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32화 (132/308)

[132]

* * *

최강철은 시험을 마치고 체육관에 들러 짐을 전부 챙긴 후 대치동으로 향했다.

마지막 날이었기에 전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구미에 있는 큰형네와 큰누나 내외만 빼고 다 모였다.

큰형네는 저번 주에 이미 다녀갔기 때문에 굳이 먼 길을 오겠다는 걸 최강철이 극구 말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둘째 형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해 주었다.

둘째 형은 커피숍의 총지배인으로 근무하면서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일머리를 몰라 헤맸지만 점차 좋아지더니 이제 커피숍을 전반적으로 통솔하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기분 좋은 것은 부모님의 표정이 몰라보게 밝아졌다는 점이다.

그렇게 말렸음에도 제대를 해서 빈둥빈둥 노는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한동안 애간장을 태우셨는데, 정시에 출근해서 밤늦도록 성실히 일하는 아들의 행동에 모든 시름이 날아간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거실로 들어서자 누나들이 웃으며 다가왔다.

“강철아, 어서 와.”

둘째 누나와 막내 누나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결혼한 둘째 누나에게는 복학한 후 매형이 근무하는 영등포 쪽에 집을 사주었고, 막내 누나는 서초동에 꽤 큰 옷가게를 내주었다.

돈이란 필요할 때 써야 한다.

비록 가족들이 흥청망청 써댈 정도로 지원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최소한 불행하게 살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집 안은 온통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찼다.

아버지께 인사를 드린 후 주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불고기를 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엄마, 이러다가 아들 시합도 못 하겠네.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하면 배가 터지게 먹어서 뚱뚱해져요.”

“이제 떠나면 한동안 못 올 텐데 먹고 싶은 건 실컷 먹어야 혀.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잠시만 기다려라.”

“예.”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가 최강철의 등을 떠밀었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는 평소의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신 게 분명했다.

저녁상이 차려지자 가족들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정겹게 밥을 먹었다.

최강철도, 가족들도 시합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이 걱정과 이별의 슬픔으로 빠져드는 걸 애써 피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는 혼자서 소주를 마셨다.

둘째 형과 최강철이 번갈아 따라 드렸는데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 소주병은 이미 절반 이상이 비워졌다.

아버지는 주량이 약하시다.

소주 한 병을 마시면 무조건 주무실 정도인데 그럼에도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기쁠 때, 그리고 슬플 때도 소주를 즐겨 드셨다.

“강철아, 아부지가 주는 잔 받을 거여?”

“예, 아버지.”

불현듯 잔을 들어 내미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면서 최강철은 지체 없이 잔을 받아 들었다.

생전 처음이다.

아버지는 고지식하셔서 지금까지 아들들에게 술을 따라준 적이 없는 분이다.

고개를 돌려 단숨에 술을 마신 후 아버지께 다시 술을 따라 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소주잔을 든 채 그대로 최강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철아, 사람들이 너를 보고 대한민국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하드라.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쁘기도 했지만 너무 걱정돼서 웃을 수가 없었구먼. 영웅은 허울 좋은 개살구여. 나는 우리아들이 그런 소리를 듣는 것보다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한다. 강철아,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그냥 최선만 다혀. 힘들고 아프면 그냥 포기해도 된단 말이여.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겄지?”

“예, 아버지.”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으셨을까.

아마 수도 없이 고민하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하신 말씀일 게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영웅이 되고 싶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싸우는 이유는 이것이 제 숙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루시퍼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싸우지 않으면… 이렇게라도 싸우지 않으면 다 늙은 정신으로 젊은 청춘을 살아가는 지금의 제 인생이 너무나 힘들거든요.

* * *

스타들은 공항에 나갈 때마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위장을 하고 어떤 놈들은 마스크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개중에는 인기가 없는 놈들도 그런 짓을 하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귀찮게 구는 것이 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편안한 청바지에 간단한 티셔츠만 입은 채 아버지가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어머니와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부모님의 입은 떠억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공항 내만 북적거렸는데 오늘은 입구부터 수많은 젊은이가 플랜카드와 피켓을 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택시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내렸다.

아버지는 발레파킹을 굳이 마다하고 직접 주차하겠다며 고집을 부리셨기 때문에 어머니와 둘이 먼저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팔을 부축한 채 차에서 내리자 기다리던 젊은이들의 입에서 환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허리케인, 허리케인, 허리케인!”

승리를 염원하는 목소리다. 그리고 그 고함 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벌써부터 기자들은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공항 밖에부터 최강철의 출국을 실황 중계하는지 카메라가 연신 그의 모습을 잡는 중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주고 천천히 터미널로 들어서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는 김철중을 포함해서 경영학과의 학생들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악다구니를 쓰면서 최강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승리를 하고 돌아온 것도 아닌데 단지 출국하는 것만으로도 공항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들끓었다.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상 이런 환송을 받아본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다, 스포츠는 물론이고 영화배우나 가수를 통틀어도 이런 인파의 환송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최강철이 터미널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호원들이 인간 장벽을 형성하며 경호를 시작했다.

돈 킹의 짓이다.

그는 천문학적인 돈이 걸린 시합을 앞둔 최강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거의 20여 명의 경호원을 공항에 배치시켰다.

“엄마, 아무래도 저와 같이 있으면 불편하실 테니까 잠시 저쪽에서 성일이와 함께 계세요. 인터뷰도 해야 하고 기자들한테 사진을 찍도록 해줘야 되거든요. 성일아, 엄마 좀 모시고 있어라.”

“알았어.”

이미 공항에 들어와 있던 이성일이 번개처럼 달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그나마 조금 한적한 곳으로 향하는 걸 확인한 최강철은 그때서야 언론들이 마련해 놓은 포토 존으로 들어섰다.

마치 무대처럼 펼쳐진 포토 존이었다.

그가 단상에 올라서서 두 팔을 번쩍 치켜 올리자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별빛처럼 터졌고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방송국에서 나온 앵커가 다가온 것은 최강철이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주면서 실컷 사진을 찍게 만들어준 후였다.

“최강철 선수, 제가 잠시 전체 언론을 대표해서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 탑승 수속을 하려면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러니 30분 정도는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시간 내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최강철 선수, 이번 시합을 대비해서 어떤 훈련들을 해오셨습니까? 일부 언론에서는 학교 수업을 계속 받았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요.”

“저는…….”

앵커의 질문은 많았다.

첫 질문을 시작으로 상대인 듀란에 대한 평가와 승리를 위한 전략이 있는지 물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대답했던 내용이었기에 최강철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앵커의 질문을 해결해 나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 나온 것은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최강철 선수, 최근 뉴욕타임지의 기자가 한 장의 사진을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진에는 최강철 선수가 마크 브릴랜드의 시합이 끝난 후 묘령의 여인과 같이 식사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는데요. 혹시 그분이 누군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슬쩍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레스토랑에는 기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사진을 찍어 뉴욕 타임지에 알려준 모양이었다.

그것도 돈이 되었던 걸까.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생활을 찍어서 돈을 버는 파파라치가 있다는 소린 들어봤지만 자신의 사진이 그런 데 쓰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최강철의 표정은 곧 풀어졌다.

“그녀는 저와 사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와!”

텔레비전의 앵커가 최강철의 대답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문 기자 중의 하나가 끼워 넣은 질문이었기에 물었던 것뿐인데 최강철이 전혀 거리낌 없이 대답을 하자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경력이 13년이나 되는 베테랑 기자였기 때문에 최강철의 대답에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지금은 여자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다.

나중에는 특종으로 다뤄져야 할 내용이겠지만 지금은 최강철의 출정식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무조건 넘겨야 했다.

“최강철 선수, 마지막으로 열렬하게 성원을 하고 있는 국민들께 한 말씀 해주시죠.”

“안녕하십니까, 최강철입니다. 미국에서는 저의 별명을 허리케인이라고 부릅니다. 저의 경기가 그만큼 화끈한 경기를 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인 것 같습니다. 복싱 경기는 수많은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승부를 자신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상대가 듀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아로서 부끄러운 경기는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마지막 한순간까지 최선을 싸우겠다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행사를 끝내고 부모님의 앞으로 다가가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왜냐고?

공항에서, 그것도 수많은 환송 인파 앞에서 굳이 큰절을 한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인생을 살아보지 못하셨다.

남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온 인생에서 이런 기쁨 정도 드리는 것이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겠지.

세상은 역시 출세를 하고 볼 일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일반 출국 심사대와 전혀 차원이 다른 VIP 전용 출국 심사대를 이용해서 출국 대기장으로 들어서자 공항 관계자가 직접 나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귀빈실로 안내했다.

커다란 귀빈실에 앉은 건 최강철 일행밖에 없다.

여전히 동고동락하며 전우애를 쌓아가고 있는 윤성호와 이성일은 귀빈실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만들 하시지. 남들 볼까 두렵네.”

“강철아, 이건 도자기 아니냐. 엄청 비싸 보여.”

“저 그림은 어떻고요. 저거 말이 막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지 않냐?”

최강철이 퉁방을 줬어도 둘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연신 떠들어댔다.

미국의 언론은 물론이고 국내의 언론들마다 최강철의 스태프에 대해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복싱 황금 체급인 웰터급 통합 챔피언의 스태프가 단지 두 명뿐이라는 사실과 그들의 경력이 너무 일천하다는 것이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한 게 분명했다.

그들의 주장은 스태프의 충원이 필요하다는 것과 최고의 전문가를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최강철은 언제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들만 있으면 된다.

귀빈실을 바라보며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떠드는 이들만 있으면 나는 누구와 싸워도 두렵지 않다.

길고긴 비행.

미국까지의 비행시간은 무려 13시간이 걸렸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날아갔음에도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지루했다.

미국 뉴욕공항도 김포공항 못지않게 난장판이었다.

시합이 점점 다가오면서 미국은 물론이고 수많은 외신 기자까지 몰려들어 공항 터미널이 마치 시장터처럼 변해 있었다.

비슷한 행사를 치르고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나갈 때 사람들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서지영과 황인혜의 모습이 보였다.

황인혜의 모습이 보이자 윤성호는 사람들의 눈을 상관하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윤성호는 최강철의 시합이 확정되는 바람에 결혼 날짜까지 연기했던 터라 더욱 애달팠을 것이다.

하아, 관장님.

도대체 선수를 쳐서 그런 짓을 해놓으면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윤성호와 황인혜의 모습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최강철이 경호원들의 숲을 헤집고 천천히 서지영에게 다가갔다.

윤성호가 무슨 짓을 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으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최강철은 그런 기자들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고 서지영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지영 씨, 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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