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귀룡 성(城) (2) >
그러자 아루넬이 상기된 표정으로 재윤을 바라봤다.
“각성자님, 당신이 무슨 일을 하신 줄 아시나요?”
순간 재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재앙으로 변하는 베르타를 본래로 돌려놓은 것 때문입니까? 그게 운명의 룰을 위반한 행동이라고 탓하신다면 저로서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 일 때문에 당신을 부른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걸 탓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아니, 어느 누구도 당신을 탓할 수 없어요. 그건 당신이 운명의 룰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운명을 극복한 것이기 때문이죠.”
“운명을 극복했다고요?”
아루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대부분의 중요한 운명의 룰은 외부에서 이곳 세계로 들어온 강력한 존재들에게 적용되는 제한이라 할 수 있어요. 마왕 데사오가 특별한 조건이 달성되기 전에는 지구에 강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중요한 제한 중 하나거든요.”
“어떤 조건이 이루어지면 마왕이 강림하는 거죠?”
“재앙과 관련이 있어요. 피 그림자의 재앙이 일정 이상 영역을 점령한다거나, 마인들의 숫자가 얼마 이상으로 늘어난다거나 하는 등등 다양하죠.”
“그럼 마왕이 날 공격한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군요.”
“마왕은 본래 당신을 직접적으로 방해하거나 간섭할 수 없어요. 하지만 예외적으로 당신이 그들이 보유한 기반 즉, 재앙을 파괴하려 하면 방어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해 오죠.”
재윤은 대충 상황이 이해가 되었지만 왠지 어이가 없었다.
지구에는 끔찍한 재앙이 마왕과 같은 존재에게는 기반이라니.
“또한 베르타가 봉인된 힘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제한 중 하나입니다. 누군가 이 룰을 어기게 되면 다른 제한자들도 룰을 지킬 이유가 없어지죠. 그때는 이곳 세계에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마왕 데사오가 룰 따위 무시하고 강림할 수 있다는 뜻이군요.”
“맞아요. 그때 이곳은 무서운 전쟁터로 변할 거예요. 지구의 각성자나 비각성자, 기타 약한 존재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험악한 환경이 펼쳐져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이 될 수도 있어요. 즉,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운명의 룰은 그런 끔찍한 종말로부터 지구의 각성자들과 비각성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랍니다.”
아루넬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베르타가 재앙으로 변하는 걸 구해준 건 아주 특별한 일이었어요. 운명을 극복하려는 당신의 초절한 의지가 이루어낸 쾌거인 터라, 제한자들이 그걸 빌미로 간섭할 여지가 없거든요.”
재윤은 안도하며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솔직히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베르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운명과 맞섰을 뿐이니까.
아르넬이 미소 지었다.
“그런 행운은 또 다시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건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운명과 맞서 승리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건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특별한 의미라면?”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부터 특별하다 느끼긴 했지만 운명에 맞서고 승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답니다.”
아루넬은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 같은 분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이제부터 운명은 당신을 도울 거예요. 물론 이 또한 룰에 위반되지 않는 한도 내이겠지만요.”
운명이 도와준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재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아루넬이 재윤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재윤의 오른 손을 잡아당겨 그 손등에 키스를 했다.
“이제부터 저는 당신을 따르겠어요.”
재윤의 두 눈이 커졌다.
아루넬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신이 운명의 탑에서 나갈 수도 있습니까?”
“물론 제 스스로는 불가능하죠. 하지만 당신이 원하면 가능해요.”
“불가능하지만 제가 원하면 가능하다?”
“그것이 운명 극복자의 능력이랍니다. 이제부터 당신에게는 제한이 사라졌어요. 파투스의 힘이 아닌 다른 것들도 당신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다른 능력이 뭐죠?”
“저도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해요. 다만 설령 재앙이라 불리는 것들이라 해도 당신의 손에 들어가면 재앙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심지어 재앙을 이용해 재앙을 대적할 수도 있어요.”
재앙으로 재앙을 대적한다?
아루넬은 점점 더 황당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 재윤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절 따라온다고 했으니 앞으로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제가 당신을 도우려면 운명의 탑이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귀룡 성에 운명의 탑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어요?”
귀룡 성이라는 이름을 아루넬이 벌써 알고 있다니 신기했다.
재윤은 끄덕였다.
“귀룡 성에 운명의 탑이 있다면 저도 편하죠. 그런데 당신이 나오면 이제 이 탑은 어떻게 되나요?”
“저의 분신이 남아있으니 염려 말아요.”
“그렇군요.”
잠시 후 재윤은 운명의 탑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 나오지 않고 아루넬의 손을 잡고 함께 나왔다.
환한 빛의 날개를 가진 아루넬이 운명의 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 *
귀룡 성 내부 정원 한쪽에 고풍스러우면서도 신비로운 모습의 탑이 하나 세워졌다.
운명의 탑이었다.
이제부터 뭔가 궁금한 일이 있으면 재윤은 언제든 운명의 탑을 방문해 아루넬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곳 분리된 세계의 도시들을 모두 연결하면 다른 분리된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리게 되죠. 그때는 당신이 있던 세계와 왕복이 가능해지고 제한됐던 관리자 통신도 모두 가능해집니다.”
아루넬을 통해 재윤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하나 해결되었다.
장차 레벨 85를 달성한다고해도 피 그림자의 재앙을 해결하려면 그쪽으로 이동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흑화 용사 아르데아가 그곳에 있으니까.
“그럼 도시를 연결하는 일을 계속 해야겠군요. 또 궁금한 일이 생기면 들어오겠습니다.”
재윤은 운명의 탑을 나왔다.
“재윤아!”
그때 강두성이 재윤을 불렀다.
귀룡 성의 정원은 작은 공원처럼 산책로도 만들어져 있고 나무와 풀, 꽃들이 아름답게 심어져 있다.
그곳으로 강두성은 산책하듯 걷고 있다가 재윤을 보자 부른 것이었다.
“예, 아버지?”
“잠시 함께 걸을 시간 있니?”
“물론이죠.”
재윤은 곧바로 강두성의 옆에 섰다.
귀룡이 알아서 새로운 도시 바란으로 향하고 있으니 재윤은 그 사이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아버지와 산책을 하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
물론 산책은 부수적인 것이고 주된 것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세상이 뒤바뀌기 전에는 아버지와 대화를 자주 나누지 못했다.
서로 각자의 일에 바빴으니까.
그러나 부모님과 생이별을 경험했던 재윤은 진짜 중요한 일이 뭔지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험!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시간이 나면 틈틈이 나와 파티를 해서 레벨 좀 올려줬으면 좋겠구나.”
“그거야 염려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재윤은 미소 지었다.
이미 그는 아버지의 레벨이 Lv16인 것을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파티에서 외면당하고 무시당했다는 사실도.
따라서 그는 아버지가 어디서도 무시당하지 않도록 레벨 업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다들 몰라서 그렇지 전술 약화는 대박 능력이에요, 아버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예, 그걸로 일반 괴물들이 아니라 보스급 괴물들의 전술도 약화시킬 수 있어요.”
상위 등급 지식을 가진 괴물의 전술을 파악할 수 있는 재윤이기에 누구보다 전술 약화가 얼마나 엄청난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보스의 필살기 위력을 대폭 감소시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 전술 약화인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레벨을 대거 높여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고레벨인 아들이 그의 전투 능력을 인정해주자 강두성은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재윤도 미소 지었다.
“일단 능력 강화석이 제게 많으니 전술 강화를 10단계까지 올리고, 극 전투 능력도 하나 각성하셔야 해요. 레벨은 틈나는대로 파티 사냥을 통해 올려드릴게요.”
“고맙다. 고렙이 되어야 나도 뭔가 도울 일이 생기겠지. 참, 그리고.”
강두성은 깜빡했다는 듯 잽싸게 집으로 들어가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고블린 세붐이 선물로 줬던 황금빛 보물 상자였다.
“이건 선물이다. 받거라.”
“오! 어디서 이런 것을?”
재윤은 깜짝 놀랐다.
Lv60 봉인 해제 조건의 보물 상자라니.
이런 봉인된 상자에는 괴물 보스를 해치우고 나오는 상자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것들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네 부하 고블린 세붐이 기특하게도 내게 이 선물을 주더구나. 하지만 60레벨 제한이니 그림의 떡 아니냐?”
재윤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세붐은 역시 보물 고블린이었다.
그런 기특한 짓을 하다니.
“그럼 이건 아버지께서 60레벨이 되시면 열어보세요.”
“아니다. 언제 60레벨이 될 줄 알고. 그보다는 지금 내 레벨에 맞는 장비나 좀 챙겨줘라. 이건 네가 갖고.”
“예, 염려마세요. 확실히 챙겨드릴게요.”
“어서 상자를 열어보거라.”
곧바로 재윤은 상자를 열어봤다.
그러자 그 안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책이 한 권 있었다.
[마경(비급)을 얻었습니다.]
* 마경(魔經)
-분류 : 비급(神沒)
-특별한 자격을 갖춘 자만 연공이 가능하다.
‘마경?’
재윤은 놀랐다.
딱 봐도 뭔가 강력한 전투 능력이 수록된 비급이었다.
광역기인 혈광파 이후로 아직 새로운 전투 능력을 얻지 못한 그로서는 상당한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파라락.
그러나 책을 펼쳐봤지만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
뭔가 알림이 뜨지도 않았다.
‘이건 뭐지? 특별한 자격을 갖춘 자만 자만 연공이 가능하다니.’
그렇다면 재윤이 이 책을 보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건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대체 어떤 자격일까?
곧바로 재윤은 책을 들고 운명의 탑에 들어가 아루넬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그녀는 책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놀랍군요. 이 책에 있는 능력을 얻으실 수만 있다면 재앙을 파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대단한 능력입니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건 분명해요. 문제는 자격에 대한 제한이죠. 이 책을 얻은 장소에 가보면 그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재윤은 운명의 탑을 나와 세붐을 불러 물어봤다.
세붐은 즉시 대답했다.
“거긴 게이트를 통해 처음 이동한 장소에서 우연히 찾아낸 비밀 동굴이었습니다.”
“그 비밀 동굴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어?”
“예, 주인님. 그 근처 숲으로만 가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습니다.”
재윤은 그 비밀 동굴에 가보기로 했다.
다만, 그 사이 귀룡이 도시 바란에 도착한 터라 일단 도시부터 연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바란의 관리자 이레인은 은빛 날개를 가진 여성이었는데 재윤은 제마검을 통해 일단 그녀가 악마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봤다.
제마검을 쥐고 있으면 악마 계열의 존재는 즉각 알아볼 수 있으니까.
다행히 아니었다.
곧바로 재윤이 팔성기(八星旗)를 보여주자 이레인은 흔쾌히 도시 연맹에 가입의사를 밝혔다.
“도시 바란의 관리자 이레인, 도시 연맹의 맹주이시자 팔성기의 주인이신 강재윤 님을 환영합니다. 높은 명성을 가지신 당신이 맹주로 있는 곳이라면 저로서는 진심으로 연결을 희망하는 바입니다.”
성주 명성 Lv11의 위력인 것일까?
이레인은 재윤을 향해 무한한 존경심을 보여 주었다.
[도시 바란이 도시 연맹과 연결되었습니다.]
[팔성기가 구성기(九星旗)로 변합니다.]
[당신의 명성이 상승합니다.]
이로써 아홉 개의 도시가 연결되었고, 재윤은 구성기의 주인이 되었다.
곧바로 재윤은 도시 아르크스에서 매입한 교역품 상자를 바란의 거래소에 처분했다.
동시에 아르크스에 있는 교역품 상자 200개를 사서 귀룡의 창고에 쌓아두었다.
이런 식으로 도시를 오갈 때 한 번씩만 해줘도 재윤은 막대한 코인을 벌어들일 뿐만 아니라 해당 도시의 재정에도 기여하게 된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니 어느 도시를 가든 교역품 거래는 꼭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재윤은 귀룡을 다시 도시 바란에서 고블린 세붐이 찾은 비밀 동굴 인근 숲쪽으로 이동시켰다.
새로운 도시를 연결하기 전 그 동굴부터 들어가보기 위함이었다.
“저곳입니다, 주인님.”
귀룡이 숲에 도착하자 세붐은 금세 비밀 동굴의 위치를 기억해냈다.
그러자 루니스가 동굴 입구를 노려보며 말했다.
“동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저도 함께 가겠어요.”
그녀는 재앙 파괴자인 재윤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터라 위험한 장소에는 절대 혼자 보내지 않았다.
재윤으로서는 고마운 일.
동굴 탐사 일행은 재윤과 세붐, 루니스, 그리고 베르타였다.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루니스가 한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쪽에 결계가 있어요.”
세붐도 발견하지 못한 결계.
용사인 루니스는 단번에 그곳에 뭔가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즉시 결계를 향해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은 그냥 빈 공간만 지날 뿐이었다.
“안전지대 보호막과 비슷한 막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검으로 파괴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쪽을 본 재윤의 두 눈이 커졌다.
[Lv60 이상 진입 가능]
[인연자는 들어오라!]
알림이 아닌 상태창 팻말 같은 것이 떠 있었다.
각성자만 볼 수 있는 터라 세붐이나 루니스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저만 들어갈 수 있는 곳 같군요.”
재윤이 설명을 해주자 루니스는 끄덕였다.
“그럼 전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염려 마세요.”
재윤은 제마검을 손에 쥔 채 결계를 통과했다.
안으로 들어오자 밀실이 나왔다.
길게 동굴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달랑 방 하나 뿐이라니.
‘아니, 웬 사람이?’
놀랍게도 밀실의 바닥에 웬 노인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으윽! 엄청난 기세다.’
숨조차 쉬기 힘들만큼 강력한 기세!
그것이 노인의 시체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을 줄이야.
‘어떻게 시체에서 이런 기운이! 흑룡보다 강력해보이는데?’
그런데 돌연 노인이 눈을 번쩍 뜨고는 재윤을 쳐다봤다.
시체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