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33화 (133/308)

[133]

서지영은 울었다.

공항에서 울었고, 같이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시선을 떼지 못하며 그에 대한 그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사랑을 보는 순간 인간의 냄새가 칼로 찌르듯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루시퍼야, 루시퍼야.

도대체 너는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강철 같은 심장을 달라고 했다.

그런 심장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인간에게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과거의 기억을 달라고 했던 것은 다시 살게 되었을 때 미래에 대한 지식으로 누구 못지않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지 불행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증오심에 사로잡혀 살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어찌 여자에 대한 증오심을 완벽하게 떨쳐 버릴 수 있을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랑했던 아내가 늙은 남자의 품에 안겨 가랑이를 벌리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녀 역시 한때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눈물을 보였던 여자였다.

아내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귀를 틀어막고 몸부림을 치면서 괴로워했다.

누군가 잔인했던 과거는 시간 속에서 잊을 수 있다고 했으나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그를 괴롭혔다.

서지영을 지금까지 안지 못한 것도 어쩌면 그런 것들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몸을 사리며 자리를 피했다.

그녀를 괴롭힐 생각도, 몸이 달게 만들어 자신의 노예로 삼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고통이었고 눈물이었으며 그만의 사랑이었는지 모른다.

미팅에서 만난 성은정의 알몸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아내도 그녀처럼 요염하게 웃으며 그 늙은 놈에게 걸어갔었다.

섹스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사랑이란 감정 없이 조건과 만족을 위해 몸을 던지는 여자들의 태도가 가증스러워 결국 사정조차 하지 않은 채 문을 박차고 나왔다.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었다는 걸 안다.

사랑 없는 섹스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건 동물들의 교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쁜 남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사랑 대신 섹스를 하면서 쾌락에 젖어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섹스를 하면서 떠오른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쾌락에 들떠 신음을 지르던 아내의 모습과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서지영의 웃음이었다.

그 두 가지 생각은 섹스를 하는 동안 그를 끝까지 괴롭히며 온전한 즐거움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강철 씨, 이제 레드불스로 들어가면 또 못 보는 거지?”

“아니, 보고 싶은 땐 언제든지 와도 돼.”

“싫어. 난 강철 씨한테 방해가 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보고 싶었다며 눈물까지 흘리던 사람은 어디 간 거야. 괜찮아, 내가 가지는 못하겠지만 오면 언제나 반겨줄게.”

“그래도 될까?”

“그럼.”

서지영이 수줍게 웃자 최강철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어.

너의 눈물, 너의 사랑.

그것이 내 속에 들어 있는 증오심을 완벽하게 지우게 되었을 때 너를 받아들일게.

아마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지영아,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서지영은 바보처럼 부드럽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여전히 사랑이 듬뿍 담긴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미안하다, 지영아.

레드불스로 돌아오자 관장인 피터를 비롯해서 수많은 선수가 최강철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불과 5개월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마치 5년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확실히 레드불스에 소속되어 있는 선수들은 다르다.

더 럼블 측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들만 선발했기 때문인지 스파링을 해줄 선수들이 넘쳐났다.

윤성호가 한국에서 연 성호체육관이 초등학교 수준이라면 레드불스는 전문가 집단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그럼에도 최강철과 스파링이 시작되면 모든 선수가 3라운드를 견뎌내지 못했다.

웰터급과 미들급까지 20여 명의 선수가 번갈아가며 링으로 올라왔으나 전부 녹초가 되어 링을 내려갔다.

피터는 선수들에게 듀란의 복싱 스타일처럼 불도저같이 공격하라는 주문을 했으나 그 누구도 최강철을 괴롭히지 못했다.

최강철의 경기 스타일은 카멜레온처럼 변화되며 스파링 파트너들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인파이팅과 아웃복싱을 가리지 않았고 어떤 때는 사우스포의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체력 강화 훈련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최강철은 레드불스로 온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주 무기들을 점검했다.

그가 스파링에서 여러 가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은 윤성호와 이성일의 주문 때문이었다.

제프 카터가 날아온 것은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돈 킹의 지시로 인해 부랴부랴 날아왔는데 그는 이미 이성일과 통화를 했는지 오자마자 수립된 전략을 확인했다.

이성일의 노트는 손때가 때문에 반질반질 윤이 났다.

시합이 확정된 후 이성일은 톰슨이 가져온 테이프 외에 10개의 테이프를 더 공수받아 듀란의 경기 스타일을 샅샅이 훑었다.

자신의 몸처럼 가지고 다니며 생각이 날 때마다 계속 적었기 때문에 노트에는 듀란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회의장에 최강철을 포함해서 스태프들이 전부 모인 건 훈련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다음이었다.

브리핑을 한 것은 제프 카터였다.

“강철, 먼저 듀란의 스텝을 봐줘.”

제프 카터가 쿠에바스와 대니 무어전에서 상대를 KO시켰던 장면과 레너드를 꺾었던 경기 영상을 연속으로 돌렸다.

그는 비디오테이프를 빠르게 돌려가며 중요한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주로 스텝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것 같나?”

“압박 스텝이군요. 자신의 펀치 거리에 상대를 가두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역시 허리케인답군. 정확하네. 듀란의 펀치 거리에 잡힌 상대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어. 이것이 바로 듀란의 전매특허일세. 펀치 거리에 잡히는 순간 그는 난타전으로 상대를 때려잡지. 레너드처럼 정교하지 않지만 동물적인 감각과 핸드 오브 스톤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펀치를 가졌어.”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는 이 영상들을 보게나.”

제프 카터가 이번에는 다른 영상들을 틀었다.

레너드와의 2, 3차전과 헌즈, 그리고 베니테스와의 비디오테이프였다.

방법은 동일.

제프 카터는 중요한 순간마다 리모컨을 스톱시켰는데 이번 경기들은 전부 듀란이 패배한 것들이었다.

“자, 이번에는 어떤 것들이 보였나?”

“거립니다. 상대들이 전부 듀란의 압박을 벗어났군요. 하지만 그런데도 완벽한 승리를 하지 못했어요. 더군다나 지금 경기들은 듀란의 컨디션이 엉망으로 보입니다.”

“휴우, 자네는 정말…….”

제프 카터가 최강철의 말을 듣고 한숨을 길게 흘려냈다.

매의 눈을 가졌다.

아직 많은 것이 남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단숨에 꿰뚫어 보는 최강철의 능력은 먹이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맹수를 연상시켰다.

“자네 말대로 상대들은 전부 듀란의 압박 스텝을 뿌리치고 싸웠어. 바로 이것이 그동안 수많은 전문가들이 찾아낸 전술이었지.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네. 바로 듀란의 컨디션이야. 그는 92전을 치르면서 단 8번만 졌어. 상대는 명성이 자자했던 선수들일세. 그들을 키워낸 유능한 트레이너들이 그 전략을 과연 몰랐을까? 나는 알면서도 당했다고 생각하네.”

“그래서요?”

“성일이 꽤나 재밌는 전략을 마련해 놨더군. 당연히 들었겠지?”

“그렇습니다. 제프는 재밌다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전략이죠.”

“푸하하… 난 그게 마음에 들어.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하네.”

“왜죠?”

“듀란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어. 그들 역시 자네의 경기 스타일을 꼼꼼하게 챙겨보며 전략을 마련하고 있을 걸세. 듀란에게는 레이 아르셀이라는 무시무시한 조련사가 있다네. 들어봤겠지?”

“그럼요. 맹수들만 키워냈다면서요.”

“무려 20여 명의 세계 챔피언을 키워낸 사람이지. 그는 복싱에 관한 한 베스트 중의 베스트야. 나는 듀란보다 그 사람이 더 무섭다네.”

* * *

듀란은 땀으로 가득 찬 몸을 씻어내고 샤워장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은 채 외출 준비를 했다.

코치인 레이 아르셀이 체육관으로 들어온 것은 그가 외출 준비를 모두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레이 아르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듀란의 차림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 빼고 광냈다.

머리는 무스를 발랐던지 빳빳하게 세워졌고 얼굴은 스킨을 얼마나 처발랐는지 냄새가 진동할 정도였다.

“로베르토, 어딜 가는 거지?”

“쟈칼로니가 보자고 해서요.”

“그 자식이 왜?”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싶답니다. 맥주 한잔하자더군요.”

“또 옛날 병이 도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라 얼굴만 보고 올 생각입니다.”

“네 차림새를 봐라. 날 보고 그걸 믿으라는 거냐?”

“잠시 나갔다 올 뿐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보고도 저를 모릅니까?”

“모른다. 너는 워낙 럭비공 같은 놈이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

레이 아르셀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인상을 썼다.

그가 듀란을 만난 건 벌써 18년 전이었다.

흙 속에 묻힌 진주.

단박에 듀란의 재능을 알아보고 조련을 한 후 불과 1년 반 만에 켄 부케넌을 KO로 잠재우며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려놨다.

그동안 개차반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거칠고 위험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를 만나 정신을 차린 후 승승장구를 이어왔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지만 코치인 레이 아르셀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화를 내도 순한 양처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그는 레이 아르셀의 만류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레이, 오랜만에 찾아온 놈입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밥 애런의 주 무대인 라스베이거스는 환락의 도시로 어디를 가든 도박장과 술집이 널려 있는 곳이었다.

듀란은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시합이 없을 때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지내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을 좋아해서 수시로 어울렸는데 듀란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며 권투 이야기로 접근하면 상대가 누구라도 같이 술을 마셨다.

그의 스타 기질은 대단해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여러 번 나왔을 정도로 카메라에 노출되는 것을 전혀 꺼려 하지 않았다.

최강철과의 시합을 앞두고 훈련 장면을 모조리 공개한 것은 그의 이런 스타 기질 때문이었다.

파라다이스 호텔 바로 들어서서 알은척을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곧장 쟈칼로니가 기다리는 룸으로 향했다.

쟈칼로니.

파나마 빈민가에서 같이 자란 형제 같은 친구였다.

어렸을 때의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복싱을 시작한 것도 아버지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어머니와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쟈칼로니는 수시로 돈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한 번도 그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같이 밥을 굶으며 자라온 사이였다.

그런 놈에게 돈이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이, 로베르토. 어서 와.”

그가 룸으로 들어서자 늘씬한 미녀들과 같이 있던 쟈칼로니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이놈.

참 세상 편하게 산다.

쟈칼로니가 그에게 가져간 돈이 지금까지 100만 달러가 넘었으나 한 번도 갚지 않았는데 이런 짓을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놈은 자신이 헌즈에게 패배한 후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는데 돈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두말없이 보고 싶었다는 말부터 꺼냈다.

정말, 보고 싶었다.

저 허연 얼굴과 능글맞은 미소를 말이다.

“내가 자네를 위해 미녀들을 준비했어. 뭐 해, 세계를 주름잡는 복싱 영웅 전설의 하드 펀처 듀란이라고. 내 친구 듀란이란 말이야.”

“듀란, 반가워요. 온다는 말을 듣고 엄청 기다렸어요. 이쪽으로 앉아요.”

놈의 좌우에 있던 미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듀란을 잡아끌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이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자 데킬라를 따라주었다.

데킬라는 그와 쟈칼로니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었다.

술을 따르는 걸 말리지는 않았지만 마시지도 않았다.

“쟈칼로니, 어디서 뭐 하고 있던 거냐. 밥은 먹고 다녔어?”

“아, 그게 사업이 바빠서 연락을 하지 못했어. 신문에서 봤다. 허리케인하고 시합한다며? 돈을 무척 많이 받는다고 나오던데 잘됐다, 잘됐어. 그런데 왜 술을 안 마시지?”

“난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라 너를 보러 온 거다. 네가 다른 데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사고를 쳤는지 확인하러 온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잘 살고 있지. 내가 어떤 사람인데 그런 소릴 해, 미녀들 앞에서.”

“그럼 저쪽에서 이 방을 보던 놈들은 뭐냐. 너를 따라온 놈들 아니야?”

“그게…….”

“얼마냐? 네가 저 자식들한테 빌린 돈이 얼마야!”

“…5만 달러… 로베르토, 미안하다.”

“받아라. 가방에 10만 달러 들어 있다. 이 돈 가지고 가서 해결해. 그리고 시합 끝나면 다시 보자. 이 자식아, 보고 싶었다. 다시는 돈 때문에 나를 떠나는 병신 같은 짓 더 이상 하지 마.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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