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2화 (12/255)

# 12

“얼른 들어오라고 하게.”

서재 안에서 황만금의 음성이 들렸다.

한지호의 도착을 무척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병명을 알아내고 치료를 자신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끼이익-

한지호는 서재로 들어서 황만금을 쳐다봤다.

입고 있는 옷만 달라졌을 뿐,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어서 오게. 하루 종일 자네만 기다렸네.”

“증세는 여전합니까?”

“자네가 간 후에도 몇 번이나 더 발작이 찾아왔었지. 그래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텼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준비해온 침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은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먼저 침으로 회장님의 몸에 쌓인 화기를 억누를 겁니다. 꽤 아플 테니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치료가 된다는데 그깟 아픔이 문제겠나.”

“상의를 벗고 뒤로 돌아 앉으세요.”

“알겠네.”

황만금이 훌쩍 상의를 벗고 뒤돌아 앉았다.

한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등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척추 근처의 혈도에 자극을 줘서 몸에 들끓는 화기를 가라앉히려는 것이다.

꾸욱-

“흐으읍……!”

첫 번째 침을 놓는데 황만금이 신음을 흘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기 때문이다.

“아플 거라고 말씀 드렸죠.”

“이, 이렇게 아플 줄은.”

“그럼 그만할까요?”

“아니, 아니야. 내가 참아야지.”

황만금은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까칠하고 신경질적이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단 치료를 맡긴 이상 환자는 대부분 의사 앞에서 얌전한 아이가 된다.

억만장자인 황만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지호는 계속해서 척추 부근 혈도에 침을 놓았다.

억지로 몸 안의 화기를 억누르는 것이기에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됐다.

꾸욱!

“흐으으읍-!”

침을 하나 놓을 때마다 황만금이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화들짝 놀란 집사가 서재 안으로 들어왔지만, 치료의 과정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혈도를 자극해 화기를 누르는 침술은 아무나 펼칠 수 없다.

태자병을 진단한 게 대단한 일이듯, 치료를 하는 것도 한지호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대로 10분만 있겠습니다.”

7개의 침을 놓은 한지호가 말했다.

황만금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발작을 할 때 느끼는 것만큼은 아니라도 참기 힘든 통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제 끝난 건가?”

“우선 침술로 화기를 억눌렀습니다만,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럼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나?”

“10분 뒤 침을 뽑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지호는 조급해하는 황만금을 살살 다뤘다.

불안한 환자를 잘 다루는 것도 의원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실력 있는 의원은 병을 잘 고칠 뿐 아니라 환자의 초조함까지 헤아려 다스리는 법이다.

그렇게 10분이 지났고, 한지호는 7개의 침을 뽑은 뒤 황만금을 돌려 앉혔다.

“느낌이 어떻습니까?”

“잘은 모르겠네. 가슴 부근의 열기가 조금 진정된 듯도 하고…….”

“방금 침을 놓은 것만으로도 발작이 완화 될 겁니다. 하루에 10번 발작이 왔다면 오늘과 내일은 5번 이하로 떨어질 테니 세어 보세요.”

“오오-!”

황만금이 체면도 잊고 환호성을 질렀다.

70살 넘게 먹은 노인이 순수하게 기뻐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생전 맞아본 침 중 제일 아팠네. 그래도 이것만으로 발작 횟수가 준다니… 아픈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아까 말한 것처럼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침술로 몸 안의 화기를 누르면서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 합니다.”

“뭐든 따르겠네. 근본적인 치료법이 무엇인가?”

발작이 줄어들 거라는 말에 황만금은 잔뜩 고무 되어 있었다.

그가 부담스럽게 한지호를 빤히 쳐다봤다.

한지호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태자병에 대해 설명해드린 내용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예로부터 태자와 왕세자들이 자주 걸린 병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민하게 신경 쓸 것이 많아 화병이 쌓이고, 거기에 기름진 음식과 풍족한 생활로 양기가 넘쳐서 걸리는 병이라 했었지.”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한지호는 할아버지 연배이자 억만장자인 황만금을 손쉽게 다루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말을 계속했다.

“침술과 약재로 회장님의 몸 안에 넘치는 화기와 양기를 다스릴 겁니다. 하지만 생활 습관이 변하지 않으면 완쾌는 어렵습니다.”

“어떤 습관을 변화시켜야 하는가?”

“우선 육식을 줄이십시오. 꼭 필요한 단백질을 제외하면 채식 위주로 식단을 짜 드리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지.”

“또 하나, 사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얼른 말해보게.”

“여자를 멀리하셔야 합니다.”

“여자?”

황만금의 눈이 커졌다.

뜬금없이 은밀한 사생활 이야기를 하자 놀란 모양이다.

한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원으로서 해야 할 말을 했다.

“태자병이 걸릴 정도로 양기가 넘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과거의 태자들처럼 살아야 가능한 일이죠. 육식 위주의 풍족한 식생활 외에도 수많은 여자들을 품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 그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시면 제대로 된 치료가 어렵습니다.”

“그래, 내 이 마당에 뭐가 부끄럽다고. 남자가 돈 벌어 즐길 게 여자 말고 또 있겠나? 밥숟가락 들 힘은 남아있으니 매일 밤 여자들을 갈아치운다네.”

“한동안은 금욕을 하셔야 합니다.”

“헌데 남녀가 합방하는 건 음양의 도리 아닌가?”

황만금이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방중술이라고 들어 보셨죠? 방중술에 입각해서 음기와 양기를 주고받으면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만, 무작정 욕정에 취해 여자를 안으면 몸 안의 양기만 거세게 일어납니다. 방중술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양기를 내어주고, 음기를 흡수하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그럼 그 방중술을 좀 가르쳐….”

“회장님. 태자병이 낫는 게 우선 아닌가요?”

“그, 그렇지. 일단 낫고 봐야지.”

황만금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70살이 넘었어도 남자는 남자인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든 방중술에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채식 위주로 식사를 하고 여자를 끊으면 되는 건가?”

“또 있습니다.”

“또?”

채식과 금욕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두 가지만으로는 부족했다.

한지호는 한숨을 내쉬는 황만금에게 금욕보다 더 어려운 주문을 했다.

“채식과 금욕은 양기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화기를 일으키는 습관도 개선해야죠.”

“그게 뭔가.”

“회장님께선 어마어마한 자금을 관리하며 일일이 투자처를 챙긴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태자들이 권력을 계승하고 살아남기 위해 예민해졌다면 지금은 돈이 그 역할을 대신하지 않겠습니까. 병이 낫기 전까지는 돈 관리에서 한 발짝 물러나시고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크흐음!”

채식도, 금욕도 무리 없이 받아들였던 황만금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에게 있어 돈은 삶의 이유이자 인생의 모든 것이다.

돈 관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치료를 위해서라도 황만금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물러섬이 없었다.

전생의 규호는 조조 앞에서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던 위인이다.

그의 기억을 간직한 한지호가 황만금에게 꼬리를 말 리 없었다.

“매일 발작과 고통에 시달리면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자금 관리를 맡긴다고 해서 회장님의 돈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닐세.”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로서는 아주 쉬운 문제입니다. 제 말을 따르고 완쾌 하실 건가요? 아니면 계속 태자병으로 고통을 받으실 건가요? 선택은 회장님의 몫입니다.”

무척 도발적인 말이었지만 그만큼 깊은 울림이 있었다.

환자와 병을 앞두고 양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지호의 강직한 기세에 황만금도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자네 말을 따르면 낫는다는 말이지?”

“자신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걸세. 자금 관리까지 포기하게 만든 책임을 말이야. 그래도 자신 있나?”

황만금이 무서운 눈빛으로 한지호를 노려봤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다.

위험한 협박이지만 한지호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지겠습니다. 대신 회장님의 병이 완쾌되면 의사에게 이렇게 무례한 것에 대해 사과를 받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한지호가 황만금을 똑바로 쳐다봤다.

결국 황만금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알겠네. 당분간 자금 관리는 유 팀장에게 일임하도록 하지.”

“명심하세요. 채식, 금욕, 그리고 마음의 평화입니다. 회장님께서 이걸 지켜주면 제가 만든 한약과 침술로 태자병을 낫게 하겠습니다.”

“자네만 믿어 보겠네.”

한지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아우라를 뿜어냈다.

어찌 보면 막대한 돈과 권력을 지닌 황만금과 위험한 내기를 한 것이다.

만약 치료가 잘 안 되면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지호는 스스로를 믿었다.

태자병을 낫게 하고, 황만금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또 다른 기회를 받아 내리라 다짐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야망을 가슴 깊이 삼킨 한지호는 한의사로서 본분에 충실하고 있었다.

7장, 의술의 힘 (1)

한지호가 황만금의 치료를 맡은 것도 벌써 열흘 전의 일이다.

열흘이 지나는 동안 황만금은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밥을 먹었고, 매일 침실로 부르던 텐프로 여자들을 찾지 않았다.

채식과 금욕에 이어 자금 관리까지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에게 일임했다.

평소 황만금은 돈에 집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자금 관리를 전적으로 위임 받은 유건영도 깜짝 놀랐다.

매일 투자 현황을 일일이 체크하던 황만금이 확실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한지호의 덕분이었다.

그는 조조 앞에서도 당당했던 규호처럼 치료를 위해서라면 절대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한지호의 강력한 주장 아래 황만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말이 쉽지 채식과 금욕을 지키며 돈에 신경을 끊는 건 각고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는 태자병으로부터 낫겠다는 일념 하에 한지호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한지호는 매일 점심 무렵 평창동 저택을 방문해 침을 놓았다.

척추 부근의 혈도에 7개의 침을 놓아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처음 침술을 펼칠 때도 그랬지만, 인위적으로 화기를 누르는 침술이기에 통증이 만만치 않다.

매일 점심 평창동 저택 2층 서재에서는 황만금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열흘째인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으으읍! 이건 정말 맞아도 맞아도 적응이 안 되네.”

등판에 7개의 장침을 맞은 황만금이 엄살을 떨었다.

사실 엄살이라고 표현할 수만은 없었다.

한지호가 그에게 펼치는 침술은 높은 통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0분입니다, 회장님.”

한지호는 스마트 폰을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침이 왜 아플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선 이미 여러 번 설명을 했었다.

오행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火氣)를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침술이다.

쉽게 말해 몸 안의 불을 끄기 위한 침술이니 아플 수밖에 없었다.

황만금은 이만큼 아픈 침술을 피하지 않고 매일 받아냈다.

한지호의 치료법을 따르자 병세가 약해지는 걸 체감했기 때문이다.

고작 열흘이 지났을 뿐인데 발작의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매일 침을 맞고, 한지호가 달인 한약을 복용하면서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영원히 나을 것 같지 않던 태자병이 약해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침을 맞는 것보다 더 힘든 채식과 금욕, 돈에서 관심 끊기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열흘 사이 황만금은 한지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됐다.

한지호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병명을 알아냈을 뿐 아니라 제대로 치료를 해내는 유일한 의사였다.

계속된 발작과 통증으로 미쳐가던 황만금에겐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10분 됐습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시간을 잰 한지호가 황만금의 등에서 7개의 장침을 뽑았다.

침을 놓을 때와 달리 뽑을 때는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의 시간을 잘 넘긴 황만금은 기지개를 켜며 한지호를 쳐다봤다.

“오늘도 수고 많았네.”

“회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약은 잘 드시고 계시죠?”

“그럼, 그럼. 하루 세 번 빼먹지 않고 마신다네. 생각보다 쓰지 않아서 좋더군.”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한약이 무조건 쓰다는 것도 잘못된 편견입니다. 깨끗한 약초로 잘 달인 한약은 결코 쓰지 않아요. 깊은 맛이 나면 모를까.”

한지호의 말에 황만금이 크게 감명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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