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1장 전설, 그의 아름다운 향기 - 2 >
성호체육관 3층.
최강철은 시합이 있을 때마다 구슬땀을 흘렸던 성호체육관 3층에 들어와 샌드백을 어루만졌다.
소중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이곳에서 적을 물리치기 위해 투지를 불태웠던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다.
이미 연락을 받은 성호 체육관의 새로운 관장은 최강철이 들어왔을 때 인사만 하고, 아예 3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아무도 올라가지 못하도록 틀어막았다.
그는 윤성호의 후배로 7년 전부터 성호 체육관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는데, 최강철이 훈련장소로 쓰겠다는 부탁을 하자 황공한 표정으로 3층 문을 개방했다.
혼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 너무나 익숙한 상판이 나타났다.
이성일은 나타나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는데 뭔가 상당히 억울한 표정이었다.
“야, 이 자식아. 너 미쳤어!”
“미치긴 뭐가 미쳐. 관장님 공항에서 오는 중이란다. 조금 있으면 곧 도착한다니까 먼저 짐이나 풀어.”
“휴우… 난 너 같은 놈 처음 봤다. 지영씨가 집으로 전화해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만나기만 하면 날 죽인단다. 어쩔거야, 이 자식아!”
“왜 너 잘하는 오리발 내밀지 그랬냐.”
“했지, 난 전혀 상관없다고. 내가 그럼 순순히 인정할 것 같았어? 난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장하다. 그래서 누명은 벗었냐?”
“흐으…….”
이성일이 우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쉽게 누명을 벗었을 리가 없다. 서지영은 의외로 집요한 구석이 있어 용의자에 대한 의심을 쉽게 풀어주는 여자가 아니었다.
많이도 싸 왔다.
장난스럽게 우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짐을 풀고 있는 이성일의 모습은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놈처럼 신이 난 모습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랜만에 만난 이성일과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윤성호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으… 강철아. 너 일단 한 대 맞자.”
“어, 이거 왜 이러세요!”
다짜고짜 다가온 윤성호가 주먹을 번쩍 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렇다고 맞을 최강철이 아니다.
주먹이 올라오는 동시에 곧바로 양팔을 십자로 들어 올려 공격에 대비하는 그의 모습은 번개처럼 빨랐다.
역시 전설의 복싱챔피언 다운 동작과 스피드였다.
“이 자식아, 너 때문에 지금 나 이혼당하게 생겼어.”
“왜요?”
“지영 씨가 전화해서 인혜 씨한테 막 퍼부었던 모양이더라. 신랑 관리 똑바로 못한다고.”
“쩝.”
“내가 한국에 간다니까 도장 찍고 가라더라.”
“그래서 찍었습니까?”
“미쳤어? 이 나이에 이혼당하면 어쩌라고. 그냥 냅다 도망쳐 왔지.”
“인혜 누나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흐으… 일단 도피에 성공했으니, 그건 나중에 해결해야지. 어이, 전임 장관님. 이 억울한 사태에 대해서 해결해 줄 거지?”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해결해 주긴 뭘 해결해 줘요. 나를 슬슬 부추긴 건 관장님이잖아요. 그때가 너무 그립다면서 고독한 표정을 지은 게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합니까!”
“허어, 얘 봐. 완전히 덤터기를 씌우네.”
“성일아, 네가 말해 봐. 그때, 우리 만났을 때 관장님이 메이웨더 얘길 꺼내며 뭐라고 그랬냐?”
“뭐라고 했더라…. 음, ‘메이웨더 이 자식아 진짜 챔피언 맛 좀 보고 싶어?’ 요렇게 말한 것 같다.”
“네가 생각했을 때 그 말이 그 말이지?”
“응.”
“그러니까 네 마누라한테도 정확하게 말해 줘. 이번 일을 기획하고 추진한 건 전부 우리 관장님이었다고.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
“그렇지, 좋은 생각이야.”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살 궁리를 하는 동안 윤성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이것들이 하는 짓을 보니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야, 이놈들아. 너희 정말 오늘 초상 치러 볼래? 어디서 모함이야, 모함이!”
“그러지 말고 한 사람이 모두 총대를 멥시다. 지금 마누라들이 문제가 아니에요. 국민들이 전부 들고일어나서 시합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 하나는 총대를 메고 십자가를 져야 해요. 우린 그걸 관장님이 했으면 하는 거고.”
“으…….”
뻔뻔한 얼굴로 두 놈이 자신을 쳐다보자 윤성호가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팽개쳤다.
그런 후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둘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국민들은 메이웨더와 경기를 해선 안 된다며 한 달이 지나도록 반대해 왔는데, 결국 돈킹에 의해 경기 날짜와 장소가 결정되자 광화문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복싱시합을 반대하기 위해 만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으니 경찰로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전 세계의 언론이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광화문에 몰려든 시위를 실시간으로 타전하며 대한민국 국민들이 시합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복싱영웅 최강철에 대한 사랑을 시위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오래전 은퇴한 허리케인이 무적의 챔피언 메이웨더와의 경기에서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며 시합이 강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
허리케인은 전설의 챔피언으로 이미 복싱사의 신기원을 열었으니 시간을 되돌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것처럼 대한민국 국민들은 눈물을 보이며 허리케인이 결정을 바꿔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사랑과 존경을 누가 받은 적이 있단 말인가. 진정으로 아름답고 굉장한 장면이다.
”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광경으로 인해 연일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대한민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최강철이 경기를 벌일 때마다 수백만씩 거리에 나와 응원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는 시합을 반대하는 시위를 같은 자리에서 하고 있었다.
이런 민족은 처음 본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지 불과 60년 만에 개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에 육박했고, 세계경제순위 5위에 올라서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외환위기란 국가적 부도 사태를 벗어난 지 불과 10년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만들어 낸 결과였으니, 세계의 경제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을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사람들이 특정 개인을 위해 시위를 벌이는 장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최강철이 베일에 싸여 있던 마이다스 CKC 실제 소유주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세계인들은 전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세계갑부 1위의 자리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포춘지는 5년 동안 세계갑부 1위 자리를 신비의 인물 마이다스 CKC의 회장을 지목하며 물음표로 남겨 놨었는데, 정체가 밝혀지자 그 자리에 최강철이란 이름을 즉각 올려놓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설의 챔피언 허리케인이 그 주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전 세계의 언론들이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최강철이 메이웨더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복싱 팬들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의문에 사로잡혔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그가, 그리고 은퇴한 후 정치에 데뷔해서 장관까지 지내며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온 그가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링에 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상은 수많은 기적과 믿어지지 않은 일들로 가득 차 있으니 최강철의 일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응이 전파를 타고 그들의 눈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최강철이란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광장으로 몰려든단 말인가.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 * *
최강철이 직접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국민들의 반대시위에 참여하는 인원이 점점 불어나 3만 명에 달했을 때였다.
시합이 결정된 후 10일이 지난 일요일, 최강철은 언론사들을 전부 부른 후 인터뷰를 가졌다.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기자회견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무려 300여 명이 넘었는데 국내 방송사는 물론이고, 외국의 유수한 방송국은 전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강철이 인터뷰를 자청했을 때 기자들은 최강철이 시합 포기 선언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어떤 이유로 시합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연일 시위로 맞서고 있는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시합을 강행하기에는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전설의 복서로서도 너무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호칭을 뭐라 불러야 될지 곤란하군요. 편의상 장관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장관님, 지금 국민들은 장관님의 재기전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저희 역시 장관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매우 힘듭니다. 저희는 지금의 이 자리가 시합을 포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합을 포기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신 게 아닙니다.”
최강철의 이야기에 기자들이 전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포기선언을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기자들 사이에서는 소란스러움이 커졌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제가 메이웨더라는 걸출한 챔피언과 시합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서 국민들께 제대로 설명해 드리지 못했기에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음…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부터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저의 시합을 반대하는 건 그만큼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 저 최강철은 복싱을 하면서 언제나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정치인으로서도 마찬가지였고, 앞으로 남은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가 다시 글러브를 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과거의 영광에 연연해서 저의 영광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일원으로서 위대한 도전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국민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더불어 저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고자 합니다. 메이웨더란 선수는 저를 보고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저의 실력을 의심하면서 절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버릇처럼 해 왔습니다. 저는 그동안 그의 가벼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오랜 기간 불면의 밤을 보내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를 응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저의 자존심을 용서해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께서 저의 시합에 반대하는 이유를 알지만, 저는 그를 이기고 싶습니다. 그러니 반대보다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십시오. 제가 그를 이길 수 있도록 성원을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한 김영호는 커피를 빼 들고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 시간 동안 가져온 패턴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류광일이 들어온 건 그가 커피를 빼 들고 자리에 앉은 지 1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김 부장, 너도 봤지?”
“응.”
들어오자마자 소리치는 류광일을 향해 김영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이제 대일물산의 무역부 선임부장이 되어 곧 이사로 진급할 짬밥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둘이 만나면 어린애들처럼 말들이 많아진다.
“인터넷에서 지금 난리가 아니야. 강철이 이놈 정말 대단해. 단 한마디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잖아.”
“반대의견이 많이 들어갔다며?”
“응, 인터넷을 보니까 싸워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아졌더라. 고통스럽게 살았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안 그래?”
“최강철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해. 메이웨더 그 개새끼가 그동안 얼마나 강철이를 씹어댔냐. 나도 그 시벌놈이 떠들 때마다 피가 끓었는데, 강철이는 오죽했겠어.”
“그런데 우리 이젠 그렇게 막 부르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래도 장관까지 지낸 사람인데?”
“난 그런 거 몰라. 강철이는 영원히 내 동생이야. 장관을 했건 뭐를 했건 난 이름을 계속 부를 테다.”
“야, 그러다 대통령 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도 그렇게 부를래?”
“응. 그럴 거야. 말했잖아. 그놈은 내 인생과 같이 살아온 놈이야. 그런데 나더러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게 말이나 돼!”
“하여간 그놈의 막무가내 성격, 참 대단하셔.”
“그런데 김 부장, 넌 떨리지 않냐?”
“뭐가?”
“다시 강철이가 시합을 한다니까 난 너무 흥분돼서 요새 잠도 오지 않아. 마치 내가 다시 젊었을 때로 돌아간 느낌이야.”
“그래, 그렇지. 우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강철이 인터뷰를 보면서 눈물이 핑 돌더라. 내가 인생을 살면서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도 강철이 영향이 컸던 것 같아. 그 친구의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사조 정신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자고 계속 다짐했었거든.”
“크크크…. 김 부장, 우리 강철이 시합 때 꽃다방 한 번 가볼까. 옛날 생각 하면서.”
“꽃다방 없어진 지가 언젠데, 꽃다방 타령이야.”
“꽃다방은 없어졌지만, 우리 추억은 그대로 남아 있잖아. 그 자리에 맥주 집이 생겼어. 우린 늙었으니까 이젠 광화문은 무리야. 거기 가서 맥주 마시며 편하게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