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으으읍…….”
너무 이를 세게 물어서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한지호의 눈은 빨갛게 충혈 돼 있었다.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 한지호가 마지막 남은 침을 들었다.
기다란 장침이 놓을 자리가 하나 남았다.
복숭아 뼈 근처에 있는 곤륜혈이 마지막 자리다.
곤륜혈에 시침을 하면 꿈속의 규호처럼 13개 혈도를 전부 점하게 된다.
과연 이만한 통증을 참아내고 위험을 감수한 보람이 있을까.
아니면 엄청난 고통과 알 수 없는 부작용만 남긴 채 미친 짓을 한 것으로 기억 될까.
한지호는 묘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곤륜혈에 침을 놓았다.
기다란 장침이 복숭아 뼈 부근의 곤륜혈로 빨려가듯 쑤욱 들어갔다.
침이 막히지 않고 쑥 들어간다는 것 혈도를 잘 찾았다는 뜻이다.
비로소 가장 위험한 전신 13개 혈도에 모두 침을 놓았다.
꿈에 나타난 규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혈도를 관통하면 자신의 육신에 깃든 모든 기억이 깨어날 거라고 했다.
콰콰콰쾅-!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하늘에 벼락과 천둥이 나타난 것일까.
바깥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다만 한지호의 머릿속에서 천둥 소리가 울리는 것뿐이었다.
콰쾅- 콰콰쾅!
13개 혈도에 침을 꽂은 한지호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이 끝을 알 수 없는 머나먼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몸은 연남동 자취방에 있지만 영혼은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날아갔다.
심연의 소용돌이가 한지호의 영혼을 휘감고 있었다.
+++
“뭐지? 분명 내 방에 있었는데 여긴 대체 어디야?”
한지호가 캄캄한 사방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온통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떨어져 헤매고 있었다.
연남동 자취방에서 13개 혈도에 침을 놓은 순간 의식이 희미해졌고, 난데없이 어둠 속에 떨어진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오래지않아 풀렸다.
어둠 저편에서 새하얀 도포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꿈에서 본 남자, 천사원에서 괴력이 솟아나게 만들었던 장본인, 그리고 한지호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
바로 삼국지의 시대를 살았던 규호가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규호?”
한지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도포를 펄럭이며 나타난 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가 한지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억겁의 시간이 지나 윤회의 때가 도래했으니, 십삼대혈법(十三大穴法)으로 봉인해둔 지난 생의 기억이 너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윤회? 십삼대혈법? 13개 혈도에 침을 놓은 걸 말하는 거라면…….”
“내가 숨 쉬며 쌓은 모든 기억과 경험이 너의 안에서 깨어날지니-!”
규호가 두 팔을 뻗어 한지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한지호는 깜짝 놀란 얼굴로 쌍둥이처럼 생긴 규호를 쳐다봤다.
더 놀라운 일은 지금부터였다.
하얀 도포를 입은 규호의 몸이 한지호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슈우욱-
규호는 한지호의 몸 안으로 흡수 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또 다시 어두운 시공간에 한지호 혼자 남겨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삼국지의 역사 이면에 숨어있던 의성(醫聖) 규호.
화타의 제자로서 스승의 의술을 초월해 삼국시대라는 난세를 관통했던 천하제일의 의원.
다름 아닌 한지호의 전생이 그와 하나가 되었다.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과 경험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낯선 시공간에서 각성하고 있었다.
불세출의 의술을 지녔던 규호는 십삼대혈법을 통해 전생의 기억을 일깨우는 방안을 창시했다.
한지호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수많은 직업 중에 한의사를 선택한 것도 운명의 장난이었다.
매번 이상한 삼국지 꿈을 꾼 것, 부천 천사원에서 화타가 창안했다는 오금희를 떠올려 괴력을 뿜어낸 것도 모두 본능에 새겨진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
십삼대혈법으로 전생을 모두 자각하게 된 한지호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시공간에서 한지호의 각성이 계속되고 있었다.
+++
스르륵-
감겨있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한지호의 검은 눈동자는 이전보다 훨씬 짙고 깊어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꽂힌 13개의 침을 하나하나 뽑았다.
십삼대혈법은 성공적이었다.
이로서 규호로 살았던 전생의 기억을 모두 되찾은 한지호는 다른 차원의 인간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정체성이 흔들린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한지호다.
다만 전생의 기억과 경험을 지녔기에 특별한 능력을 각성하게 된 것뿐이다.
29살의 어느 날, 거의 2000년 전의 기억을 깨달은 한지호는 연남동의 좁은 자취방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곧 넓은 세상이 한지호의 존재를 알게 될 것 같았다.
3장, 씨앗 만들기 (1)
한지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료하게 받아들였다.
어떤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고, 냉정하게 스스로를 돌아본 것이다.
29살, 고아원 출신, 한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로 전역, 폭행 전과가 있지만 일반 병원에는 취업이 가능한 스펙, 그리고 전생에 화타의 제자였다는 걸 기억하고 있음.
역시 마지막이 핵심이었다.
운명은 그에게 전생을 자각하게 만들었고, 과거에 쌓은 능력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흡수됐다.
쉽게 말해 지금의 한지호는 현대 한의학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였다.
한의학은 대체 의학으로 인정받으며 세계 유수의 의대에서 뜨거운 연구 대상이다.
항암 치료로 유명한 텍사스 의대에서 한의학을 테마로 한 대체 의학 연구 팀을 만들었고, 존스 홉킨스 의대의 교수들도 동양 의학의 신비를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외과적인 수술이나 즉각적 치료에서는 서양 의학에 밀리는 게 사실이다.
예방 차원으로 보약을 짓거나 재활 치료로 침을 맞고, 가끔 극단적인 대체 의학으로 한의학을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전설 속 신의로 알려진 화타의 제자 규호는 외과 수술과 내과 치료에 모두 능했었다.
독화살을 맞은 관우의 팔을 직접 수술했고,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을 한방 치료로 낫게 만들었었다.
한의학의 ‘한’은 원래 삼국지 시대의 한(漢)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그 당시 천하제일의 의원이었던 규호의 경지는 현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능력을 갖게 됐으니 일반 한방 병원에 취업해 월급쟁이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방 병원에서 일하는 페이 닥터는 평균 400만 원 정도를 받는다.
예전에 비해 한의사가 많아지면서 급여가 낮아졌다.
뛰어난 경력을 가지고 대형 한방 병원에 들어가면 월급이 800만 원 수준으로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한지호의 경력으로는 400만 원에서 500만 원 수준의 급여가 최선이다.
물론 그것도 절대 적은 돈은 아니다.
다른 월급쟁이에 비하면 큰돈을 받고 비교적 편하게 일할 수 있다.
만약 전생을 각성하지 못했다면 한지호는 고민 없이 페이 닥터로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폭행 기록이 생겼어도 일반 병원에서 범죄경력조회를 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될 터였다.
그러나 전생을 각성한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평범한 페이 닥터로 남을 수는 없다.
로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생역전의 기회가 찾아왔고, 한지호는 품안에 들어온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전생의 규호가 십삼대혈법을 전수하며 남긴 말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 의술만으로는 난세를 끝낼 수 없었다. 나의 침은 한 번에 한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장군과 군주들은 한 마디로 수천 수만의 병사를 죽여 버린다.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천하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조조, 유비, 손권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허나 한낱 의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의 후생이여, 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천하를 움직이는 자리에 올라라. 그리하여 천하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란다. -
피맺힌 절규였지만, 전생의 규호와 현생의 한지호가 같은 인물은 아니다.
한지호는 다만 전생의 기억을 알게 됐을 뿐,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왔다.
그에게는 천하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라는 규호의 유언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다만 의술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높고 강한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말은 격하게 공감이 됐다.
한지호는 힘없는 사람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힘을 가져야만 했다.
자연스레 얻게 된 천하제일의 의술을 이용해 힘을 손에 넣을 것이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마리아 수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녀님, 저 지호입니다.”
“그래, 지호야.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네, 모두 잘 될 것 같습니다. 초아에게도, 다른 아이들에게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제가 금방 다시 천사원을 세울 테니까.”
“말만 들어도 힘이 되는구나. 그래도 무리하지 말고 건강부터 챙겨야 한다. 알고 있지?”
“다음에는 좋은 소식 들고 전화 드릴게요, 수녀님.”
한지호는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마리아 수녀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전화를 끊은 그의 눈동자에서 불타는 열정이 엿보였다.
컴퓨터 앞에 앉은 한지호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이런저런 검색을 했다.
그는 전생을 자각한 후 첫 걸음을 내딛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었다.
+++
이른 아침, 한지호는 비장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그는 동대문에 위치한 경동시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경동시장 안에는 서울에서 가장 큰 약재상 거리가 있다.
한약을 제조하는데 쓰이는 온갖 약초들이 거래되는 곳이다.
한지호는 얼마 남지 않은 비상금을 털어 약초를 구입할 계획이었다.
전생을 각성하고 처음으로 선택한 일이 약초 구입이라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한방 병원에 취직해 월급쟁이 한의사가 되기엔 깨달은 능력이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당장 개원을 할 수도 없다.
고아원 출신에 학창 시절부터 신용 등급이 워낙 낮아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어려운 신세였다.
무턱대고 한의대 교수나 선배들을 찾아가 의술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지호는 한의대 사람들이 얼마나 질투가 심한지 잘 알고 있었다.
침술 실습 과목에서 한지호가 수석을 놓치지 않자 동기들은 물론이고, 몇 몇 교수들도 고아원 출신인 그가 앞서 나가는 걸 고깝게 여겼었다.
한의대 6년 내내 심한 견제를 받았던 한지호는 학교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기껏 규호가 익힌 차원이 다른 의술을 보여줘 봤자 사이비 취급을 당하거나 방해를 받을 것 같았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마련해야 한다.
최소한 한의원을 열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하고, 그 뒤에 본격적으로 돈을 쓸어 담을 생각이었다.
돈이 곧 힘인 세상에서 한지호는 천하제일의 의술로 서울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한의사가 되고 싶었다.
첫 번째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 뒤에는 다른 길이 보일 것이다.
우선은 한의원 개원을 위한 시드 머니(seed money)를 만드는 게 지상과제다.
경동시장에 도착한 그는 망설임 없이 약재상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약재를 골라야 할지 머뭇거릴 필요도 없다.
제조하려는 한약의 재료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문제는 질 좋은 약초를 최대한 싸게 사는 것이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고, 한약은 약초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약재상 거리에 들어선 한지호는 매의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코끝으로 약재상 특유의 냄새가 들어왔다.
말려진 약초들이 뿜어내는 향에서 은은한 흙 냄새가 났다.
약재상 거리의 상인들은 특별히 호객 행위를 하지 않았다.
대부분 도매로 약초를 파는 상가이고, 가는 손님을 억지로 붙잡는다고 약초를 사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손님이 발걸음을 세우고 약초를 살펴보면 그제야 말을 거는 식이었다.
한지호는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좋은 약재상을 찾을 수 있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그는 냄새만으로 상급 약초를 분간하는 능력이 생겼다.
‘으음… 실망스러운데.’
약재상 거리를 반쯤 지나친 한지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약초 냄새 중에서 마음을 잡아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다들 그저 그런 약초만 진열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깊은 산속에서 나는 귀한 약초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의 약효를 낼 수 있는 깨끗한 약초면 된다.
하지만 상업성에 찌든 약재상 거리에서 그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가게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