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 * *
준결승 상대는 맹호체육관의 기종서였다.
아마추어 전적이 이번 시합까지 11전이었고 그중 8번을 이겼는데, 키가 작은 반면 체구가 단단해서 접근전에 능한 인파이터였다.
그는 준결승까지 치른 4번의 경기에서 2차례나 RSC승을 거뒀다.
“강철아, 절대 거리를 주지 마라. 알았지?”
“예.”
“외곽으로 돌면서 포인트를 쌓으란 말이야. 자칫하면 럭키 펀치에 당할 수도 있어.”
“예.”
마우스피스를 끼워주며 윤 관장이 떠들었으나 최강철은 간단하게 대답한 후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웅크린 채 링 중앙으로 나오는 놈의 모습이 마치 황소 같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그림을 그려 나갔다.
윤 관장의 말처럼 외곽으로 빙빙 돌면서 점수나 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과거의 비겁했던 삶.
두려움에 겨워 작은 상처를 피하며 구걸하듯 살아왔던 인생을 링 위로는 절대 가져가지 않는다.
윤 관장이 뭐라고 계속 말했으나 최강철은 가볍게 몸을 풀며 레퍼리의 신호를 기다렸다.
띠잉!
공이 울리자 기종서가 주먹을 앞으로 뻗어 인사를 해왔다.
나름대로 전적이 있다더니 예의를 먼저 차렸기에 가볍게 주먹을 마주 부딪쳤다.
기종서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주먹을 부딪친 후 한 발 물러섰던 기종서의 전진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강력한 인파이팅으로 체력을 고갈시켜 우세를 점하려는 작전을 펼치려는 것 같았다.
피지컬이 눈에 띄게 좋아졌으나 상대 진영에서 봤을 때 아직 몸이 완벽하게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체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4번 모두 1회전에 끝냈으니 충분히 오판할 가능성이 컸다.
양 훅을 날리며 전진하는 기종석의 인파이팅을 백스텝과 사이드스텝으로 피하면서 레프트 잽으로 견제했다.
공간을 날아간 최강철의 레프트 잽은 스트레이트성이었기 때문에 따라 들어오는 기종서의 안면을 연신 흔들었다.
기종서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분이 지났을 때였다.
최강철은 다른 공격을 하지 않고 오직 레프트 잽으로 견제만 했는데도 기종서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움직임이 둔해지는 순간부터 레프트 잽이 더욱 강력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긴 리치를 이용한 레프트 잽이 마치 화살처럼 날아가 기종서의 안면에 연신 꽂히자 링 사이드에서 관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최강철이 1분 넘도록 레프트 잽 하나만 가지고 시합을 했기 때문인데 오른손을 다친 것 아니냐는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구심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강력한 레프트 잽에 의해 기종서가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서자 최강철의 오른쪽 스트레이트가 송곳처럼 터졌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펀치였다.
기종서는 지금까지 최강철의 오른손 펀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지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안면을 저격당했다.
안면이 덜컥 뒤로 밀리는 순간 벼락처럼 다가간 최강철의 훅이 비어 있는 기종서의 양쪽 옆구리를 강타했다.
짜릿한 감각.
기종서는 보디 공격을 당한 후 뒤로 펄쩍 뛰며 두 발자국이나 물러섰다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그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바닥에 모로 쓰러져 헛구역질을 하면서 죽어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 관장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수많은 강자를 꺾고 한국 챔피언을 지낸 그는 최강철이 준결승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상대를 꺾었으니 그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천재다. 그것도 괴물 같은 천재.
기종서 같은 인파이터를 가장 효율적으로 상대하는 것은 금방 최강철이 보여준 것처럼 레프트 잽으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레프트 잽으로 견제하라는 주문을 하지 않은 이유는 신인으로서 너무나 위험한 전략이기 때문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레프트 잽은 강한 인파이터에게는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기에 가급적 스텝을 통해 아웃복싱을 하라고 했는데 최강철은 레프트 잽 하나만 가지고 상대를 박살 내버렸다.
기종서를 쓰러뜨렸을 때 속으로 ‘하나님 만세’를 외쳤다.
이런 괴물을 자신에게 선물해 주었으니 자신은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했던 게 틀림없었다.
예상대로 또 다른 준결승에서는 조남석이 상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끝에 3라운드 RSC로 승리했다.
그는 예전보다 한층 기량이 발전해 있었는데 상대를 요리하는 솜씨가 훌륭했다.
“강철아, 봤지. 놈의 주 무기는 스트레이트야. 더군다나 너와 리치가 비슷해서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달라. 네 눈으로 본 것처럼 조남석은 거의 맞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잘 모르겠습니다.”
“저놈의 방어 능력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조남석은 집중적으로 스토핑을 훈련한 것 같아. 암블로킹도 제법 괜찮고. 상대가 제대로 주먹조차 뻗지 못한 건 놈이 사전에 공격 자체를 방해했기 때문이야.”
스토핑은 상대가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주먹으로 상대의 주먹이 쉽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수법이었다.
쉽게 말해서 잽을 내미는 것처럼 상대의 왼쪽 손을 툭툭 쳐서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을 말하는데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다.
“강철아, 스토핑을 무너뜨리는 것은 스피드가 관건이다. 그러니까 놈이 만들어낸 거리를 단박에 무너뜨리면 스토핑을 제압할 수 있어.”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그런데 관장님, 조금 떨어져서 말하세요. 너무 목소리가 커서 귀가 아프다고요.”
“이 자식아, 장난하니. 지금 작전 얘기하는데 귀 아픈 게 대수야!”
“하하하… 침 튑니다.”
라이트 웰터급까지 여섯 체급의 우승자가 결정되었고 드디어 최강철이 출전하는 웰터급의 차례가 돌아왔다.
재밌는 것은 다른 체급의 경기가 펼쳐질 때 멀찍이 떨어져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링 사이드로 몰려들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경기를 치른 선수들과 스태프들까지 섞여 있었는데 그들의 눈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도환의 입이 불쑥 열린 것은 링 사이드로 거의 100여 명이 몰려들었을 때였다.
“물건이네.”
“그렇구만. 물건 맞아. 사람을 끌어모으는 매력이 있어.”
“정 부장님, 준결승을 본 소감이 어떠세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부장님의 눈이 더 정확할 테니 한 말씀 해주시죠.”
“레프트 잽이 일품이더군. 거의 스트레이트와 같은 위력을 가졌어. 더군다나 마지막에 터뜨린 양쪽 보디 공격은 정확하게 보고 때린 거야.”
“실력이 괜찮다는 말이군요.”
“그냥 괜찮은 게 아냐. 저놈은 매의 눈을 지녔다고. 상대가 움직일 때 눈이 떨어지지 않더구만. 거기다가 스피드가 장난 아니잖아. 아무래도 저놈으로 인해 웰터급에 지각 변동이 생길 것 같아.”
“강력한 펀치력에 테크닉, 그리고 스피드라. 신인을 너무 높게 쳐주는 것 아닙니까?”
“그거야 결승전을 보면 알게 되겠지. 준결승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우리 함께 지켜보자고.”
링에 올라 천천히 워밍업을 하면서 몸을 풀었다.
워낙 신인급 대회라 소개조차 하지 않았는데 링 사이드에 몰려든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최강철의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호 인사를 건넨 후 윤 관장의 악다구니와 이성일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링 중앙으로 나갔다.
첫 대회였지만 지금까지 상대했던 선수들의 수준은 마음껏 기량을 뿜어내기에 한참 모자를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러나 조남석은 다르다.
그의 시합을 지켜본 결과 다른 선수들보다 한 단계 높은 실력이 확인되었으니 지금까지 준비해 왔던 것들을 마음껏 펼쳐볼 생각이었다.
역시 균형이 잡혀 있다.
가볍게 뻗어내는 펀치에 힘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공간을 넘어 목표점에 도착했을 때의 임팩트가 좋았다.
펀치를 보면서 더킹으로 가볍게 흘려낸 후 레프트 잽으로 상대의 다음 공격을 차단했다.
조남석은 그의 경기를 분석한 듯 스토핑을 걸어 펀치를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재밌다. 그리고 즐겁다.
때리는 대로 맞는 자들과의 시합은 긴장감도 없고 자신의 실력을 펼칠 기회도 없다.
조남석은 철저히 거리 싸움을 하면서 최강철의 레프트 잽을 견제한 후 공격을 가해왔는데 한 번에 서너 개의 펀치를 날려 왔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위빙과 더킹으로 조남석의 공격을 받아내며 좌우로 돌았다.
빈 곳이 보인다. 하지만 치명적인 공격을 참으며 자신이 익혀온 방어술을 펼쳤다.
위빙과 더킹, 그리고 암 블로킹에 이은 스텝의 이동.
반격을 가하지 않자 조남석의 공격이 점점 거칠어졌으나 몸에 적중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가끔가다 스쳐 맞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펀치는 허용하지 않았는데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려보냈기 때문에 아무런 대미지도 받지 않았다.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초감각. 루시퍼가 그에게 준 반사 신경은 위험한 펀치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1라운드 내내 조남석의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즐거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꽤 괜찮은 수준의 공격을 자신이 익혀온 방어 기술로 전부 차단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1라운드를 끝내고 코너로 돌아오자 윤 관장이 잡아먹을 것처럼 그를 노려봤다.
“이 자식아, 왜 공격을 안 해. 졸았어!”
“졸긴요. 결정적인 건 전부 피했잖아요.”
“반격하라고. 그렇게 공격만 받다가는 진단 말이다. 아무리 저놈의 공격이 강해도 그렇지 펀치를 내야 될 거 아냐.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말 몰라!”
“걱정 마세요. 이번 라운드에서 끝낼 테니까. 공격이 강해서 피하기만 한 거 아닙니다. 1라운드는 관장님이 가르쳐 준 방어 기술이 통하나 안 통하나 시험해 본 것뿐이에요.”
“뭐라고! 이 미친놈이…….”
“관장님, 저녁은 삼겹살 사주세요. 오늘은 그게 당기네. 성일아, 너도 좋지?”
“아이고, 인마. 일단 우리 시합부터 이기자. 나 심장 떨려 죽겠어.”
“크크크… 기다려,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링 중앙으로 나가자 조남석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놈은 자신이 피하기만 하자 자신의 펀치에 겁을 먹었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좌우 스트레이트를 더킹으로 피하며 라이트 훅을 가동시켰다.
크로스 카운터.
고개를 숙인 상태였지만 눈은 정확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조남석의 턱이 남산만 하게 보였다.
라이트 훅에 적중당한 조남석이 휘청하며 뒤로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최강철이 성큼성큼 전진 스텝을 밟으며 따라 들어갔다.
단방에 끝낼 생각은 없었다.
1라운드에서는 방어 기술을 시험해 봤으니 이번 라운드에서는 자신이 익혀온 공격 기술들을 전부 터뜨려 볼 생각이었다.
빛살처럼 터지는 좌우 스트레이트, 그리고 양쪽 바디.
기형적인 각도에서 올라간 어퍼컷과 머리를 맞댄 채 시전된 쇼트 훅.
펀치의 강도를 조절한 최강철의 펀치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자 조남석이 연신 뒤로 밀렸다.
그런 상대를 야금야금 뒤따르며 천천히 무너뜨렸다.
제대로 된 임팩트를 가했다면 조남석은 지금쯤 벌써 황천길을 건넜을 테지만 마지막 순간에 힘을 반쯤 뺐기 때문에 아직까지 두 발로 서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조남석의 혼은 반쯤 날아가 있었다.
최강철의 펀치 각도는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스트레이트에 이은 양 훅 공격과 어퍼컷의 조화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남석을 무너뜨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0초면 충분했다.
펀치력을 반으로 줄였음에도 그 30초 동안 날아간 50여 발의 펀치는 캔버스를 조남석의 침대로 만들어 버렸다.
엄청난 연타 능력.
링 사이드에 늘어선 채 경기를 관전하며 소리를 지르던 관중들이 최강철의 마지막 무시무시한 연타 공격에 조남석이 정신을 잃어버린 채 캔버스에 길게 쓰러지자 동시에 입을 닫았다.
충격. 그래, 충격이 맞다.
최강철의 공격 능력은 이런 수준의 대회에서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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