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귀룡 성(城) (1) >
부모님 앞에 뛰어온 재윤은 지금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그토록 찾았던 부모님들이 앞에 계셨다.
도무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흘러내릴 뿐이었다.
“재윤아!”
“우리 아들!”
강두성과 김지현이 다가와 그를 끌어 안았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 순간인가.
그저 어디서라도 아들이 살아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는데.
이토록 건장하고 멋지게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고맙다. 살아있어줘서.”
“흐윽! 정말 고맙다, 재윤아.”
누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겠는가.
남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살아서 다행이란 말을 해도 고맙다는 말은 가족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저도 고맙습니다. 두 분 다 무사하셔서요.”
재윤은 부모님을 한 분 한 분 다시 한 번 안아드렸다.
할 말은 정말 많지만 지금은 일단 안전한 귀룡 위로 모시는 게 우선이었다.
루니스가 그 사이 인근의 괴물들을 모두 쫓아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흑룡과 그의 부하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 사이 귀룡이 근처로 내려앉았고 재윤은 모두를 귀룡 위로 안내했다.
“로사엔, 마스터를 뵈어요.”
“제칸이 주인님을 뵙습니다.”
“세붐!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제야 로사엔 등이 재윤에게 인사했다.
재윤은 방금 전 오면서 베르타로부터 대략 사정은 들었다.
부하들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을 하나 하나 끌어안으며 격려해줬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아니에요. 저희들의 힘이 너무 미력해서 그만.”
“그런 말 하지마라. 너희들이 잘해줘서 두 분이 무사한 거야. 역시 내 부하들답구나.”
재윤의 진심어린 격려와 칭찬에 로사엔 등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스터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 관리자 놈이 배신만 하지 않았어도 이리 힘들지 않았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럼 사람들도 죽지 않았을 거고요.”
제칸과 세붐은 쥬크의 배신이 지금도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재윤은 그 또한 베르타로부터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말 가슴이 철렁할 만큼 섬뜩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악마의 유혹이 그만큼 무섭다. 뻔히 수작인 걸 알면서도 넘어가게 되니까.”
재윤도 마왕의 마력구 때문에 얼마나 그런 유혹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다행히 마력구를 파괴한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런 유혹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재윤은 조다연과 에이든을 향해서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당신들이 저희 부모님을 도와드렸다고 들었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조다연이 무슨 말이냐는 듯 대답했다.
“오히려 저희가 도움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살 수 있게 됐는걸요?”
“맞습니다. 카테나에서 두 분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겁니다.”
에이든도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재윤은 알고 있었다.
위급한 순간에 조다연은 목숨을 걸고 그의 어머니 김지현을 부축했고, 또한 에이든은 아버지 강두성을 부축해 이동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역할이 소소했을지라도 부모님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들임은 분명했다.
재윤은 그들의 용기와 도움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 * *
귀룡의 등은 희망 성처럼 파투스의 힘이 생성되는 지대다.
따라서 베르타에게 코인을 지불하고 웬만한 건물은 다 설치할 수 있다.
그동안에는 그냥 숙식을 위한 3층 건물만 하나 지어놨지만, 이제 부모님과 함께 지내야 하는 터라 각별히 신경을 써서 최고급 저택으로 바꿨다.
코인이 소모되지만 재윤에게는 남아도는 게 코인.
24시간 안전지대를 생성해도 수십 년이 넘도록 코인이 떨어질 걱정은 없었다.
‘귀룡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어디도 안심할 수 없었을 거야.’
귀룡의 등은 안전 지대가 생성되어 있을 때는 이동 시에도 그냥 평지에 있는 듯 편안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귀룡이 상공을 비행하고 있을 지라도 저택이나 정원에 있을 땐 그런 걸 느낄 수 없다.
재윤은 추가로 등의 경계를 빙 둘러 성벽처럼 높은 벽을 설치했고 안쪽으로는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이는 외부에서 안을 보지못하게 만드는 용도도 있지만, 반대로 저택이나 정원에서도 밖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귀룡은 수시로 괴물들이 있는 곳을 지나야 한다.
집밖 창문으로 그것들의 모습이 보이면 편히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귀룡의 등에는 밖에서 볼 때는 성(城)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귀룡이 움직이면 성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재윤은 이곳을 『귀룡 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희망 성이나 도시 초승달이 있는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여기서 계속 지낼 겁니다.”
재윤은 관리자 쥬크의 사례도 있고 해서 이곳 세계에 있는 도시들의 안전지대에 부모님을 모실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8개 도시 연맹의 임시 맹주일 뿐 관리자들이 진심으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았다.
샤인과 아르크스를 관리하고 있는 에이미라면 믿을 수 있지만, 그래도 섣부른 단정은 금물.
희망 성의 오르도나 초승달의 이예은처럼 충성의 맹약을 한 관리자가 아니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거북이 등에 이런 걸 세울 수가 있다니?”
이렇게 재윤이 귀룡 성을 세우고 그 안에 저택을 만들자 가장 좋아하는 이는 김지현이었다.
외부와 분리된 안전한 공간에서 아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자, 다 모이세요. 오늘은 파티를 할 겁니다.”
부모님을 만나면 가장 하고 싶던 일이었다.
게다가 여긴 충성스러운 부하들도 있었다.
믿음직스러운 동료인 용사 루니스와 베르타.
그리고 재윤에게 정말로 고마운 존재들인 조다연과 에이든.
재윤은 조다연과 에이든도 귀룡 성의 멤버로 인정해주었다.
재윤이 인정한 멤버는 그들이 나가려 하지 않는 한 귀룡 성에서 계속 지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조다연 등은 아직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뒤바뀐 세상에서 귀룡 성의 멤버가 된 것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지를 말이다.
곧바로 베르타는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 모든 음식 메뉴 창을 열어놨다.
재윤은 먹음직스러워보이는 음식은 모조리 주문해 기다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당연히 술과 음료도 종류별로 다 주문했다.
“어머니! 아버지! 한 잔씩 올리겠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아계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호호, 그래. 고맙다.”
“나는 지금도 이 순간이 꿈만 같구나, 재윤아.”
김지현과 강두성은 이 순간이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했다.
정말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재윤은 용사 루니스와 베르타, 그리고 부하들에게도 한 잔씩 따라줬다.
물론 조다연과 에이든에게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귀룡 성의 내부에서 즐거운 파티가 이어지는 사이 귀룡은 상공을 날아 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가장 가까운 운명의 탑이 있는 곳.
파티를 마치면 재윤은 운명의 탑에 들러 아루넬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 * *
한편 그 시간 흑룡 데카투스의 거처.
그의 표정은 매우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그놈이 결국 끝까지 나를 몰아붙이는구나.’
크시라가 죽었다.
그녀는 본래부터 흑룡의 부하가 아니라 마왕 데사오의 권속이었다.
흑룡이 데사오의 부하가 되며 크시라의 상관이 된 것 뿐이다.
크시라의 죽음은 암흑의 서, 마왕의 마력구와 더불어 마왕 데사오의 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주는 사건이었다.
‘분명 추궁을 당할 것이다.’
아니 추궁 정도가 아니라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순순히 당할 수는 없지.’
그가 처음부터 데사오의 부하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필요에 의해서 뜻을 같이했을 뿐.
다만 데사오의 전투력이 뛰어나 그에게 굴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내가 선택할 길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그 강재윤이라는 인간 놈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여 없앰으로 그간의 실수를 만회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왕 데사오가 지난 과오를 묻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보였다.
이제는 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용사 루니스가 옆에 있는 데다, 고대의 귀룡이라는 것을 타고 다니는 터라 도무지 놈을 손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스스스-
바로 그때 그의 앞에 마왕 데사오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한심한 놈!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하더니 그것이 크시라를 죽이는 일이었느냐? 나는 이번 일에 실패하면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데카투스는 몸을 떨었다.
“저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너는 이제 한쪽 날개도 잃어 용사 루니스를 견제하는 것도 불가능한 폐물이다. 또한 너로 인해 나는 수많은 권속들을 잃었다. 그런 너를 살려둔다면 모두가 나를 우습게 보겠지. 나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너 따위 녀석은 무거운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데사오는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떤 징벌을 내리실 생각입니까?”
“지금 즉각 마계로 널 소환하겠다. 구차하게 굴지 말고 징벌을 받아라. 용으로서의 마지막 명예는 지킬 수 있도록 해주마.”
용으로서의 마지막 명예라.
결국은 죽인다는 뜻?
예상했던 바였다.
데사오는 그러고도 남을 마왕이니까.
“내가 거절한다면?”
“네놈이 미친 것이냐?”
환영이지만 가공스러운 살기가 데사오의 몸에서 피어나왔다.
데카투스는 인상을 구겼다.
알고 있다.
미친 짓이라는 것을.
마왕 데사오는 그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도 당해낼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니까.
그러나 그건 그녀의 본신이 있을 때의 얘기다.
환영 자체의 능력도 대단하긴 하지만 명색이 흑룡인 그가 마왕의 환영 하나 대적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한쪽 날개를 잃었다고 해도 말이다.
곧바로 그는 고개를 들고 데사오를 차갑게 노려봤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내가 당신의 일을 도운 건 어디까지나 뜻이 맞았을 뿐이지, 당신의 권속이 된 건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매번 나를 권속 취급을 했다.”
그러자 데사오는 가소롭다는 슥 데카투스를 노려봤다.
“나의 권속들 중에 너보다 강한 녀석이 몇이나 있을 것 같으냐?”
그 섬뜩한 기세에 데카투스는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담담히 버터냈다.
그래봤자 환영일 뿐이니까.
데카투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단한 권속들을 두고 왜 나를 필요로 했는지 잊었나 보군. 당신이나 그놈들이나 운명의 힘에 눌려 마계에 처박혀 있을 뿐 이곳에서는 기껏해야 환영으로 겁주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지?”
“네놈이 점점 미쳐가는구나. 내가 이곳에 강림하면 가장 먼저 네놈부터 찢어죽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느냐?”
“강림하면 그렇겠지. 하지만 강림을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도 나의 강림을 막지 못한다.”
그러자 데카투스는 큭 웃었다.
“절대적인 건 없다. 마왕의 마력구가 인간 각성자 놈에 의해 파괴된 걸 잊었나 보군.”
“그것으로는 나의 강림이 잠시 늦어질 뿐임을 모르느냐?”
“그것도 가봐야 아는 것이겠지.”
순간 데사오의 눈빛이 살짝 당혹스럽게 변했다.
그녀는 흑룡 데카투스가 이미 변심했음을 눈치챈 것이다.
“어리석은 놈! 내가 널 소환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느냐?”
“어리석은 건 너다, 데사오. 내가 그런 것도 대비없이 네게 이런 말을 할 거라 생각하나?”
데카투스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나를 적당히 몰아붙여야했다. 내가 성질도 죽이고 네게 협조한 건 이 뒤바뀐 세상을 지배하는 최후의 지배자 중 하나가 되고 싶었을 뿐이지 너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데사오가 조소를 흘렸다.
“미친 녀석에게는 긴말이 필요없겠지. 과연 마계로 소환되고도 그말을 하는지 두고보마.”
그녀는 그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데카투스는 인상을 확 구겼다.
‘빌어먹을!’
이제 그는 마왕 데사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가만히 있어도 데사오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도 별 수 없었다.
이대로 마계로 끌려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마왕 데사오! 네가 강한 건 인정하지만 날 너무 얕봤다. 내가 널 이기지는 못해도 너의 계획을 망쳐놓을 수 있는 수준은 된다는 걸 말이야.’
데카투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많은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 * *
울창한 숲의 한 공터에 우뚝 솟아 있는 정체불명의 탑.
다름 아닌 운명의 탑이었다.
그 주위로는 짙은 안개가 생성되어 있었다.
그 앞으로 거대한 거북이 귀룡이 날아내렸다.
그 사이 파티를 끝낸 재윤은 모두 푹 쉬게 한 후 귀룡 성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운명의 탑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각성자님! 운명의 탑에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루넬이 재윤을 반갑게 맞았다.
평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루넬의 태도가 무척이나 정중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그녀는 불친절하거나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항상 상냥한 미소를 띠고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허리까지 공손히 숙이며 마치 상전을 대하듯 공손한 태도였다.
“갑자기 왜 그런 식으로 저를 대하는 겁니까, 아루넬 님?”
재윤은 궁금해서 물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