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한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를 마친 20대 내내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해봤다.
남들보다 출발선이 뒤쳐져서 그걸 따라잡는데 20대를 다 바쳤다.
그렇게 힘들게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섰는데 또 발이 걸려 넘어진 셈이었다.
다시 일어서서 달리면 되지만 가슴에 쌓인 울분이 적을 리 없었다.
천사원에서 난동을 부린 덩치 세 명이 미웠고, 나아가서는 덩치들을 보낸 건설회사, 또 냉정하고 잔인한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털썩!
고량주와 억울함에 동시에 취한 한지호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
어두운 골목 귀퉁이에 쓰러진 그는 여느 취객처럼 길바닥에서 잠이 들 모양이었다.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이 한지호를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
차가운 현실을 뚫고 꿈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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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도포를 입은 남자가 절벽 끝에 앉아있었다.
바람에 밀리면 그대로 떨어져 뼈도 못 찾을 것 같은 아찔한 낭떠러지였다.
하지만 남자는 조금도 무섭지 않은 듯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높이를 헤아리기 힘든 절벽 아래에서 어렴풋이 쇳소리가 들려왔다.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대다.
절벽 아래 평야에선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죽이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천하를 떠돌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본 남자, 규호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조조로부터 자유의 몸이 된 후 유비와 조조, 손권의 군대가 싸우는 현장을 쫓아 다녔다.
그곳에서 전란에 휘말린 민초들을 치료하며 의성(醫聖)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화타의 제자로서 스승의 의술을 뛰어넘은 규호는 하루에 수백 명의 환자를 치료할 때도 있었다.
규호의 명성이 높아지자 장군과 군주들도 그를 초청했다.
주태를 고치고, 관우를 치료한 인연이 있기에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들과 마주하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술로 민초들을 구하고, 난세를 끝내는데 도움이 될 장군들을 살려서 사명을 다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졌다.
절벽 끝에 앉은 규호는 절망과 분노를 억누르며 품에서 기다란 침을 꺼냈다.
푸우욱!
그는 가운데 손가락보다 더 긴 장침을 정수리에 꽂았다.
백회혈이라는 아주 위험하고 민감한 혈도에 스스로 침을 놓은 것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계속해서 침을 꺼낸 그가 거침없이 자신의 혈도를 찔렀다.
푸욱- 푸우욱!
의술을 익힌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규호는 의학의 원리를 거스르고 있었다.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는 혈도에 연달아 침을 푹푹 놓은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무려 13개의 장침을 온몸에 꽂은 그가 심호흡을 했다.
다른 의원들은 감히 이렇게 위험한 혈도 13곳에 침을 놓을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의술의 경지가 하늘에 닿았다는 규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침을 다 놓고 심호흡을 마친 규호가 입을 열었다.
마치 눈앞에 누군가 들을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을 했다.
“백회혈에서 곤륜혈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머리끝에서 발끝을 연결하는 13혈도를 관통해라! 내 육신에 새겨진 모든 기억이 깨어날 것이다.”
규호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의술만으로는 난세를 끝낼 수 없었다. 나의 침은 한 번에 한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장군과 군주들은 한 마디로 수천 수만의 병사를 죽여 버린다.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천하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조조, 유비, 손권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허나 한낱 의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의 후생이여, 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천하를 움직이는 자리에 올라라. 그리하여 천하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란다.”
알 수 없는 말을 끝낸 규호가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 꽂힌 침은 그대로 남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이봐요, 이봐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한지호의 몸을 흔들어 깨우는 중이었다.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어쩌려고 이래요. 얼른 정신 차려요, 총각!”
“으음…….”
한지호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쨍쨍한 햇살, 익숙한 골목의 풍경.
어젯밤 중국집에서 나온 후 길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신이 좀 들어요?”
“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한지호는 자신을 깨워준 아주머니에게 여러 번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켰다.
숙취의 여파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걱정스런 얼굴로 한지호를 깨운 아주머니가 그의 등을 두드려줬다.
“젊은 사람이 술에 의지하면 못써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적당히 마시고 집에 들어가야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한지호는 요즘 보기 드물게 정이 많은 아주머니에게 진심을 다해 인사를 했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잠이 든 건 부끄러운 일이다.
아주머니가 자신을 단순한 취객으로 보지 않고 염려해준 것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숙취의 고통과 길바닥에서 잠들었다는 부끄러움을 뛰어넘는 감정이 있었다.
바로 호기심이다.
꿈에서 나온 하얀 도포를 입은 남자.
절벽 끝에 앉아 자기 몸의 혈도에 침을 놓은 남자의 얼굴이 무척 익숙했다.
한지호가 자주 꾸던 삼국지 꿈의 주인공, 그리고 천사원에서 덩치들을 때려눕히기 전 호통을 쳤던 환영 속 인물, 마지막으로 어젯밤 꿈에 나온 남자는 모두 동일 인물이었다.
규호라는 이름을 지닌 그 남자의 얼굴은 한지호 자신과 닮았다.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대체 그 남자가 왜 자꾸 나타나는 건지, 13개의 위험한 혈도에 침을 놓은 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를 깨워준 아주머니는 걸음을 옮겼고, 길바닥에 멍하니 선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우연이라고 하기엔 예사롭지 않은 꿈을 연속해서 꿨기 때문이다.
“규호…. 13개의 혈도…….”
한지호는 꿈에서 얻은 힌트를 중얼거리며 자취방으로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는 뭔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울분을 토하며 술에 의지하던 어제의 한지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2장, 꿈과 현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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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에 도착한 한지호는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우선 몸에 남아있는 술기운을 씻어내고 싶었다.
밤새 길바닥에 쓰러져 자느라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쏴아아아-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니 딱딱하게 뭉친 근육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지호는 몸의 피로를 풀며 술에 취해서 꿨던 꿈을 떠올렸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가 계속 꿈에 나타나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규호라는 인물은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한지호에게 영향을 끼쳤다.
부천 천사원에서 규호의 호통을 들은 후 괴력이 솟아났었다.
이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현실에서 궁지에 몰려 망상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진짜 미친 걸까?”
한지호는 욕실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지난밤 꿈속에서 규호가 했던 것처럼 13개 혈도에 침을 놓고 싶어졌다.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긴 힘들다.
다만 부천 천사원에서 괴력이 솟았던 것, 그리고 생생하게 연결되는 꿈의 비밀을 풀기 위해선 그 방법이 유일한 듯 싶었다.
문제는 13개 혈도의 위치다.
한지호는 꿈속에서 규호가 직접 침을 놓은 13개 혈도를 전부 기억했다.
정수리의 백회혈을 시작으로 발끝의 곤륜혈까지, 하나 하나 함부로 침을 놓기 어려운 자리였다.
민감하고 위험한 혈도 13곳에 동시에 장침을 놓으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른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한의대를 졸업하면서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경우였기에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까짓 거… 진짜 죽기야 하겠어?”
어디서 이런 용기가 솟아나는지 모를 일이다.
거울에 비친 한지호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꿈에서 나온 그대로 침을 놓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탈이 나면 더 이상 이상한 꿈에 휘둘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어도 최근 일어난 나쁜 일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히고 욕실에서 나온 한지호가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알몸인 채 물을 닦은 그가 심호흡을 했다.
한의사이기에 침은 얼마든지 있다.
스르륵-
한지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서랍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장침들이 원룸의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마치 침들이 자신을 집어달라고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조심스럽게 장침 13개를 꺼냈다.
꿈에서 본 그대로 침을 놓을 것이기에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처억.
그는 꿈속의 규호처럼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비록 전쟁이 벌어지는 절벽 위는 아니지만 표정은 충분히 비장했다.
한의사로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직전이다.
그러나 연결되는 꿈을 계속 꾸는 것과 괴력이 솟아났던 것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해가 안 되는 일 투성이라면 끝을 보는 게 방법일지도 모른다.
꾸욱-
한지호가 자신의 정수리에 침을 놓았다.
백회혈이 어디인지는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다.
함부로 건드릴 혈도가 아니지만,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끌림에 사로잡혀 있었다.
꾸욱- 꾸욱!
혈도에 침을 놓을 때마다 미세한 소리가 울렸다.
민감한 혈자리에 침을 맞는 건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의대에서 공부하며 숱하게 자기 몸에 침을 놓았던 한지호에겐 대수롭지 않은 통증이었다.
‘6개……. 이제 7개 더 남았어.’
한지호는 지금까지 놓은 침의 수를 헤아렸다.
꿈속에 나왔던 것처럼 13개 혈도에 침을 놓기까지 7개가 남았다.
아직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변화는 7번 째 혈도에 침을 놓는 순간 나타났다.
“흐읍!”
한지호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하마터면 한의사 체면도 잊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7번 째 혈도에 침을 놓자마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척추를 타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민감하고 위험한 혈도에 연달아 침을 놓는 부작용이 드디어 나타난 것 같았다.
확실히 꿈에 나왔던 시침법은 정상적인 게 아니었다.
인간의 육체 각 부위에서 가장 민감한 혈도만 골라서 침을 놓는 방법이 안전할 리 없었다.
‘여기서 그만해야 하나?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 같은데…….’
한지호는 덜컥 겁이 났다.
계속 침을 놓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멈추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았다.
천사원에서 솟아났던 괴력, 너무 생생해서 마음을 사로잡은 꿈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이 방법이라는 걸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음… 썰어야겠지?’
한지호는 흔들리는 자신을 다독이며 8번 째 혈도에 침을 놓았다.
정수리 백회혈에서 시작한 혈도가 어느새 허리 부근까지 내려왔다.
“후-.”
이번에는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허리 전체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찌릿찌릿하게 울렸다.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고통 때문에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면 계속 침을 놓기 힘들어질 것 같았다.
한지호는 이를 악물고 9번 째, 10번 째 혈도에 연달아 침을 놓았다.
뒤로 갈수록 고통이 심해졌고, 가부좌를 튼 몸이 기우뚱 거릴 정도였다.
이제 3개가 더 남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다.
이상야릇한 승부욕이 발동 됐다.
한의대를 다닐 때도 침술 실습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한지호다.
그는 몸의 이상을 느끼면서도 꿈에서 본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침을 놓았다.
‘거의 다 왔어!’
한지호는 무릎 부위의 혈도에 침을 놓았다.
다리가 저릿저릿해지는 느낌이 무척 불쾌했다.
마치 무릎 전체에 쥐가 난 것 같았다.
그 다음은 종아리다.
종아리 중심에는 온몸으로 퍼지는 혈관들이 뭉쳐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 건드리면 다리뿐 아니라 몸 어디에서 말썽이 날지 모르는 부위다.
꾸우욱!
종아리 쪽에는 유독 깊이 침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아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밀집된 혈관을 타고 어마어마한 고통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