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윤 관장은 모른다.
자신이 고등부 대회에서 일부러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성호체육관에는 제대로 된 스파링 파트너가 없었기 때문에 실전 훈련을 위해서 최대한 길게 라운드를 끌고 갈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신인 선수권대회처럼 1회전에 끝내지 않았다.
상대가 가진 기량을 최대한 끌어낸 후, 자신이 익힌 기술들을 차근차근 꺼내 들어 3라운드에서 결판을 냈는데 마지막 순간 적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놓았다.
첫 대회가 끝난 후 스토핑과 패링, 스웨잉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익혔고, 보다 커다란 세상을 대비하기 위해 숄더블로킹까지 장착했다.
이제 웬만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은 자신에게 어떤 펀치도 적중시키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는 뜻이다.
국가 대표 선발전은 윤 관장의 말대로 지금까지 그가 출전했던 대회들과 근본적으로 커다란 수준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귀가 따갑게 들었던 강북 4웅은 물론이고 최근 급격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강자들까지 전부 출전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경기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혀 두렵지 않다.
반드시 해낸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일 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번 기회를 잡아야 한다.
* * *
“그놈 괜찮을까?”
“왜요?”
“너무 수준 차이가 나면 우리 때문에 유망주 하나가 죽을 수도 있어.”
“반대로 그놈이 우승하면 우린 히로키를 꺾을 수 있는 비밀 병기를 갖게 되죠. 사무장님도 보셨잖습니까?”
“봤지. 대단하더군. 하지만 그건 고등부 시합이었잖아.”
“이번에 져서 국가 대표가 되지 않는다 해도 그놈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큰물에서 놀아본 놈이 더 성장하는 법이니까요. 만약 사무장님이 걱정하는 것처럼 한번 패배로 정신이 꺾인다면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놈이니까 버려도 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왜지?”
“저는 그놈을 처음 발견한 후부터 계속해서 따라다녔습니다. 최강철의 눈에는 독기가 살아 움직입니다. 기회가 오면 상대를 박살 내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런 놈은 한번 진다고 해서 그냥 꺾이지 않습니다.”
정기수가 자신에 찬 말투로 복싱 협회 사무장인 유광호를 향해 말을 했다.
그는 윤 관장에게 퇴짜를 맞았지만 전혀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 돌아서면서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란 말을 남겼다.
그런 후 최강철이 시합에 출전할 때마다 쫓아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볼수록 군침이 돌아 저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처음과 또 다르다.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았음에도 최강철의 방어 기술들은 진화되었고 펀치의 정교함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그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복싱 선수로서 가져야 하는 판단력과 결단력이 새파랗게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지능이 뛰어나고 심성이 독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복싱 선수는 단순히 펀치력이 강하고 기술이 좋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전략을 철저히 파악하는 두뇌와 기회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모두 갖춰졌을 때 진정한 강자로 등극하는 것이다.
그가 봤을 때 최강철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었다.
불과 고등부 경기만 치른 그를 국가 대표 선발전에 반드시 출전시켜야 한다며 사무장을 설득한 것도 최강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정기수가 워낙 강하게 말을 하자 걱정을 늘어놓았던 유광호의 얼굴에서 슬며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었던 그가 최강철을 국가 대표 선발전에 포함시킨 것은 경기를 본 후 그 역시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정기수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때 돌아올 반사이익을 생각한다면 쉽게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국내 최대의 프로모션 ‘극동’의 실세 정기수는 그에게 커다란 돈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여간, 이제 보름 남았군. 그놈 열심히 훈련한다면서?”
“윤 관장하고 붙어삽니다. 잠시 가서 봤더니 훈련량이 대단하더군요. 그 나이에는 쇠도 씹어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놈을 보니까 실감이 나던데요.”
“윤성호가 키워서 그런가 스트레이트는 정말 일품이더구만. 예전에 윤성호의 스트레이트를 맞고 견딘 놈들이 없었지.”
“그렇죠. 윤성호가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최소 동양 챔피언은 먹었을 겁니다. 하지만 최강철의 진짜 주 무기는 레프트 잽입니다. 거의 송곳처럼 들어가죠. 상대한 놈들은 레프트 잽에 대부분 초죽음이 됐으니까요.”
“다른 놈은 없던가?”
“성호체육관 말인가요?”
“그래, 최강철 말고 괜찮은 놈은 없어? 윤성호가 가르치면 다른 유망주도 꽤 있을 것 같은데?”
“없습니다. 윤 관장은 아예 다른 놈들은 쳐다보지 않고 있어요. 오직 최강철 옆에 붙어서 시합에 대비하는 중입니다.”
“하긴 아무리 잘 가르쳐도 인재가 없으면 소용이 없는 법이지.”
“어쨌든 저는 요즘 즐겁습니다. 그놈이 이번 선발전에서 깽판을 쳐버리면 난리가 날 겁니다.”
“나도 그놈이 잘됐으면 좋겠어. 강북 4웅이란 별명은 어떤 새끼가 지어준 건지 모르지만 어울리지 않아. 전부 히로키에게 깨진 놈들한테는 너무 과분한 별명이라고. 우물 안 개구리들이지. 히로키, 누구라도 그 새끼를 이겨주기만 하면 내가 업고 다니겠다. 다른 체급은 안 그런데 꼭 웰터급만 일본 놈에게 개차반이 난단 말이지. 이놈의 웰터급 때문에 국민들한테 욕먹은 걸 생각하면 이가 갈려요.”
“기대해 보시죠. 정말 최강철이 사고를 칠 수도 있으니까요.”
피지컬이 좋아지자 체력은 끝없이 솟구치는 샘물처럼 전신을 휘돌았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아마추어 경기를 하고 있지만 곧 프로로 데뷔할 테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피지컬을 더 가다듬고 싶었다.
프로는 아마추어 복싱과 달리 짐승들이 사는 곳이었다.
아마추어 복싱이 초식동물들의 세상이라면 프로 복싱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이 판치는 맹수들의 세계였다.
더군다나 이번 시합은 아마추어 복싱에서는 최강자들이 모두 출전하기 때문에 테크닉 면에서 웬만한 프로복서들을 찜 쪄 먹는 선수들과 싸워야 한다.
아마추어 복싱은 3라운드만 뛰기 때문에 프로 복싱보다 훨씬 스피드가 빠르고 테크닉도 더 정교했다.
최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정말 기대되는 일이다.
국가 대표 선발전이 다가왔지만 최강철은 학교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고, 훈련이 끝난 후 공부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이젠 9개월 동안 계속해 온 영어 회화는 완벽하게 머릿속에 저장되어 당장 미국에 날아가도 웬만한 대화는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려놨고, 지금 진행되는 교과목은 물론 3학년에 배울 내용까지 공부해 놓은 상태였다.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이제 막내아들이 권투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늦게 들어와서 공부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부모님은 한숨을 길게 내리쉬었다.
“강철아, 이제 3일 남았다. 자신 있지?”
“걱정 마라. 나는 반드시 국가 대표가 된다.”
“그럼 당연하지, 너는 천하무적이야. 강북 4웅인지 지렁인지 너한테는 상대가 안 돼.”
“무협지 좀 그만 봐라, 이놈아. 대화 수준 좀 올려. 문학적인 걸로 우아하게 말하면 오죽 좋아?”
“지랄, 싸움 고수를 표현할 때 무협지에 나오는 말처럼 현학적이고 아름다운 것도 없어. 천하무적, 얼마나 좋은 단어냐.”
“어이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최강철이 책을 가방에 넣으며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성일을 째려봤다.
그러자 이성일이 최강철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푼수처럼 웃었다.
그는 복싱을 뒷전으로 한 채 최강철의 뒤에서 훈련하는 시간과 스케줄을 체크했는데 매니저 흉내를 톡톡히 냈다.
“그런데 강철아.”
“왜?”
“정태가 문화여고 애들이랑 미팅하자는데… 다음 주에. 너 그때 되면 시합 끝나잖아. 같이 가자.”
“이놈은 예나 지금이나 여자 정말 좋아해. 싫다. 고등학생이 무슨 미팅이야.”
“인마, 우린 청춘이라고. 청춘의 특권은 여고생을 사귈 수 있다는 거다. 너 그렇게 훈련하고 공부만 하다가는 일찍 늙어. 인마, 너를 위해 마련한 자린데 싸가지 없이 나올래!”
“잘하는 짓이다. 시합 앞둔 친구한테 유혹 질이나 하고. 그런데 예쁘다냐?”
“얼씨구, 그런 건 왜 물어봐. 시합 앞둔 놈이.”
“크크크… 나도 지금은 청춘이거든.”
국가 대표 선발전은 다른 대회와 달리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다.
선발전을 토대로 세계 선수권대회의 출전이 결정되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번 대회를 비중 있게 다뤘다.
최근 들어 프로 복싱 타이틀전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선발전이 벌어지는 장충체육관은 대한민국 프로 복싱 메카로서 대부분의 세계 타이틀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모든 체급의 출전 선수는 16명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결승까지 오른다면 4경기를 치러야 한다.
대회가 이틀에 걸쳐 벌어지는 이유는 경기를 치른 선수들이 체력을 회복해서 완벽한 기량을 펼치게 하려는 배려 때문이었다.
윤 관장과 함께 정문을 통과해서 체육관으로 들어서자 꽤 많은 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가 대표 선발전에 출전권을 획득한 최강철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비록 고등부 경기였지만 15연속 KO승을 이끌어 낸 최강철은 복싱 기자들 사이에서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기자들은 질문을 하지 않고 사진만 찍었다.
그 당시에는 시합을 코앞에 둔 선수에게 인터뷰를 하는 건 룰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최강철의 시합은 2번째였는데 첫 경기에서는 강북 4웅을 만나지 않았다.
그의 첫 상대는 전국체전에서 강북 4웅의 한 명이자 현 국가 대표인 마현석에게 져 준우승을 차지한 김기방이었다.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저돌적인 인파이팅을 하는데 스트레이트와 양 훅이 수준급인 선수로 알려져 있었다.
마현석마저 궁지에 몰릴 정도로 강하게 몰아붙이다가 아깝게 졌다고 했으니 결코 만만하게 볼 선수가 아니었다.
정보가 부족하다.
비디오카메라가 통용되는 시기도 아니었고 직접 가서 볼 기회도 없어 김기방이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시합을 기다리며 가볍게 몸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나는 누구든 부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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