없었는데 말일세.”

“회장님은 운이 좋으신 겁니다.”

“그런가?”

“유 팀장님 덕분에 저를 만났으니 말입니다.”

“허허, 그렇지. 그렇고말고!”

한지호의 농담에 황만금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태자병이 낫고 있기에 무슨 말을 들어도 웃음이 날 상황이었다.

침을 갈무리한 한지호는 안색을 바꾸고 당부를 했다.

“방심하면 안 됩니다. 차도가 있지만 완쾌하려면 병의 근본을 잘라내야 합니다.”

“걱정 말게. 자네와 약속한 것들은 철썩 같이 지킬 터이니.”

“네. 병은 의사 혼자 치료하는 게 아닙니다. 환자와 함께 치료하는 겁니다.”

“오! 그것도 명언이구만. 역시 다르단 말이야.”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보게.”

몸을 돌려 서재 밖으로 나가려는 한지호를 황만금이 붙잡았다.

그는 은근한 눈빛으로 한지호를 바라봤다.

황만금은 열흘 사이 살도 조금 붙고 눈빛도 맑아졌다.

발작 횟수가 줄어들면서 시들시들해졌던 생기(生氣)가 돌아온 것이다.

“치료비 말일세. 자네가 어떤 것을 원하든 들어줘야하지 않겠나.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고 있나?”

황만금은 억만장자다.

평창동 저택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가 운용하는 자금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억만장자가 치료의 대가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달콤한 열매가 눈앞에 보일 때일수록 차분하고 냉정해야 한다.

열매를 따기 전이 가장 위험한 법이다.

그는 한 번 숨을 고르고 천천히 대답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치료비는 완쾌하신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흐음…… 알겠네.”

황만금은 어쩐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가진 강력한 무기는 바로 돈이다.

부자들은 돈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돈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급격히 위축된다.

한지호는 처음 진단을 내릴 때부터 치료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돈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태도를 보여야만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전생인 규호는 삼국시대의 군주나 장수들을 포함해 황금을 산처럼 쌓고 사는 부호들도 여럿 치료했었다.

그렇기에 한지호는 부자들을 상대하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었다.

만약 한지호가 먼저 치료비를 요구하며 거액을 불렀다면 관계의 주도권은 황만금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한지호가 돈에 관심 없는 척 의연한 태도를 보였기에 황만금은 계속 그의 눈치를 보게 됐다.

한지호는 자신이 가진 의술이라는 힘을 섣불리 돈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 알아서 돈을 내게 만드는 것이 진짜 고수들의 수법이다.

“생각보다 병이 호전되는 속도가 빨라서 다행입니다. 그럼 내일 뵙죠.”

한지호는 미련을 남기지 않고 등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 평창동 저택 밖으로 나온 그는 뒤늦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치료비로 천만 원 정도 부를 걸 그랬나? 아니야, 잘 참았어.”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평창동 언덕길을 내려갔다.

청우단 50알을 스무 명에게 팔아서 번 돈이 천만 원이었다.

일반적인 한의학 치료로 천만 원이라는 돈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지호는 내심 그 정도 액수를 기대하며 연남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녔지만 한지호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29살 청년이었다.

황만금과 같은 상류층 거물의 스케일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아마 방금 전 저택에서 치료비로 천만 원을 달라고 말했다면 황만금의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말을 아끼고 돈에 관심 없는 모습을 보인 게 백번 잘한 일이었다.

한지호는 태자병을 낫게 해준 대가로 자신이 얻을 게 무엇인지 제대로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황만금의 태자병이 완치되는 날, 그는 기대 이상의 큰 선물을 받게 될 것 같았다.

+++

평창동에서 연남동으로 이동하던 한지호는 유건영의 연락을 받았다.

조금 늦었지만 점심을 먹자는 말에 여의도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황만금에게 침을 놓고 점심을 먹지 않은 터라 배가 고팠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탄 한지호는 금방 여의도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을 막 넘긴 오후 무렵이라 차가 막히지 않았다.

여의도의 고층 빌딩 안으로 들어서자 유건영이 팔을 번쩍 들었다.

1층에서 한지호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한 선생님!”

자신을 너무 반갑게 부르는 소리에 한지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유 팀장님. 열흘 만이죠?”

“네, 벌써 열흘이나 지났군요. 황 회장님의 치료는 잘 되고 있습니까?”

“차도가 있어요. 본인도 낫고 있는 걸 느끼는 중이라 마음도 많이 안정 됐고요.”

“정말 다행입니다. 역시 한 선생님이세요.”

유건영이 한지호를 치켜세웠다.

그는 계속해서 칭찬을 하며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빌딩 지하에 여러 식당과 카페들이 입주한 아케이드가 있기 때문이다.

“한 선생님처럼 명의를 만난 게 올해 최고의 행운인 것 같습니다. 그때 길에서 나눠주신 청우단을 받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하하하.”

“저도 유 팀장님을 만나서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황 회장님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니까요.”

“아닙니다. 황 회장님 치료 건은 제가 한 선생님께 아주 큰 신세를 진 겁니다.”

유건영은 지하에 있는 일식집으로 한지호를 안내했다.

딱 봐도 매우 비쌀 것 같은 고급 일식집이었다.

따로 마련된 조용한 룸에 앉은 유건영은 가게 단골인 듯 편하게 주문을 했다.

“사시미 코스로 줘요. 두 명.”

“네.”

주문을 마친 유건영은 다시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 선생님, 제가 아까 큰 신세를 졌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셨죠.”

“숨은 명의를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황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셨습니다. 덕분에 아주 중요한 고객인 황 회장님께 점수를 땄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한 선생님이 황 회장님더러 당분간 자금 관리에 손을 떼라 했다고 들었습니다.”

“치료를 위해서 내린 처방입니다.”

“그 처방이 어떤 파급 효과를 낳았는지 모르실 겁니다.”

유건영은 미소를 지은 채 한지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지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궁금한 티를 냈다.

“황 회장님께서 자금 관리를 제게 일임하셨습니다. 플래티넘 홀딩스에 입사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자금을 주도적으로 관리하게 된 겁니다.”

증권이나 주식, 투자에 문외한인 한지호는 유건영의 말을 100%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눈치가 있기에 뜻은 통했다.

한지호의 처방 덕에 유건영이 황 회장의 자금을 책임지고 관리하게 됐고, 그 자체가 아주 큰 성과인 모양이었다.

청우단을 통해 맺어진 인연이 유건영에게 복이 됐다.

한지호만 기회를 얻은 게 아니었다.

유건영이 만들어준 기회를 한지호가 제대로 낚아채면서 서로 윈윈(win-win)하게 된 것이다.

아직 황만금의 병이 완치되지 않았지만 유건영은 상황을 낙관하는 듯 했다.

“한 선생님께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보답이라뇨. 저 역시 유 팀장님 덕에 치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입니다.”

“그래도 꼭 보답을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유건영이 말꼬리를 살짝 흘렸다.

그 타이밍에 일식집 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룸으로 들어왔다.

“사시미 코스 들이겠습니다.”

곧이어 테이블 위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밑반찬은 정갈하고 소박했지만, 푸짐하게 그릇을 수놓은 사시미의 퀄리티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지호는 이런 고급 식당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일식에 대해 잘 모르지만 동네 횟집에서 나오는 사시미와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종업원이 나가자 유건영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는 한지호에게도 사시미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먼저 한 점 드셔보세요, 한 선생님.”

“와……. 이런 걸 대접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에는 더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여기도 여의도 금융가 선수들 사이에서 평이 좋은 가게라 괜찮을 겁니다.”

유건영의 말대로 사시미 맛이 예술이었다.

입안에 넣자 곧바로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생전 처음 맛보는 최고급 일식에 혀를 내둘렀다.

부자들은 매일 이런 걸 먹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유건영이 잠시 끊겼던 말을 이어갔다.

“제가 하고픈 보답 말입니다. 봉투나 선물을 드려도 받지 않으실 것 같아서, 늘 숙취와 과로에 시달리는 동료들에게 청우단을 구매하게 만드는 걸로 대신했습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참치회의 풍미를 느끼던 한지호가 눈을 크게 떴다.

유건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청우단 1000알을 구입하겠습니다.”

7장, 의술의 힘 (2)

“1000알을요?”

한지호가 반문을 했다.

유건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에게도 나눠주고, 중요한 고객들께도 50알 씩 세트로 선물을 드리면 1000알도 많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청우단 1000알은 무려 천만 원 어치다.

한지호가 스무 명에게 팔았던 분량을 유건영이 단번에 추가로 주문한 셈이다.

황만금을 치료하며 유건영에게 행운을 안겨다 준 대가였다.

물론 청우단의 효능이 확실하기에 유건영도 믿고 주문을 한 것이다.

어쨌든 한지호는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서 천만 원을 벌게 됐다.

“1000알을 만들려면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황 회장님 치료에 전념하시면서 천천히 만들어 주세요. 입금은 미리 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 팀장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더 감사합니다, 한 선생님.”

주거니 받거니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둘은 미소를 지었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느냐는 그리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사회생활에서 관계를 유지시키는 가장 큰 힘이다.

유건영과 한지호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관계였다.

그래서 짧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후로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한지호는 처음 맛보는 최고급 일식에 연신 감탄하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디저트로는 예쁘게 커팅 된 멜론이 나왔다.

그냥 멜론 한 조각이 나온 게 아니라 주방에서 세심하게 조각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확실히 디저트만 봐도 비싼 집이라는 게 실감됐다.

점심 사시미 코스가 1인당 15만 원이라는 걸 알면 한지호는 더 깜짝 놀랄 것이다.

밥 한 끼에 그만한 돈을 쓴다는 건 그에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지호도 조만간 아무렇지 않게 이런 식당에서 밥을 먹는 날이 올 것 같았다.

스무 명에게 청우단을 팔아 천만 원을 벌었고, 유건영에게 받은 추가 주문으로 또 다시 천만 원을 벌게 됐기 때문이다.

한 달 사이에 청우단으로만 이천만 원이라는 매출을 올렸고, 황만금의 태자병이 완치되면 치료비까지 받을 예정이다.

만약 이런 페이스를 일 년 내내 유지할 수 있으면 그는 순식간에 소득 기준으로 상위 5%에 속하게 된다.

물론 진짜 상류층은 소득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소득보다는 자산이 얼마이냐가 절대적인 기준이다.

그래도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기 시작한 한지호가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유 팀장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디저트로 나온 멜론을 먹던 한지호가 질문을 던졌다.

유건영은 뭐든 물어보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혹시 황 회장님이 어떤 일을 하는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가장 기본적인 것도 말씀을 안 드렸네요. 그날은 너무 경황이 없어서.”

유건영은 웃음을 흘리며 선뜻 대답을 해줄 기세였다.

황 회장의 신상을 묻는 질문이라 조심스러웠는데 큰 문제가 아닌 듯 했다.

“사실은… 아주 오래 전에는 불법 하우스를 운영해서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정계와 검찰에 로비도 많이 했고, 그 바닥에서는 전설로 통한다는군요. 그렇게 번 돈으로 투자를 해서 지금까지 이르렀죠. 현재는 대부분의 자산을 부동산과 주식에 넣어두고 관리만 하고 계십니다. 그 규모가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이고, 현금 보유량으로 따지면 웬만한 기업 오너들이 부럽지 않을 겁니다.”

“불법 하우스라면 도박판이요?”

“네.”

상당히 민감한 이야기인데 유건영은 너무 편하게 말했다.

한지호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황만금이 가진 어마어마한 부의 원천이 불법 도박이라는 게 충격적이었다.

“굉장히 위험한 이야기네요.”

한지호의 말에 유건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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