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 * *
전쟁을 앞둔 전사에게 시간의 흐름은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간다.
최강철의 긴장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컸다.
듀란이 들고 나올 전략과 자신의 전략이 상충될 경우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듀란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라도 하려는 듯 혹독한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최강철의 캠프는 피터의 철저한 통제하에 기자들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예전에는 기자들에게 시간을 주면서 뉴스거리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최강철이 입을 굳게 닫아버렸기 때문에 아무도 레드불스에 들어올 수 없었다.
기자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시합을 앞두고 초긴장 상태에 빠져든 선수들을 취재하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으니 최강철의 행동이 욕먹을 짓은 아니었으나 상대인 듀란이 훈련 과정까지 공개하며 연일 언론에 자신의 근황을 알렸기 때문에 기자들은 더욱더 몸이 달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세기의 대결이다.
한쪽은 모든 것을 공개하고 있었는데 다른 한쪽은 철문을 닫아놓고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으니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그런 것이 원인이 되었을까.
시합이 잡혔을 때 최강철의 우세를 점치며 뉴스를 내보내던 언론들이 시합 날짜가 다가올수록 듀란의 승리를 점치기 시작했다.
최강철 측이 언론을 원천 차단 한 이유도 있었지만 듀란의 훈련량이 엄청난 게 노골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합까지 이제 10일이 남았을 뿐이기에 언론에서는 연일 듀란의 근황을 알리며 최강철의 고전을 보도했다.
아무리 시합이 코앞이라도 쉴 때는 쉬어야 한다.
근육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혹사시켰을 때 탈이 나는 법이기 때문에 사람은 적정한 휴식을 취해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건 최강철도 마찬가지였다.
윤성호는 시합이 다가올수록 절대 무리한 훈련을 피했고 저녁이 되면 최강철이 쉴 수 있게 시간을 배려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서지영과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자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던 윤성호와 이성일이 반짝거리며 눈을 빛냈다.
“갔냐?”
“응.”
“잘했다. 혹시 차에서 한 건 아니지?”
이 미친놈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이성일은 어떡하든 그쪽으로 엮기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가 어렵다.
하지만 오늘은 윤성호도 만만치 않았다.
“커피만 마신 거 맞냐?”
“예.”
“그래, 시합을 앞둔 놈이 그런 거 하면 큰일 나.”
“어휴, 그만 좀 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겹지도 않습니까?”
“이런 걸 보고 힐링이라고 하는 거다. 우린 힐링이 필요해.”
말을 말아야지.
시합을 코앞에 둔 선수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힐링 타령하는 두 사람이 곱게 보인다면 사람이 아니다.
“편하게 앉아. 성일아, 맥주 치워라. 강철이 먹고 싶어 할라.”
“넵.”
눈치도 빠르다.
시원하게 맥주 한잔이 그리워 슬쩍 바라보자 어느새 낌새를 눈치챈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며 먹고 있던 맥주를 깡그리 치워 버렸다.
정말 손발이 척척 맞는 인간들이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손을 멈췄다.
텔레비전에서 듀란에 관한 뉴스가 방송되고 있는 중이었다.
뉴스는 듀란의 근황에 대해서 취재한 것인데 직접 인터뷰하는 장면까지 나오고 있었다.
인터뷰 내용은 별게 없었다.
기자가 최강철에 대한 질문을 했음에도 그는 백전노장답게 교묘하게 질문의 핵심을 피하며 자신의 이야기만 했다.
번개처럼 달려온 두 사람이 떠들기 시작한 것은 듀란의 인터뷰가 끝났을 때였다.
“우와, 저 식스팩 봐라. 관장님, 듀란이 복부에 임금 왕 자 새겨진 거 본 적 있습니까?”
“없다.”
“저거 일부러 만든 걸까요?”
“쟤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니? 그만큼 훈련량이 엄청나다는 거겠지.”
맞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당연히 있었겠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듀란의 복부에서 근육이 만들어진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운동량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저 친구 까다롭게 노는구만. 원래 저렇게 말이 없었나?”
“말만 잘하는데 왜 그러세요?”
“그게 아니고 강철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잖아. 아예 신경전을 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강철이 불쑥 끼어들었다.
찜찜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복싱에서 선수들 간의 신경전은 아주 오래전부터 당연한 것으로 고착화되어 있었다.
일종의 기 싸움이다.
누가 더 상대를 자극해서 흥분하게 만드느냐에 따라 경기 결과의 승패가 달라진다는 생각 때문에 선수들은 강한 어조로 상대의 기를 꺾기 위해 노력했다.
최강철 역시 그런 전략을 펴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강한 상대를 자극해서 흥분하게 만든다는 것은 결코 불리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윤성호가 불쑥 입을 연 것은 최강철의 이야기를 들은 이성일이 괜한 이야기를 했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후회하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우리도 이때 근사하게 기자들한테 나가서 한마디 할까?”
“뭐라고요?”
“듀란한테 시합 끝난 후 사이좋게 밥이나 먹자고. 그러면 멋있어 보일 거 아니냐.”
“관장님도 저와 오래 같이 지내더니 유머가 늘었습니다. 우리 심심한데 이제 잠이나 자죠.”
* * *
팽팽한 신경전은 다른 데서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다름 아닌 토머스 헌즈였다.
NBC에 통합 타이틀전 중계권을 뺐긴 ABC ESPN에서는 복싱 히어로 편에서 헌즈를 출연시켜 최강철과 듀란의 시합에 대해 집중 탐구 하는 시간을 가졌다.
스포츠국장 죤 월리의 타고난 감각은 이번 승자가 언젠가는 헌즈와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이런 특집 방송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겠다는 심사였고, 향후에 벌어진 빅 이벤트에 숟가락을 먼저 올리겠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의 복싱 팬들은 이제 7일 앞으로 다가온 경기에 온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ESPN에서 마련한 특집 방송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복싱 팬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가장 강력한 선수들의 대결은 운명이고 결국은 성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랬기에 토머스 헌즈가 두 사람의 경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수많은 복싱 팬은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ESPN의 유명한 복싱 앵커 짐 캐리는 특집 방송 진행에 도가 튼 사람이었고 대부분의 질문도 자신이 직접 작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방송의 특징은 자료 화면이 반 이상 차지한다.
시청자들은 이미 지나간 시합이지만 예전의 그 광기를 잊지 못하기 때문에 짐 캐리는 자료 화면을 쓰면서 토머스 헌즈와의 인터뷰를 절묘하게 진행했다.
그가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헌즈가 듀란을 쓰러뜨린 화면이 끝났을 때였다.
“토머스, 허리케인과 듀란의 빅 매치가 곧 벌어지게 됩니다. 당신은 누가 이길 거라고 예상합니까?”
“글쎄요, 제가 봤을 때는 전부 고만고만해서 쉽게 승자를 점치기 곤란하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금방 보신 것처럼 듀란은 저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았던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허리케인이란 거창한 애칭을 가지고 있는 저 친구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헌즈의 대답에 짐 캐리가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는 시늉을 했다.
의도적인 연출이다.
그는 이 질문을 하면서 헌즈가 이런 대답을 할 것이란 걸 과거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헌즈는 앞뒤 안 가리고 떠드는 놈으로 유명했다.
“허리케인은 지금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복서입니다. 그를 그렇게 과소평가하는 이유가 뭡니까?”
“개천에서 놀던 친구는 결코 상어나 고래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허리케인은 지금까지 편한 길을 걸어오며 전적을 쌓아왔습니다. 하하하, 그 친구가 IBF 챔피언을 지냈다는 걸 보면 모르겠습니까? 운이 좋아 마크 브릴랜드를 잡고 WBC 챔피언에 올랐지만 재방송을 보면 알겠지만 고전을 면치 못한 경기였죠.”
“허리케인은 지금까지 21전승 KO를 기록하고 있는 강펀처이면서 화끈한 경기로 복싱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챔피언입니다.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닐까요?”
“심하긴요. 26전 전승 KO를 기록하고 있던 존 무가비로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거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승 KO라는 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복싱은 그런 전적이 아니라 실력으로 말하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토머스, 당신은 허리케인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당연한 걸 묻고 있군요.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앵커께서는 질문을 가려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헌즈가 인상을 쓰면서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짐 캐리의 질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듯 거친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짐 캐리에게는 이런 행동이 너무나 즐거웠다.
“토머스,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토머스, 만약 이번 경기에서 이긴 사람이 당신과의 시합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의향이 있나요?”
“어린아이 비틀어서 돈을 버는 건 원치 않지만 굳이 원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경고하는데, 함부로 덤비지 않기를 권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생각보다 훨씬 연약하죠. 나는 그들이 지금처럼 가늘고 길게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 *
시합이 다가올수록 서울대 경영대학은 긴장으로 가득 찼다.
특히 함께 공부한 1학년들과 최강철의 동기인 83학번들은 물론이고 교수들까지 침을 삼키며 시합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하긴, 그들뿐만이 아니다.
전 국민이 난리가 난 상태였으니 누굴 특정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시합이 3일 앞으로 다가온 목요일.
교수들도 듬성듬성 수업을 했고 학생들의 분위기도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특히 김철중과 일당들은 거의 온 정신이 최강철의 시합에 가 있었기 때문에 교수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온통 타이틀전에 관한 뉴스가 화제였고 경기 예상을 하면서 침을 튀기는 게 그들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꼭 중간에 짱돌을 날리는 놈이 있다.
바로 유상식이 그런 놈이었다.
“철중아, 숙대 애들한테서 내일 미팅하자고 제의기 들어왔다. 내가 다니는 교회 친군데 지네 과에서 제일 예쁜 애들만 데리고 온단다.”
“이 미친놈아.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고사를 지내도 모자랄 판에 미팅은 얼어 죽을 무슨 미팅이야!”
“야, 인마. 전쟁 중에도 사랑은 핀다는 유명한 말도 있잖아. 시합은 시합이고, 사랑은 해야 되는 게 우리의 막중한 책임이자 의무니까 막간을 이용해서 잠시 나갔다 오자.”
“지랄한다. 강철 선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사랑이 뭐가 중요해. 난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데 이 자식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네.”
김철중의 퉁방에 유상식이 눈을 부릅떴다가 곧이어 이어진 박정빈의 공격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표정들이 좋지 않다.
나름대로 틈새를 노려봤으나 씨도 먹히지 않는 걸 확인한 유상식은 입맛을 다시며 하늘을 쳐다봤다.
그때 김철중이 한숨을 길게 내리쉬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우리 강철 선배. 지금 뭐 하고 계실까. 제발 긴장하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라. 강철 선배를 그렇게 겪어봤으면서 모르겠어? 그 양반은 지옥에 갔다 놔도 버젓이 살아 나올 사람이야.”
“그나저나 일요일에 중계한다는데 우리 응원은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 같이 모여서 해야지.”
당연하다는 듯 김현중이 대답하자 박정빈이 동조를 했고 뒤이어 유상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응원만은 무조건 같이해야 된다는 생각들이 확고했다.
그때, 멀리서 경영학과 학생장인 정수연이 급하게 달려오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니들!”
담배를 피우면서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던 김철중과 일당들이 급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학생장인 정수연은 와일드하기로 소문난 선배라 잘못 걸리면 박살이 나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저승사자 대하듯 군기가 잡혀 있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다가온 정수연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무언가 무척 급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선배님, 무슨 일이십니까?”
“철중아, 수업 다 끝났지? 애들 전부 집에 갔어?”
“지금쯤 전부 갔을 겁니다. 벌써 수업 끝난 지 30분도 더 지났는걸요.”
“그럼 비상 걸어. 일요일 아침 9시까지 학생회관으로 집합하라고 비상 걸란 말이야.”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않을 거예요. 최강철 선배 시합 있는 날인데 비상이라뇨. 아무리 급한 학교 일이라도 애들은 절대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비상 걸라고. 학장님 지시 사항이야. 우리 경영대학 학생들은 학생 회관에서 모여 응원하기로 했으니까 무조건 나오라고 전하란 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지금 이 마당에 실없이 농담이나 하고 있겠냐? 난 다른 학년 과대표한테 가봐야 하니까 네가 1학년 잘 챙겨. 열외는 한 명도 없어. 안 오는 놈은 학교생활 하기 어려울 테니까 알아서 기라고 해.”
“염려 마십시오, 선배님. 그런 거라면 제가 모가지를 끌고 오는 한이 있더라고 반드시 조치해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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