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정적은 길지 않았다.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면서 두 손을 번쩍 치켜드는 순간, 관중들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는데 최강철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연호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김도환이 충격으로 다물어지지 않았던 입을 겨우 열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옆에 서 있던 정기수한테 한 말이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링 위에서 윤 관장과 이성일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최강철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선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정 부장님, 군침이 도는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넋을 잃고 최강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탐욕이 가득 담겨 있었기에 김도환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직업이잖아. 당연히 군침 돌 수밖에.”
“펀치가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엄청난 연타 능력에 펀치력까지 겸비했으니 당장 프로에 데뷔해도 되겠는데요.”
“가끔가다 괴물들이 나타나곤 하지. 홍수환이나 유재두처럼 불현듯 나타나서 세계를 재패한 괴물들 말이야.”
“어쩔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뭘 어째.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을.”
“저놈이 고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와우, 미치겠네.”
“17살이더라. 창창하지.”
“그럼 찜이라도 해놔야죠. 대한 측에서 저놈에 대해 알게 된다면 눈에 불을 켤 텐데요. 그쪽은 집요하기로 소문났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만나볼 생각이야. 김 기자 말대로 이쪽 세계는 먼저 찜한 쪽이 우선권을 가지니까.”
“잘되길 바랍니다. 제 눈으로 봐도 저놈은 성공할 것 같군요.”
“고맙군.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저 자식이 프로로 데뷔할 생각이었다면 아마추어 경기에 나왔겠어?”
“그렇긴 하죠.”
“앞으로 재밌어질 것 같아. 절대 강자인 강북4웅에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으니 판도가 뒤집히겠다.”
“쟤가 그 정도예요?”
김도환이 정기수의 말을 듣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북4웅은 아마추어 웰터급의 절대 강자들로서 한 사람이 국가 대표를 독식하는 다른 체급과 달리 번갈아가며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다는 선수들이었다.
그들 4명을 강북4웅으로 부르는 것은 소속된 체육관이 전부 강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기수가 최강철을 그들과 비교한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강철이 대단한 실력을 자랑하며 신인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지만 그들은 여기 출전한 사람들과 비교 불가능 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기수는 자신의 판단을 뒤로 물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커리어만 쌓이면 충분히 해볼 만할 거야. 놈은 어린 나이답지 않게 냉철한 판단력과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신인은 상대가 그로기에 몰리면 선뜻 펀치를 내지 못하는데 놈은 전혀 망설임이 없었단 말이야. 두고 봐. 내가 봤을 때 저놈은 분명 2년 내에 강북4웅을 작살낼 테니까.”
“괜찮군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쓸 생각인 모양이네.”
“그림이 잘 만들어졌잖습니까. 아마추어에서 6연속 KO승은 드문 일이죠. 분명 독자들이 좋아할 겁니다. 저놈이 잘되었을 때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나라는 걸 증명해야죠.”
윤 관장은 접근해 온 정기수를 단칼에 물러나게 만들었다.
최강철은 자신의 보물이었는데 듣도 보도 못했던 놈이 군침을 흘리자 거품을 물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신인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다음 날 윤 관장은 체육관 정면에 현수막을 대문짝하게 붙여서 자신의 기쁨을 마음껏 나타냈다.
비록 복싱 대회 중 최하급인 서울시 신인 선수권대회였지만 자신이 직접 키운 제자가 우승을 하자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해했다.
최강철의 우승 소식은 스포츠서울에 단신으로 났기 때문에 사진은 담겨 있지 않았다.
기사에서는 최강철이 6연속 KO승을 거두며 우승했는데 앞으로 웰터급의 판도를 바꾸어놓을 기대주라고 쓰여 있었다.
* * *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최강철은 착실하게 피지컬을 키워 나갔고 공부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9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최강철은 서울시장 배 복싱 대회 고등부를 석권했고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연전연승.
서울시장 배에서의 5연속 KO승, 전국체전에서의 4연속 KO를 합해 지금까지 15연속 KO승을 기록했다.
복싱계가 서서히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비록 고등부에서 쌓은 전적이라고는 하나 최강철의 15연속 KO승은 헤드기어를 쓰고 시합하는 아마추어 복싱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강철이 우승을 해나갈수록 성호체육관 앞에는 현수막의 숫자가 점점 늘어갔고 관원들의 숫자도 불어났다.
윤 관장은 최강철을 보물 다루듯 했는데 관원이 불어나자 코치를 한 명 영입해서 훈련을 전담하게 만든 후 자신은 온통 그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해서 원하는 일을 들어준다는 말이었다.
정확하게 1년 2개월 만에 최강철의 몸무게는 69㎏을 찍었는데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매가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다.
최강철은 훈련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정해놓은 목표가 있으니 오로지 전진할 뿐이었다.
자신의 계획은 권투로부터 시작되고 이 일을 제대로 끝내야 다음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비참했던 삶을 뒤로하고 찬란한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생각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모든 관심은 그에게 향해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벌인 행동들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1학년 2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전 과목 100점을 받아 전교 수석을 차지했고 2학년 들어와서도 중간고사를 또다시 휩쓸었다.
학교 측에서는 그의 성적을 기적이라 불렀다.
4연속 만점은 정문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이대로라면 개교한 이후 최초로 서울대 입학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랬기에 2학년 담임을 맡은 황창구는 수시로 최강철을 불러 권투를 그만두길 종용했다.
전교 수석으로 학교 측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가 권투를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며 담임선생은 심지어 살려달라는 표현까지 썼다.
담임선생 역시 학교 측에서 커다란 압박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 부모님까지 동원하며 압박해 왔으나 그는 권투로 인해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는 기괴한 논리로 부모님을 설득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권투를 하면서 성적이 안 나오면 모를까 최강철은 복싱을 시작한 후 누구나 놀랄 정도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의 말은 들은 후 두 번 다시 복싱을 그만두라는 권유를 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피지컬은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온몸에 차돌같이 들어선 근육들이 종마 같은 체력을 끌어내어 3㎏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전력으로 10㎞를 달려도 끄덕 없게 만들어주었다.
끊임없이 지속해 온 상체 근력 강화 운동은 어깨를 넓혀주었고 상체 골고루 근육을 심어놓았는데 복부에는 임금 왕 자가 주름처럼 깊게 파여졌다.
요즘 유행하는 짐승남의 전형적인 상체.
그의 벗은 몸매를 여자들이 봤다면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 황홀한 체형이 완성된 것이다.
천천히 걸어 체육관으로 들어서자 20여 명의 관원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처음 왔을 때 50명이었던 관원 숫자는 이제 100명이 훌쩍 넘고 있었다. 계속해서 우승을 하면서 얻은 홍보 효과도 있었지만 복싱 붐이 그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1980년에 복싱은 모든 스포츠 중에서도 비교 불가 한 인기를 얻고 있는 종목이었다.
특히 프로복싱은 맨몸 하나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에 없는 자들에게는 엘도라도와 같은 것이었다.
윤 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사무실로 찾아가자 그가 전화를 받으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게 보였다.
별일이다.
윤 관장은 반골 기질을 가지고 있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전화통 넘어 누군가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을 통화하던 그가 상대방이 전화를 끊자 전화기를 내동댕이치며 최강철을 향해 달려와 미친 듯이 끌어안은 것은 훈련을 위해 가방을 내려놓고 글러브를 챙길 때였다.
“강철아, 드디어… 드디어 우리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무슨 소리세요?”
“복싱 협회에서 전화가 왔어. 너를 국가 대표 선발전에 초청한다고 말이야.”
“정말입니까.”
“지금 온 게 그 전화다. 사무장이 직접 전화를 했더라.”
윤 관장은 소식을 전해주면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국가 대표다. 국가 대표 선발전이란 말이다.
아마추어 복싱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꿈꾸는 국가 대표는 수많은 선수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이 갖는 영광이었다.
윤 관장이 이토록 기뻐하는 것은 아직 경험이 일천한 최강철이 선발전에 초청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대회에서 이제 겨우 두 번밖에 우승하지 못했음에도 국가 대표 선발전에 초청했다는 것은 그만큼 복싱 협회가 최강철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뜻이다.
당시의 국가 대표 선발전은 권위 있는 대회의 우승과 준우승 전력이 있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치러졌는데 최강철은 지금까지 고등부에 출전했기 때문에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복싱 협회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강북4웅 이라는 웰터급의 강자들이 국제 대회에서 전부 일본의 히로키에게 막혀 기를 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영웅.
복싱 협회에서는 히로키를 꺾을 새로운 영웅이 필요했고 그 대상자 중에 한 명으로 최강철을 선택한 게 분명했다.
“언제랍니까?”
“6월 15일. 주요 대회의 입상자들만 선별해서 국가 대표 한자리를 놓고 승부를 벌이기 때문에 빡세도 보통 빡센 게 아니야.”
“좋군요.”
“여기서 이긴 놈이 10월 달에 서독에서 열리는 세계 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고 하더라.”
“관장님, 서독 가봤습니까?”
“아니. 내가 거기 갈 일이 뭐가 있어. 자식이, 가끔가다 아픈 델 찌른단 말이지.”
“곧 갈 겁니다. 내가 관장님 서독 구경시켜 드릴게요.”
“하하하… 인마, 국가 대표 선발전은 네가 출전했던 대회들과 수준이 달라. 고등학생 신분으로 초청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참가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그저 열심히 준비해서 국가 대표급 놈들이 얼마나 센지 경험이나 한다고 생각해.”
“관장님, 전 구경이나 경험 같은 거 싫어하는 놈입니다.”
“무슨 소리냐?”
“이번에 이겨서 국가 대표가 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관장님은 10월 달에 서독 갈 준비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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