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다 (1) >
재윤이 코인 나무가 있던 지하에서 밖으로 나오자 최진석을 비롯한 생존 공동체의 다섯 대표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셨군요, 강재윤 씨.”
재윤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여러모로 복잡해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 매우 조심스러운 눈치도 보였다.
재윤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차강혁이 물었다.
“설마 그 거대 히드라라는 괴물을 처치하신 겁니까?”
“벌써 알고 계셨나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그들이 알고 있자 재윤도 뜻밖이라 되물었다.
그러자 최진석이 대답했다.
“당신이 오래 안 올라오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다시 내려가 봤지요. 그런데 코인 나무가 당신이 지금 이 성을 위협하는 거대 히드라라는 재앙과 싸우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재윤은 미소 지었다.
“그 일은 잘 해결됐으니 더 이상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순간 모두들 경악했다.
코인 나무는 분명 레벨 35가 되어야 그 재앙이 뭔지 알려준다고 했다.
그런데 재윤은 이미 그 재앙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 자체가 그의 레벨이 최소 35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만 한 일.
그러나 재윤이 혼자서 재앙 급의 괴물과 싸워 승리했다는 건 더욱 믿기 힘든 일이었다.
채시은이 물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럼 앞으로 보호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재윤이 끄덕이자 채시은은 경탄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재윤 씨! 이렇게 괴상하게 변한 세상에서 당신같은 사람이 각성자 중에 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모두를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큰 근심을 덜었네요.”
“별 말씀을."
“그리고.”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단독직입적으로 부탁드릴게요. 부디 이곳에 남아 생존 공동체의 대표가 되어 주세요.”
최진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표가 되어 주시오, 강재윤 씨!”
차강혁과 권수현, 조상구도 한 마디씩 말했다.
그러자 재윤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에도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계속 이곳에 남을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 성을 위협하는 빙의괴물들은 처리하고 떠날 생각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아, 그렇군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최진석과 채시은의 표정에는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반면에 차강혁의 표정에는 뭔가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재윤을 대표로 추대하는데 찬성했을 뿐, 사실 그의 본심은 그와 달랐다.
‘그래도 저놈이 주제를 알아 다행이군.’
그는 재윤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재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가 이곳의 최강자였으니까.
A급 특화 능력인 고대 용사의 창술에 최고 레벨 달성자!
모두가 그를 우러러봤고, 같은 대표들인 최진석 등도 그를 실질적인 리더로 인정했다.
그러나 재윤의 등장으로 그는 더 이상 이곳의 최강자가 아니었다.
만약 재윤이 이곳에 계속 남아있게 된다면 그는 그저 재윤 휘하의 평범한 각성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골칫덩이였던 빙의괴물들을 다 처리해주고 조용히 이곳을 떠나준다면 나로서는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차강혁은 속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보물 성은 내가 지배할 것이다.’
신비한 코인 나무가 존재하는 성.
코인만 있으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얻을 수 있는 보물 성이었다.
차강혁은 코인 나무가 존재하는 이곳 성을 자신이 지배하면 이 새로운 세상에서 아주 강력한 권력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본심을 숨기고 그는 재윤을 향해 짐짓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강재윤 씨. 당신이 빙의괴물을 처리해주신다니 든든하군요. 부디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재윤은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일단 저에게 그놈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알려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채시은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빙의괴물에 대해서는 저희들도 거의 파악하지 못했어요. 사악한 엘프 페리나가 배후에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죠.”
“그렇군요. 그럼 제가 혼자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저희도 도와야죠. 이 성에 있는 공동체의 안전과 직결된 일인데 당신에게만 맡겨두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어요.”
채시은은 일부러 웃지 않아도 인상 자체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만한 타입이었다.
눈빛은 맑았고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했다.
“이곳에 계속 남아달라는 부탁은 더 이상 하지 않을게요. 대신 빙의괴물을 처치하는 일에는 적극 협력할 테니 뭐든 필요하면 부담갖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최진석도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요, 강재윤 씨. 당신에 비하면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한손이라도 거들 테니 부담갖지 마시오.”
재윤은 미소 지었다.
“일단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빙의괴물들과 관련된 건 뭐든 듣고 싶군요.”
채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침을 먹으며 얘기해요.”
“시은이 말대로요. 아침을 준비해놨는데 이러다 다 식겠어요. 어서 갑시다.”
“알겠습니다.”
재윤은 그들을 따라갔다.
* * *
아침을 먹은 후 재윤은 생존 공동체가 머물고 있는 성을 빠져 나왔다.
식사를 하며 채시은과 최진석 등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들었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내용은 없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일.
숲에 대기시켜둔 부하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엘프 로사엔은 숨어 있는 녀석들을 찾아내는 데 아주 전문적인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녀 만큼은 아니지만 각종 잡기에 능숙한 고블린 세붐.
“마스터!”
“주인님!”
재윤이 숲으로 들어가자 로사엔과 세붐이 즉각 그의 앞에 나타났다.
“잘들 쉬고 있었지?”
“너무 편하게 쉬고 있었어요.”
“잘 쉬었더니 기운이 팔팔 납니다. 뭐든 시켜주십시오, 주인님.”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냥 쉬고만 있지는 않았다.
로사엔은 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재윤이 묻기도 전에 그녀가 파악한 것을 말했다.
“마스터께서 격퇴한 엘프 페리나는 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다크 엘프입니다.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악한 어둠의 종자이죠."
“다크 엘프?”
“어둠의 기운이 느껴져 한 눈에 알아봤어요. 그리고 빙의괴물이라 불리는 존재들로부터도 비슷한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빙의 괴물이 생겨난 건 분명 다크 엘프들이 숭배하는 어둠의 힘과 관련이 있을 거예요.”
“그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어렵겠어요. 이상하게 종적을 전혀 느낄 수 없어요”
로사엔도 찾아내지 못하다니.
재윤은 난감했다.
“그럼 생각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군. 그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내야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러자 세붐이 뜻밖의 말을 했다.
“주인님, 만약 다크 엘프들이 어둠의 힘으로 감춰진 깊은 동굴 같은 곳에 숨어 있으면 로사엔도 감지가 불가능할 겁니다.”
“동굴이라고?”
“예, 주인님."
로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붐의 말이 맞아요, 마스터. 그런 경우라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순간 세붐이 히죽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코볼트들이 전문이죠. 맡겨주시면 그놈들을 이용해 다크 엘프들의 위치를 알아내보겠습니다.”
“코볼트를 무슨 수로 이용하지?”
“숲에서 쉬고 있는데 코볼트들이 몇 놈 지나가는 걸 봤습니다. 이 숲 지하에 코볼트들이 제법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말과 함께 세붐은 가방에서 웬 가루를 꺼내더니 몸에 슥슥 발랐다.
그러자 순간 세붐이 고블린이 아닌 코볼트의 형상으로 변했다.
“케케! 예전 제칼드 대륙에서 코볼트 놈들의 보물을 훔칠 때 많이 쓰던 방법입니다. 떠돌이 코볼트로 위장해서 그놈들에게 접근하면 쉽게 받아주거든요.”
세붐에게 각종 잔재주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코볼트로 변신까지 가능한 줄은 몰랐다.
“좋은 생각이구나. 만약 다크 엘프 근거지를 발견하면 섣불리 접근하지 말고 즉시 내게 보고해라.”
“예, 주인님."
세붐은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는 숲의 한쪽으로 사라졌다.
순간 로사엔이 말했다.
“그럼 전 숲을 좀 더 깊숙하게 탐색해보겠어요. 이 숲이 워낙 방대해 아직 일부밖에 파악하지 못했거든요.”
“그 또한 필요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어둠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있으면 섣불리 접근하지 말고 즉각 돌아와라.”
“네, 마스터.”
로사엔 또한 숲의 한쪽으로 사라졌다.
* * *
재윤은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빙의괴물들이 어제처럼 또 쳐들어 올 수도 있으니 일단 성에서 대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다.
‘저 위에서 주변을 좀 둘러볼까.’
내성 근처 거대한 첨탑의 꼭대기.
그곳은 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고 워낙 가팔라 어지간한 각성자들이라 해도 올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재윤은 질풍 이동과 바람 이동을 통해 단번에 올라섰다.
어차피 이곳은 파투스가 자동 회복되는 지역이니 이런 식으로 파투스를 써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 사이 성에 거주하는 공동체 일원들은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밤 사이 순찰과 경비 근무를 섰던 사람들은 거처에 들어가 쉬었지만, 그 외에는 공동체를 위해 어떤 식으로든 기여를 해야했다.
각 지원조의 각성자들이 사냥을 위해 성을 나섰고, 비각성자들은 최소 다섯 명 이상이 한 팀을 이뤄 약초나 야채, 열매 등을 채취하러 나갔다.
그 외에 성에 남아 있는 비각성자들은 잡다한 일들을 수행했다.
전투조나 지원조 각성자들이 거주하는 집의 청소나 빨래 등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 안 곳곳을 청소하고, 심지어 성벽을 보수하는 일들을 하기도 했다.
살펴 보니 알게 모르게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전투조들은 지나가는 비각성자들을 무슨 일꾼부리듯 했지만, 비각성자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정부도 군대도 없는 이 무법의 시대에서 괴물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존재는 각성자들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다행히 그래도 이전에 오재석 패거리처럼 패악질을 하는 이들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어디에나 좋지 않은 부류는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씨발! 누가 옷을 이 따위로 빨아놓으라고 했어. 여기 구멍 났잖아. 이거 하나 사려면 얼만 줄 알아? 2코인이야. 2코인."
“그 옷은 처음부터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만.”
“뭐어? 어디서 말 대꾸야. 비각성자년이. 죽고 싶냐?”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어요.”
“나 같은 각성자가 아니었음 벌써 괴물들에게 잡아먹혔을 년이.”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시군요.”
“그래도 말대꾸야?”
짝.
동시에 뺨을 때리는 소리도 났다.
“흐흑! 죄송해요. 두 번 다시 말대꾸하지 않겠습니다”
소리를 지르는 청년은 20대 초반 쯤 되어 보였는데, 그는 전투조 각성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풀 죽은 표정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성은 30대 중반 쯤 되어 보였다.
재윤이 있는 곳은 그곳에서 꽤 먼 곳이었지만 그들의 음성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스탯이나 레벨 때문인지 모르지만 시력과 청력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상태.
대부분은 그냥 소음으로 넘길 수 있지만 지금 벌어진 소란은 매우 거슬렸다.
만약 그가 소유한 안전 지대에서 저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저 각성자는 밖으로 쫓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자리에 채시은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났다.
“이강석! 너 이 새끼 이리 나와."
“채, 채시은 누나!”
비각성자에게 손찌검까지 하며 갑질을 하던 청년은 이강석이라는 레벨 20의 각성자였다.
특화 능력은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레벨 20을 넘겼기에 전투조원의 일원이 된 것이다.
짝!
이강석이 나오자마자 채시은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괴물에게 쫓겨 다 죽어가던 놈을 구해주고 레벨도 올려주고 그나마 각성자답게 만들어줬더니 니가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된 거라 착각하는 거냐?”
“그, 그게 아니라 저 비각성자년이, 아니, 저 비각성자가 제 옷에 구멍을 뚫어놨습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우겨대서 그만 욱하고, 죄송합니다.”
그러자 채시은은 더욱 노기어린 표정을 지었다.
“비각성자가 아니라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누구누구 씨나 님을 붙이라고. 여긴 각성자 비각성자 계층이 나뉘는 게 아니라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라고 몇 번을 말해!”
“아 그게..… 죄송합니다.”
이강석은 더럽게 걸렸다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사실 비각성자들을 막 부려도 상관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 괴상하게 변한 세상에서 각성자는 특권자이자 귀족이고 비각성자는 그냥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씨발! 저 따위 비각성자년 백 명이 있어도 괴물 하나 못죽이는데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거야?'
그리고 다른 대표들은 이런 경우 그냥 적당히 넘어가주거나 모른 척해준다.
그러나 채시은과 최진석은 아니었다.
공동 대표 다섯 명 중에서 비각성자들을 대변해주는 이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아오! 그렇다고 대들 수도 없고.’
그는 자신이 비록 레벨이 낮아도 힐러 채시은 쯤은 이길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채시은에게 대들면 경비대장 최진석에게 맞아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최진석은 대표들 중 가장 연장자라서 차강혁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의 편이 되어줄 자가 나타났다.
다름아닌 차강혁.
이강석은 사실 차강혁 라인이었다.
이 안에서 라인을 따진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전투조원들은 알게 모르게 다섯 명의 공동 대표 중 한 명에게 줄을 서고 있었다.
“거 좀 심한 것 같군, 채시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