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운명에 맞서다 (2) >
세마르의 피리를 분 후 숲이 알려준 방향으로 이동하던 재윤은 돌연 아래에서 거대한 나무 괴물을 발견했다.
높이가 무려 1백 미터도 넘는 거대 나무.
‘저 모습은?’
재윤은 나무 괴물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베르타가 한 번 폭주했을 때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는 저처럼 거대하지는 않았다.
그때보다 몇 배는 더 커졌고 기세는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가히 흑룡의 본체 못지않을 정도였다.
“저 나무 괴물은 뭘까요, 재윤 님?”
루니스 또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부디 제가 생각하는 상황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재윤은 즉시 귀룡을 하강시켰다.
루니스가 눈을 빛냈다.
“마궁의 재앙 크시라를 부술 듯 움켜쥐고 있는 걸 보면 적어도 흑룡이나 마왕 패거리는 아닌 게 분명해요.”
“아마도 그는.”
나무 괴물과 가까워지면서 재윤은 그가 베르타라는 사실을 점차 확신할 수 있었다.
“왔나, 강재윤?”
아니나 다를까, 나무 괴물도 재윤을 알아보는 듯 곧바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마치 우레처럼 귀를 울렸다.
“설마 진짜 베르타?”
“그렇게 됐다. 그대의 부모님은 무사하니 걱정마라.”
그말을 듣는 순간 재윤은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로 베르타가 부모님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입에서 두 분이 무사하다는 말까지 나오니 정말 꿈만 같았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베르타가 무엇 때문에 이런 괴물이 되어버렸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공연히 이렇게 되었을 리 없다.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부모님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폭주한 것이리라.
“지체할 때가 아니다, 인간. 어서 내가 움켜쥐고 있는 재앙을 제거하고 나로부터 멀어져라. 잠시 후면 나는 재앙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더 강력해질 뿐만 아니라 나의 이성은 완전히 사라져 오직 파괴의 본능만 존재하는 재앙이 될 것이다.”
재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폭주한 건가?”
“큭!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대에게 진 빚은 이걸로 갚는 걸로 치자. 앞으로 루팅은 그대가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이 상황에 별걸 다 걱정해주는군.”
“시간이 없다. 정신이 흐릿해지고 있으니 서둘러라.”
그말과 함께 베르타는 재윤의 앞으로 크시라를 이동시켰다.
“잠깐! 날 죽이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내 뒤에는 흑룡 데카투스 님뿐 아니라 마왕 데사오 님도 계신다.”
베르타를 향해 그토록 비웃음을 날렸던 크시라가 재윤을 보자 기겁했다.
그녀는 이전에도 재윤에게 죽을 뻔했기 때문에 그 공포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화아악!
특히나 재윤이 제마검을 꺼내 손에 쥐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제발 살려줘! 뭐든 시키는대로 다할게.”
“닥치고 그만 사라져라!”
제마검이 빛을 뿌리는 순간 크시라의 머리가 박살났다.
동시에 그녀의 몸체도 그대로 먼지가 되어 부서졌다.
[당신은 마궁의 재앙 크시라를 소멸시켰습니다.]
[이후 마인들이 더 이상 부활하지 못합니다.]
[재앙을 파괴해 명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당신의 명성이 Lv11이 되었습니다.]
[전쟁신의 강림이 Lv11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명성이 1단계 상승했다.
[성주로서의 명성이 크게 올라 당신 소유 안전지대의 단계가 일제히 상승합니다.]
계속해서 도시 초승달을 비롯한 안전지대들의 단계가 상승했다는 알림이 계속 울렸지만, 재윤의 귀에 그것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점점 더 괴물화되고 있는 베르타의 모습을 보며 그는 침통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앙을 파괴해 명성 레벨이 상승했으면 기뻐해야 정상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재윤의 부모님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재앙화시키며 모든 걸 내던진 베르타다.
잠시 후면 이성까지 사라져 완전히 괴물이 되어버릴 그를 보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재앙으로 변하면 그대를 몰라보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부디 그때 그대가 날 제거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숲과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인간들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는 재윤의 손에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재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못 죽여! 내가 어떻게 베르타를 죽여?’
그는 코인 상점의 주인이자 루팅 일꾼이었다.
필요한 뭐든 그를 통해 구할 수 있었고, 괴물들을 사냥할 때도 루팅에 신경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해서 아쉬운 게 아니었다.
코인 상점이야 베르타보다는 못하지만 도시로 가면 이용할 수 있고, 루팅이야 번거로워도 직접 하면 되니까.
베르타는 그저 코인 나무이자 루팅 일꾼이라서 소중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 뒤바뀐 세상에서 재윤의 믿음직한 친구이자 든든한 조언자였다.
친구를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하물며 재윤의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자를 말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대체 어째서 당신이 재앙으로 변해야 하는 거지?”
재윤이 물기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묻자 베르타가 큭 웃으며 대답했다.
“운명의 룰을 따르지 않아서다. 이 뒤바뀐 세상에서 코인 나무로 지내야 할 내가 나의 본분을 망각하고 봉인된 힘을 사용했으니 그에 마땅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그 대가가 재앙이라고?”
“나 또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명이 나에게 그같은 형벌을 준다면 피할 방법이 없다.”
순간 재윤의 두 눈에서 일순 강렬한 백색의 섬광이 일어났다.
“그깟 운명의 룰 따위가 뭐라고?”
재윤은 베르타의 거대한 몸체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기운들을 향해 제마검을 휘둘렀다.
쾅! 콰아앙!
폭음이 울리며 시커먼 나뭇가지들이 제마검에 의해 파괴되어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베르타! 당신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 그러니 포기하지마라.”
“크큭! 소용없는 짓이다! 그대도 나도 운명의 힘은 거스르지 못한다.”
그러나 재윤은 그 소리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웃기지 말라고 해. 운명이고 뭐고.”
베르타는 그저 재앙과 맞섰을 뿐이다.
그런 그를 재앙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운명이라면?
그 따위 운명은 절대 따를 수 없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그런 그의 단호한 의지가 서린 검격 앞에 베르타의 몸을 둘러싼 검은 기운들이 점차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기운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재윤을 향해 몰려들었다.
“무슨 짓인가, 인간? 운명의 힘은 거스르지 못한다. 그대조차 나와 같은 꼴이 되고 싶은가?”
“강재윤 님! 이 뒤바뀐 세상에서 운명과 맞서는 건 무모한 일입니다. 어서 물러나세요.”
이러다 자칫 재윤이 재앙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베르타와 루니스가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재윤의 눈에서 피어나는 백색 안광은 더욱 강렬해졌다.
콰아앙! 콰아아앙!
어느새 베르타를 둘러쌌던 검은 기운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동시에 거대하게 변했던 베르타의 몸체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재윤의 몸체는 환영처럼 변해 점차로 커지고 있었다.
츠츠츠.
그의 몸 주위로 시커먼 기운들이 폭풍처럼 휘돌았다.
감히 운명의 힘을 거스른 대가를 치르라는 듯 그 폭풍은 더욱 거대해졌다.
콰콰콰콰콰-!
어느 순간 재윤은 검은 공간 속에 떠 있었다.
베르타도 루니스도, 그리고 귀룡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세상 천지를 뒤덮은 것 같은 거대한 흑색 폭풍의 소용돌이!
그것이 마치 포식자처럼 입을 쩍 벌리리고 재윤을 향해 몰려왔다.
재윤은 올 테면 와보라는 듯 거검을 휘두르며 맞섰다.
그놈의 운명! 운명! 운명!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 운명이라는 것에 따라야 하는가.
“운명의 룰이 대체 뭔데?”
그것은 울분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으로 바꿔버린 운명이란 힘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지금껏 그에 순응하고 따르고 죽어라 충성했는데, 그 결과가 이거라면, 이제부터는 운명 따윈 따르지 않겠다.
“운명의 주인은 나다! 나라고! 나!”
재윤의 검이 전방의 공간을 갈랐다.
번쩍!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그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저 거대한 폭풍을 벨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공간의 이편에서 저편까지의 아득한 거리에 빛의 선이 생겨났다.
그 선이 점차 굵어지더니 검은 폭풍을 두 개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아!
놀랍게도 검은 폭풍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갈라진 검은 폭풍은 순식간에 소멸되어버렸다.
어느새 사방은 맑게 개인 하늘처럼 푸른 색만 가득 찼다.
모든 건 그저 환상 속에서 벌어진 일.
재윤도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운명의 탑 아루넬이 당신을 찾습니다.]
[가장 가까운 운명의 탑에 들러 주세요.]
동시에 들리는 알림.
운명의 탑에서 오라는 소리였다.
‘또 왜 오라는 거지?’
그동안에는 이런 알림이 들려오면 뭔가 보상이 있을 것 같아 기대감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기분이 좀 그랬다.
어쨌든 그는 방금 운명에게 한 번 들이댔기 때문이다.
스스스.
그 사이 푸른 공간이 사라지고 재윤의 앞에는 본래 크기로 돌아온 베르타가 쓰러져 있었다.
“으윽! 어떻게 된 건가?”
베르타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했다.
그는 전신이 멍과 상처로 만신창이 상태였다.
재윤은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어떻게 되긴. 정상으로 돌아온 거지.”
“그건 맞는 것 같다. 정신이 멀쩡해진 걸 보면 말이야.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나도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재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귀룡 위에 서 있는 루니스를 쳐다봤다.
그녀라면 혹시 아는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후우! 어찌됐든 당신과 베르타 님 모두 무사하니 정말 다행입니다.”
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보니 그녀는 꽤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재윤은 끄덕이며 귀룡 위로 올라섰다.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빨리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할 것이다.
베르타도 비틀거리며 따라 올라와 한쪽을 가리켰다.
“서둘러라! 그 사이 어떤 녀석들이 나타났을지 모른다.”
재윤은 즉시 귀룡에게 명령을 내렸다.
《 귀룡! 전속력으로 이동해라. 》
그 순간 귀룡이 쾌속질주를 펼쳐 전방으로 쏘아져나갔다.
* * *
한편 그때 로사엔은 일행을 베르타가 있는 곳으로부터 가능한 먼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 근처에 있다간 마인들이 아니라 베르타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숲을 내달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숲에는 괴물들이 도처에 득실거리고 있었다.
제칸과 세붐이 쫓아버리긴 했지만, 그들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는 터라 극도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들 뿐 아니라 모두가 탈진 직전이었다.
강두성 김지현 부부도 내색은 안하려 하지만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쩔 수 없이 로사엔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이제 숲의 결계를 펼친 후 마스터께서 오시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결계는 금세 완성됐다.
이전에 오크 지휘관들을 가뒀던 결계.
숲의 힘을 빌어 펼치는 것이라 어지간한 괴물은 이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없다.
물론 안전지대에 비할 수는 없었다.
아까봤던 크시라 정도의 존재에게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이 숲 도처에 득실거리는 괴물들의 공격을 피하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충분했다.
콰아앙!
그런데 그들이 휴식을 잠시 취했을까?
알 수 없는 뭔가에 의해 순식간에 결계의 한쪽이 무너져내렸다.
“크크크크!”
그것은 거대한 암석 거인 괴물이었다.
신장은 대략 20미터.
네 방향으로 각각 다른 형상의 얼굴이 존재했다.
그 중 하나의 얼굴이 로사엔 등을 노려보며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아아, 이런!’
로사엔도 당황했다.
결계는 무너진 데다 사방은 3미터 신장의 작은 암석 거인 괴물들에게 이미 포위된 상태.
더구나 바로 앞에 있는 20미터 신장의 거대 암석 괴물의 기세는 아까 마인들을 지휘하던 크시라 못지않았다.
그녀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상황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곧바로 그녀는 강두성과 김지현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능력은 여기가 한계군요.”
“아니에요. 당신은 할 만큼 했어요.”
김지현이 미소 지었다.
강두성도 끄덕였다.
“그래요.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했어요.”
그들은 아들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죽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저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난 이상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짙은 절망감에 눈을 감으려는 순간.
갑자기 상공에서 푸른 빛이 번쩍였다.
콰지지직!
그 빛은 암석 거인 괴물을 단 번에 두 쪽을 내버렸다.
쿠웅! 쿠우우웅!
거대한 암석이 쪼개지며 양쪽으로 널브러지자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렸다.
그 사이로 붉은 빛 머리카락의 여성이 푸른색 검을 쥔채 서 있었다.
용사 루니스.
그녀는 강두성과 김지현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루니스라고 합니다. 당신들이 강재윤 님의 부모님이시군요."
“그렇습니다만.”
“위급한 상황이라 제가 먼저 내려왔지만, 곧 그도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그라면 설마?”
“네. 바로 저 위에 있답니다.”
루니스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거대한 거북이 형상의 뭔가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상에서 1백여 미터 이내로 가까워지는 순간 누군가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50여 미터씩 아래로 슥슥 이동하더니 지면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물론 재윤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강두성과 김지현의 두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