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머릿속에 제조법이 있어도 알맞은 약초가 없으면 제대로 된 한약을 만들 수 없다.
한지호는 입맛을 다시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맹수처럼 신경을 집중했다.
이제 곧 약재상 거리의 끝이 보였다.
이대로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하나 싶은 순간, 한지호의 코끝에 시원한 소나무 향이 감지됐다.
아주 약하게 느껴지지만 분명 이제까지 맡은 냄새와는 다른 종류였다.
한지호는 그대로 멈춰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나머지 감각이 더 예민해진다.
모든 신경을 코에 집중한 그는 소나무 향이 불어오는 곳을 찾았다.
약초들은 저마다 내는 향이 다르지만, 자연에서 깨끗하게 자란 것에서는 대체로 시원한 소나무 냄새가 난다.
소나무 향을 풍기는 가게의 약초들은 믿을만 하다는 뜻이다.
물론 일반인, 심지어 한의사라 해도 코끝으로 향을 구분해내는 건 쉽지 않다.
예전의 한지호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그러나 전생을 깨닫고, 규호가 익혔던 경지를 습득한 한지호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왼쪽에서 좋은 향이 불어오고 있어.’
눈을 뜬 한지호가 왼편을 바라봤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약재상 중 한 곳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쪽으로 걸어가니 소나무 향이 점점 짙어졌다.
이제 확실해졌다.
경동시장의 약재상 중에서 이곳이 가장 깨끗한 약초를 취급하는 곳이다.
수십 년 약초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분별하기 어려운 걸 한지호는 코끝으로 해냈다.
그는 약재상의 간판을 쳐다봤다.
- 명징약초 -
명징(明澄)하다는 건 밝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다른 약재상과 달리 이곳에서 어렴풋하게 자연의 향기가 났다.
한지호는 진열대에 놓인 약초들을 조심스레 뒤적였다.
당귀 같은 저렴한 약초들이 주로 놓여 있었는데, 진열대에선 소나무 향이 확 올라오지 않았다.
“약초 사시려고?”
한지호가 진열대 앞을 서성이자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아저씨가 명징약초의 주인장인 것 같았다.
“네. 여기 약초가 괜찮은 것 같아서요.”
“젊은 사람이 약초 볼 줄은 아는구만.”
한지호의 칭찬에 주인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한지호가 원하는 건 진열대에 놓인 약초들이 아니었다.
명징약초의 안쪽에서 소나무 향이 솔솔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찾는 게 있는가? 뭐든 말해보게.”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한 듯 주인장이 눈을 빛냈다.
한지호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고 말했다.
“찾는 게 있긴 한데, 여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진열대 말고 안쪽에 있는 물건들을 좀 보고 싶은데. 안 되겠습니까?”
“안쪽을 보겠다고?”
“네. 좋은 약초들은 가게 안쪽에 따로 모아두신 것 같습니다만.”
“녹용 같은 비싼 약초를 찾는 게 아니라면 진열대나 안이나 다른 게 없네.”
명징약초 주인이 약간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새파랗게 젊은 한지호가 뭘 안다는 듯 말하자 눈을 부라렸다.
수염이 덥수룩한 털보 아저씨가 눈을 부라리면 무서워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렬한 눈빛으로 주인을 보며 확신에 차서 말했다.
“당귀, 강황, 작약, 헛개. 그 외에도 몇 가지 약초들을 더 사겠습니다. 진열대에 있는 것 말고 안쪽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 걸로!”
3장, 씨앗 만들기 (2)
한지호의 목소리에서 거부하기 힘든 위압감이 흘러 나왔다.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의 음성에는 특별한 힘이 실린다.
그는 진열대가 아니라 안쪽에 상태가 좋은 약초들이 있다는 걸 알았고, 일말의 머뭇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부라리던 털보 사장도 한지호의 기세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아는 척하는 풋내기가 아니라 진짜 뭘 아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자네, 어디서 무슨 소문이라도 듣고 왔나?”
“소문이요?”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 안쪽에 괜찮은 약초들이 있다는 걸 아느냔 말일세.”
“그거야 냄새만 잘 맡으면.”
“응?”
“아, 아닙니다. 그냥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지호는 많이 누그러진 주인과 함께 명징약초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소나무 향이 코를 시원하게 뚫어줬다.
진열대에서 느껴지던 것보다 훨씬 깊은 냄새가 한지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전생을 각성하며 얻은 감각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찾는 걸 살펴보게.”
털보 주인은 기대 어린 시선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명징약초 내부는 제법 넓었다.
이곳에서 과연 한지호가 제대로 된 물건을 찾아낼지 궁금한 것이다.
한지호는 사양하지 않고 약재가 놓인 수납장 곳곳으로 손을 뻗었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의 코와 감각이 자연스레 손을 이끌었다.
스르륵- 타악!
수납장을 열고 닫는 손짓이 점점 빨라졌다.
곧이어 한지호는 필요한 만큼의 약초들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사이 명징약초 주인의 얼굴색은 새하얗게 변했다.
한지호가 수많은 약초들 사이에서 최상품의 자연산만 골라서 집어냈기 때문이다.
평생 약재상을 운영하며 살아온 그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런데 20대로 보이는 한지호가 손쉽게 좋은 약초만 골라내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대체 어떻게…….”
“자연에서 제대로 자란 약초들이 꽤 있네요. 허탕을 칠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계산해주세요.”
“아니, 계산하기 전에 나랑 이야기 좀 해야겠네.”
“이야기요?”
만족스럽게 약초들을 골라낸 한지호가 주인을 쳐다봤다.
털보 아저씨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절대 약초를 팔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는 슬슬 명징약초의 주인 아저씨가 약간 귀엽게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인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자네가 누구인지부터 말해주게. 어디 한약방에서 나왔나? 일반 손님은 아닐 테고!”
“한약방 소속은 아니고, 그냥 한의사입니다.”
“한의사?”
“네. 아직 병원에서 일하는 건 아니지만.”
“젊은 한의사가 이렇게 약초를 잘 알아본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왜 못 믿으세요.”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명징약초 주인은 한지호의 한의사 면허증을 보고도 믿기 어려운 듯 눈을 깜빡거렸다.
보통 한의사는 직접 약초를 다루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약재상이나 한약방 사람들에 비해 약초를 고르는 노하우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지호는 약재상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도 하기 힘든 일을 척척 해냈다.
감각만으로 명징약초에 좋은 약초가 있다는 걸 알아냈고, 안에 들어와서도 정확히 최상품의 약초만 골랐다.
한의사 면허증에 적힌 생년월일을 보면 이제 고작 29살이었다.
명징약초 주인은 약재상을 운영하며 만난 한의사 중에 한지호처럼 약초에 정통한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한지호라, 한지호. 자네 정말 놀라운 친구로구만.”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제 계산을 좀…….”
“나는 최치우라고 하네. 그냥 최 사장이라 부르게.”
“잘 부탁드립니다, 최 사장님.”
“여기 이 약초들을 팔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보겠네. 좋은 약초만 골라서 구별한 거, 어떤 방법을 쓴 건가? 다른 약재상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을 쟁여두고 단골들에게만 가끔 풀고 있었는데 자네가 대뜸 나타나 챙겨가게 생기지 않았나.”
“음.”
한지호는 잠깐 망설였다.
화타의 제자이자 삼국시대 천하제일의 의성이었던 전생을 깨달았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곧 생각을 정리한 그는 최치우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제가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한의사라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예끼, 이 친구야! 내가 장난하는 것 같은가?”
“좋은 약초에서 나는 특유의 향이 느껴져 찾은 것뿐인데, 다른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하면 드릴 말씀이 없지요.”
“하긴…… 그것도 그렇구만.”
명징약초 최 사장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초 값을 계산 해주면서 신기함과 놀라움이 뒤섞인 눈길로 한지호를 유심히 살펴봤다.
“특이한 친구일세. 아무튼 약초 보는 눈이 있으니 앞으로도 찾는 게 있으면 우리 가게로 오게. 다른데서 헛수고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하는 약초를 구입한 한지호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그는 오늘 구입한 약초들로 씨앗을 만들 계획이었다.
이 씨앗이 자라서 하늘을 뚫는 거목(巨木)이 될 것이다.
병원에 취직해 월급을 받는 평범한 한의사의 길에서 벗어난 한지호가 어떤 일을 꾸밀지, 누구도 감히 짐작하지 못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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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좁은 연남동 원룸에서 열심히 환단을 만들고 있었다.
남들 앞에 제대로 내보일 경력도, 부탁을 할 인맥도 없는 그는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한다.
한방 병원에 들어가지 않고 큰돈을 벌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환단으로 자신을 알리는 것이었다.
환단(丸丹)은 약초를 섞어 한입에 먹기 쉽게 동그란 알약으로 만든 한약을 뜻한다.
사람들이 잘 아는 공진단(供辰丹)도 환단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한 알에 몇 만 원씩 하는 비싼 공진단을 만들 순 없었다.
지금 한지호가 공진단을 만들어 팔아봤자 사주는 사람이 없을 게 뻔했다.
대신 그는 저렴하지만 깨끗한 약초로 즉각적인 효능을 내는 환단을 제조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한의원이나 한약방에서 만들어 파는 환단과는 차원이 다른 효과를 내야 한다.
그래야만 한지호의 계획대로 시드 머니를 벌고, 상류층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얻었다고 급한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반드시 탈이 날 것 같았다.
한지호는 어려서부터 차별과 견제를 받는데 이골이 났었기에 대한민국이 얼마나 무섭고 냉정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
지금 만드는 환단이 그를 키워줄 씨앗이 될 것이다.
당귀나 강황, 작약과 헛개는 흔한 약초다.
그 외의 몇가지 약초 역시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종류였다.
재료로서 이 약초들이 가지는 차이점은 딱 하나, 깨끗하고 건강하다는 것뿐이다.
경동시장 전체를 뒤져 찾아낸 약초들이니 재료로는 합격점이었다.
그러나 약초가 깨끗하기만 해서 뛰어난 효능을 낼 수는 없다.
당귀, 헛개 등을 이용한 환단과 한약은 어느 한의원에서든 쉽게 살 수 있다.
평범하거나 조금 괜찮은 수준의 환단으로는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
아주 확실하고 즉각적인 효능으로 환단을 먹는 사람을 매료시켜야 한다.
보통 한의사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특별한 제조법으로 환단을 만들었다.
약초를 이용해 한약을 만드는 건 참 오묘한 과정이다.
원래 독(毒)과 약(藥)은 한끝 차이다.
좋은 약도 잘못 쓰거나 과하게 쓰면 독이 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도 제대로 쓰면 약이 된다.
저렴한 약초들도 어떤 비율로 배합을 하고, 조화롭게 섞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효과를 만들어낸다.
한의대에서는 한국에서 널리 통용되는 한약 제조법을 가르쳐주지만, 한지호의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한 지식이 쌓여 있었다.
한의학의 뿌리인 중국 한(漢)나라 시절 천하제일 의원이 바로 그의 전생이다.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사라진 의술의 원리를 응용해 새로운 환단을 만들었다.
관우의 팔을 수술하고,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렸던 의성(醫聖) 규호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깟 환단을 만드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물론 전생의 기억을 꺼내 쓰는 것이기에 아직 100% 손에 익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환단 100개를 만들었다.
책상 위에 하얀 종이에 쌓인 환단 100개가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뿌듯한 얼굴로 자신이 만든 환약들을 쳐다본 한지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름을 뭐로 할까. 숙취 해소와 각성 효과를 지니고 있으니까…….”
순간 한지호의 뇌리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각성 음료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레드 불(red bull).
붉은 황소라는 뜻을 지닌 레드 불은 강력한 각성 효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카페인 음료수다.
각성 효과에 추가로 숙취를 해소하는 효능까지 갖춘 환단이니 자극적인 붉은 황소가 아니라 푸른 황소라는 이름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청우단(靑牛丹). 이거 괜찮네. 레드불처럼 팔 수 있으면 대박인데.”
한지호는 자신이 지은 환단 이름이 마음에 드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